제90화
제15편 되돌아가는 길 (2)
숲 안에는 우리 두 사람밖에 없었다.
분명 일행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거기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다니, 내 감각으로 길을 잃다니 믿을 수 없었다.
"설마 길을 잃은 건가?"
라이드 공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드 공자를 보니, 그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낯선 표정은 금방 사라졌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잠깐만요. 위에서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나는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황당하게도 위에 올라와서도 도무지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고, 황당한 경우였지만 나는 오히려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거였군."
큰 의문 하나가 풀렸다.
나는 아래로 내려와 라이드에게 말했다.
"조금 이상하지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빨리 가죠."
"어? 길을 알겠다고?"
내 말에 라이드는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네, 가시죠."
나는 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쪽에서 주춤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라이드를 바라보았고, 라이드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따라왔다.
이동하는 도중에 언제나처럼 마물이 나타났다.
내가 먼저 검으로 막아섰지만, 전과 다르게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제대로 검을 휘둘렀다고 생각했지만, 마물을 스쳐 지나갔고 어떨 때는 너무 깊게 휘둘러 빼내기가 힘들었다.
"젠장, 왜 이리 안 맞지? 좀 도와줘요!"
"나도 노력하고 있어. 저 마물은 내 능력이 잘 안 먹혀!"
뒤에서 뭔가 하는 모양이었지만, 마물은 신나게 나를 공격했고, 상처투성이가 되어서야 겨우 물리칠 수 있었다.
나는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길은 더욱 알기 어려웠지만, 라이드를 이끌고 계속 걸었다.
그 뒤로 몇 차례 싸움이 끝난 뒤, 나는 결국 큰 상처를 입고 걸음을 멈추었다.
윽. 크윽.
나는 악어를 닮은 마물 사체에 걸터앉아 옆구리를 살펴보았다.
살이 갈라져서 내장이 보이고 있었다. 피도 계속 흘러나와 현기증이 나고 있었다.
포션을 들이부었지만, 상처가 심해서 현상 유지도 힘들어 보였다.
"저는 여기까지인 것 같은데요. 더는 못 갈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라이드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살폈다.
저렇게 열심히 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내 상처는 치명상이었고, 더는 움직이기 힘들었다.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라이드가 나무에 기대어 놓은 내 검을 손에 쥐었다.
"생각보다 무거운 검이네. 이런 걸 들고 싸워 왔다는 건가."
그는 인상을 쓰며 검을 움직였다.
능력과 달리, 그는 제대로 검을 배운 것 같았다.
말없이 내 검을 잡고 휘두르고 있는 라이드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당신이었습니까? 일부러 사람들에게서 떼어 놓은 게."
내 말에 그는 피식 웃었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 너무 많아. 아니면 내가 연기력이 부족한가."
"설마, 나 말고도 알아차린 사람이 있었습니까?"
내 말에 그는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찔렀다.
"같은 상처를 입은 교수도 마지막엔 눈치챘지. 몰랐으면 편안하게 죽었을 텐데 왜 아는 척을 해서는."
그는 나지막이 혀를 찼다.
"설마, 교수님이 돌아가신 게 마물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죽인 건가?"
"뭐, 그냥 놔두었어도 죽었을 거니까 마물 탓이라고 해도 될 거야. 브리아에게 말할 것 같아서 조금 빨리 돌아가시게 한 것뿐이야."
그는 무척이나 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를 앞에 두고도 아무 걱정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봐도 이 상처로는 그를 상대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몰랐지만, 내 능력은 마물에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야. 사람의 감각도 뒤틀어 감각을 교란할 수도 있고, 빛기둥의 위치를 착각하게 만들 수도 있지."
역시, 예상대로였다.
내가 길을 잃은 것도, 카트린 조가 이상한 길로 빠진 것도 모두 라이드의 능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공작은, 그리고 가문의 어른들은 이런 내 능력을 무시하고 동생 녀석에게 후계자 자리를 주었단 말이야!"
말을 하다가 말고, 그는 검으로 하늘을 찔러 댔다.
"가문의 후계자가 아카데미로 쫓겨나 다른 떨거지들하고 하하 호호 지내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줄 알아? 아니, 네놈은 애초에 서자니 그런 걸 알 리가 없지."
그는 신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내가 따로 이유를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알아서 그가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입학식에서 봤을 때부터 어제까지 라이드의 그런 사정을 알지 못했다.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똑똑한 고위 귀족의 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나름대로 고통과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솔직히 내가 보기에는 병X 같아 보였지만, 지가 힘들다는데 어쩌겠나.
뭐라 할 이유도, 할 수도 없었다.
라이드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억지로 버티면서 지내는 도중에 어제 드디어 하늘이 날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역시 그 기사 시체가 문제였다
"그 시체는 50년 전에 우리 가문에서 봉인지로 보냈던 기사였어. 둘째 할아버지와 기사단 반을 보낸 큰 계획이었지. 무슨 물건을 찾으려고 했는지는 알 필요 없고, 아무튼 그들은 실패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이 봉인지에 와서 실종되어 버렸어."
나는 멍하니 그가 떠드는 것을 지켜보았다. 현기증이 점점 심해졌지만, 아직은 버틸 만했다.
