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제12편 수색 (1)
내 말에 기사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믿기 힘들어서였다.
"정말인가?"
"믿기 힘든데."
자신들끼리 쑥덕이던 기사들이 한 명을 내 쪽으로 밀어냈다.
"아니, 왜 접니까."
"막내잖아."
"젠장."
"대충 확인만 해. 해가 넘어갔다."
젊은 기사가 투덜거리며 내 앞에 섰다.
판금 갑옷이 노을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같이 가야 하니까 실력 확인이 필요하다……라고 하니까."
그는 검을 들어 올렸고, 나는 등에 멘 검을 잡았다.
"와, 그걸 한 손으로 든 거야?"
젊은 기사가 뒤를 돌아보았다.
"저 정도 힘이면 그냥 데려가도 될 것 같은데요."
"잔꾀 부리지 말고 빨리 확인해 봐."
"쳇."
혀를 차던 기사가 내 앞에 섰다.
"자, 덤벼."
다른 사람들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아카데미 기사들이라서인지, 귀족인 나에게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다른 귀족들이라면 뭐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별 상관없었다. 오히려 이게 더 편했다.
그것보다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검도 제대로 잡지 않고, 자세도 풀어져 있었다.
"그럼, 가겠습니다."
나는 기수식을 행한 뒤에.
쿵!
마나가 가득한 발로 땅을 박찼다.
쉬이익.
기사의 놀란 얼굴이 빠르게 다가왔다.
동시에 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공기를 가르는 대검 소리가 숲을 울렸다.
"뭐?"
코앞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대검은 기사의 목을 향해 밀려들고 있었다.
젠장, 막지도 않냐!
검면으로 휘두른 거였지만, 이 속도로 맞으면 목이 멀쩡할 리 없었다.
큭.
나는 급하게 검을 멈추었다.
덜컥.
기사의 목 바로 옆. 검이 겨우 멈추었다.
쿵.
기사는 놀라 땅에 주저앉았다.
세상에, 이렇게 허접하다니.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멈추는 게 더 힘들었다.
나는 주저앉은 기사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생각보다 너무 허접했다.
다른 기사들을 봐도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생각을 잘못했다. 이들은 아카데미 소속의 기사들이었다.
공작 영지나 왕실 기사들을 기준으로 생각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왕실 기사단을 빼놓고도, 그레시아 공작의 기사단은 왕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단이다.
그런 기사들의 수준으로 생각했으니.
잘못했다가 기사 한 명을 저승으로 보낼 뻔했다.
"테스트는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던 기사들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귀족인가."
"무슨 상속 능력이길래 저 나이에 저렇게 센 거지?"
"실력이 있으니 학장도 허락한 거겠지. 괜한 테스트였어."
기사들은 자격지심이 가득해 보였다.
'아무리 잘해도 상속 능력 탓이 되어 버리네.'
이들은 내가 보아 왔던 영지의 기사들과는 다른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부자들을 미워하던 전생의 내 모습은 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상속 능력이든 노력이든 간에 실력은 충분하니까 문제될 것 없지. 어쨌든 환영한다."
일행의 리더로 보이는 중년 기사가 입을 열었다.
구시렁거리던 기사들은 그의 말에 입을 닫았다.
"그럼, 인원수도 맞으니 둘로 나눠도 되겠군."
그의 말에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기사들은 5명. 나까지 6명이니 둘로 나누면 세 명씩 움직인다는 이야기였다.
"괜찮습니까? 둘로 나눠도."
"어쩔 수 없지. 어쨌거나 우리는 사람들을 찾으려고 남은 거니까 위험하더라도 많은 곳을 서둘러 찾아봐야 해."
표정이 좋지 않고 구시렁거리는 기사들이었지만, 이들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이들이었다.
기사들은 협의를 해서 둘로 나누었다.
나는 리더로 보이는 중년 기사와 나와 대련을 한 막내 기사와 함께 움직이게 되었다.
나머지 세 명의 기사들은 중년 기사에게 인사를 하고는 빠르게 숲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도 출발하지."
중년 기사가 앞장섰다. 우리도 그의 뒤를 따랐다.
내 옆을 걸어가던 젊은 기사가 머리를 긁적이며 이름을 말해 주었다.
"영 엉망이긴 한데, 내 이름은 악셀이야. 앞에 계신 분은 미로 선임 기사이시고."
"알렉스입니다."
나도 다시 이름을 말해 주었다.
"그렇게 빠르게 들어올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준비했으면 그렇게 꼴사납게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는 조금 전 대련이 영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의 말에 앞서가던 미로 선임 기사가 주의를 주었다.
"방심한 것도 네 실력이야."
"그건 알지만요."
악셀 기사는 어깨를 으쓱였다.
신기하게도 미로 기사는 숲 안에서도 길을 찾지 않고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혹시, 낙오조를 찾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따로 사람을 찾는 모습이 안 보여서요."
내 질문에 앞에서 걸어가던 선임 기사가 대답했다.
"아까 전에 다른 조들이 어느 쪽에서 왔는지 확인했다. 우선 그들이 오지 않은 방향으로 움직일 생각이다. 공간 이동 때 흩어지는 최대 거리는 학장님이 알려 주셨다. 그 거리까지 움직인 뒤에 빙 둘러가며 찾을 생각이다."
뭔가 다른 방법이 있는 줄 알았는데, 평범하지만 착실한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기사님들은 반대쪽으로 가신 거군요."
"출발한 곳을 중심으로 서로 빙 둘러 움직이면 대충 찾을 수 있을 거야."
"살아 있다면."
악셀 기사의 말에 미로 기사가 초를 쳤다. 아니면,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보다 우리가 사는 게 먼저일 것 같은데요."