"그 뒤로 아카데미를 다니게 되는 사람들은 모두 봉인지에 가서 사라져 버린 작은할아버지의 물건들을 찾아오는 게 의무이자 목표가 되었지."
"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찾아질 리가 없었지. 결국 지금은 형식적인 일이 되어 버렸어."
이야기를 듣다가 깜빡 정신을 잃었나 보다.
"어이, 벌써 죽지 마. 내 이야기를 다 들어야지."
라이드는 걱정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그는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형식적인 의무였을 뿐이지만, 실제로 벌어지면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 버려. 후계자 자리에서 쫓겨났던 아들이 다시 올라설 기회가 되는 정도랄까."
그는 말을 하면서 허리에 손을 올렸다.
"죽은 작은할아버지는 만약을 대비해서 일정 거리까지 가까워지면 빛이 나는 반지를 가지고 있었어. 그리고 아카데미에 오는 일족은 그 반지를 가지고 다니지."
그는 자기 손을 보여 주었다. 아카데미에서는 못 보던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져 있었다.
기사 시체를 발견한 뒤에 그는 가방에 넣어 두었던 반지를 꺼내 확인했다. 반지는 붉게 빛나고 있었고, 그는 능력을 발휘해서 일행을 반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유인한 것이다.
운이 나쁘게도 목적지는 마물들의 둥지가 자리 잡고 있었고, 그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서 작은할아버지가 남겨 놓은 물건을 찾는 데 성공한 것이다.
"허, 허리에 차고 있는 주머니가 바로 그 물건입니까?"
"맞아. 우리 가문이 찾던 것. 내가 다시 후계자로 올라서게 만들어 줄 물건이야."
그는 허리에 차고 있는 작은 주머니를 두드렸다.
주머니는 너무 작아서 웬만한 것은 넣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뭐가 들어 있으려나.
멍한 정신에도 호기심이 스쳐 지나갔다.
"나중에 돌아왔는데, 다친 교수님은 나를 의심하고 있었고 어쩔 수 없이 손을 쓰게 되었지."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는 나를 노려보았다.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교수님이 죽게 되어 버렸잖아. 거기다 너도 아는 척을 해서 나를 힘들게 만들고 있어!"
결국 자신이 벌인 일인데, 그는 나와 카트린 교수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사람들을 속였고, 거기다 속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또 거짓말을 하고 나를 죽이려 하고.
아마 그는 어제 처음 큰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거짓말과 살인이 이어질수록 그는 양심이 무뎌지고, 살인에 익숙해졌다.
결국, 그는 아무 거리낌 없이 지금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말해 주고 싶었어. 연극에서 악당이 주저리주저리 비밀을 털어놓는 모습을 보고 비웃었는데, 내가 그 상황이 되니 참기가 무척 어렵더라고."
그는 주절주절 떠든 변명을 마지막으로, 드디어 내게 다가왔다.
"자연사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해가 지기 전에 합류 지점에 도착해야 하니까 먼저 죽이는 것을 양해해 줘."
그는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검을 치켜들었다.
저 검으로 죽게 되면 어제 아침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계획한 대로였다.
어차피 카트린을 살리기 위해 한 번은 죽어야 했다.
그 죽음을 효과적으로 쓰기 위해 여태껏 나는 범인을 찾아다녔다.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품고, 이리저리 물어봐서 범인을 파악하고, 그 뒤에 범인의 입을 열려고 일부러 상처를 입었다.
다행히 범인의 입이 가벼워서 쉽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죽는 것뿐.
크아아아앙!
하지만, 나 혼자 죽는 것은 조금 억울했다.
어차피 지금의 일은 없어지겠지만, 카트린을 죽인 저놈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뭐야! 무슨 소리야!"
라이드가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고, 놀라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타이밍이 맞았네.'
신기하게도 내가 마나를 보고 느끼는 것은 라이드의 능력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길을 찾는 감각은 엉망이 되었지만, 마나를 느끼는 감각은 그대로였다.
덕분에 마물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는 것도, 마물이 많은 곳을 찾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길을 잃은 김에 마물이 많은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이곳은 악어 마물의 둥지였다.
내가 깔고 앉은 마물은 둥지에 남은 암컷이었고, 지금 밀려오는 마물들이 수컷 마물들이었다.
수십 마리의 악어 마물이 사방에 나타났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라이드는 공포에 질려 검을 휘두르고, 능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검은 마물의 몸에 튕겨 나가고, 능력은 마물 한두 마리에게만 영향을 줄 뿐이었다.
"안, 안 돼! 다 왔는데! 내 자리로 돌아가는 건데!"
마물들 사이로 라이드의 비명이 들려왔다.
비명은 점점 작아졌고, 결국 조용해졌다.
마물들이 살을 씹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마물들이 나에게도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먹힐 수는 없지.'
나는 남은 마나를 가득 끌어올렸다.
피와 함께 마나가 밖으로 빠져나갔다.
현기증이 심해지더니, 이제 기력이 모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잠시 뒤 - 혹은 오랜 시간이 지나 - 눈앞이 다시 환해졌다.
울창한 숲과 넝쿨.
어제 보았던 조원들이 엎드려서 헛구역질하고 있었다.
똑같은 광경.
제대로 돌아왔다.
자, 이제 카트린을 구하러 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