악셀 기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 멀리 움직이지 않았는데, 벌써 밤이 되었다.
하늘에는 별과 달이 떠 있었지만, 울창한 나무와 넝쿨로 인해 숲 안쪽은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깜깜했다.
"눈에 마나를 싣는 방법은 알고 있겠지?"
"네."
나는 대답을 하면서 눈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깜깜하던 주변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캬릉. 캬릉.
꺅. 꺅.
크르르르를.
밤이 되니 마물들의 괴성이 숲을 울렸다.
확실히 다른 사람들의 말처럼 봉인지의 밤은 낮과 완전히 달랐다.
"외곽인데도 난리네요."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낮에도 마물들이 전보다 강해진 것 같고."
"낙오자들도 있고요."
기사들이 작게 속삭였다.
밤이라 소리를 죽여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손에 든 대검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지금은 대검을 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대검을 등에 다시 멨다. 그리고 숨겨 놓았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너무 어두운데. 마나를 밀어 넣어도 코앞밖에 안 보여."
귀족과 달리, 기사들은 마나 활용이 쉽지 않았다.
나는 낮과 그리 차이 나지 않게 보고 있었지만, 두 기사는 겨우 바로 앞만 보며 움직였다.
나는 기사들이 나아가는 앞쪽을 보고는 혀를 찼다.
'이래서 죽느니 사느니 한 거였어.'
멀리 앞쪽에서 이쪽을 노려보는 마물이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내가 눈이 되어 줘야겠어.'
"마물입니다. 거리는 정면 30걸음. 원숭이 형태의 마물입니다."
소년 크기의 못생긴 인간형 마물이었다. 마치 전생에 보았던 판타지 소설의 고블린 같았다.
내 말에 젊은 기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지만, 선임 기사는 몸을 낮추고 검을 들어 올렸다.
"한 마리인가?"
"지금 두 마리째입니다. 아니 세 마리. 계속 늘어납니다."
아무래도 포위하려는 것 같았다.
"포위인가."
내 생각과 같았다. 선임 기사는 경험이 풍부한 것 같았다.
"선공이 낫겠지."
"네."
"좋아, 셋, 둘, 하나."
지금이라는 소리와 함께 우리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나가 단검으로 밀려들었다. 붉은 기운이 단검에서 길게 솟구쳤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나로 이루어진 검기.
푹!
나는 포위망을 만들고 있는 마물의 머리에 단검을 밀어 넣었다.
이어서, 단검을 빼내고 옆에 있는 마물의 가슴에 단검을 밀어 넣었다.
끼이익!
마물의 비명이 들려왔다.
선임 기사의 검에 베인 마물이 비명을 지른 것이다.
밤눈이 밝은 나와 달리, 기사들은 희끄무레한 형체에 검을 휘두르는 중이었다.
잘 보이지 않으니, 일검에 죽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런 허접한 마물을 처리하지 못할 리는 없었다.
문제는 숫자였다.
우리가 죽인 것보다 더 많은 마물이 나타났다.
"죽이면서 계속 달려. 멈추면 포위당한다!"
선임 기사의 말대로였다.
우리 세 사람은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한참 동안 달려 나가다 보니, 더 이상 공격하는 마물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헉, 헉, 다 처리한 건가요?"
팔다리에 상처를 입은 악셀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영역을 벗어난 거야."
선임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그는 별로 안 다쳤다.
"고맙네. 덕분에 살았어."
그는 내 쪽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내가 두 사람이 죽인 마물의 두 배 이상을 죽였다는 것을 안 모양이었다.
"눈이 잘 보인 덕분이죠."
내 말에 선임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헉, 헉, 조금 쉬면 안 되겠습니까?"
악셀 기사가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선임 기사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학장님이 말한 거리까지 온 것 같아. 조금 쉰 뒤에 수색을 하면 될 거야."
악셀 기사는 나무에 등을 대고 주저앉았다.
선임 기사도 다른 나무에 등을 기댔다.
"알렉스 학생도 좀 쉬지."
"그보다, 앞으로는 어떻게 찾을 건가요?"
"별도리 없지. 빙 둘러 가며 일일이 찾아봐야지. 다행히 자네가 밤눈이 밝으니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럼, 쉬는 동안 제가 따로 찾아봐도 되겠습니까?"
미로 기사는 나를 빤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옆에 있는 나무를 올라갔다.
어두운 밤이었지만, 나무를 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나무 끝에 도착하자, 나는 감탄사를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하늘에 별이 가득했고, 마나가 물결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마치 오로라처럼, 물감을 탄 것처럼 마나가 흘러가고 있었다.
밤이라 멀리 마나가 흘러나오는 곳까지 보였다.
아마 저곳이 봉인지의 중심인 마왕이 봉인된 곳일 터였다.
마물이 득실거려서 접근하기도 어렵다는 곳이었다.
나는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그런 곳에 시선을 빼앗길 때가 아니었다.
나는 나무 끝에 올라서서, 주변을 살폈다.
가까운 곳에서 먼 숲까지.
아쉽게도 빛은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빛은 기대하지 않았다. 마물이 먼저 봐서 공격당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빛은 포기하고 대신 마나를 살펴보았다.
이곳 마나와 다른 마나가 보이는 곳. 아니면 마나가 격렬하게 움직인 흔적이 있는 곳.
그런 곳이 있나 계속 살펴보았다.
한참을 살피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런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격렬하게 마나가 움직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싸움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 사이에 조금은 이질적인 마나가 느껴졌다. 마기가 섞이지 않은 마나. 귀족의 마나였다.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르고 이미 아카데미로 돌아간 다른 사람의 흔적일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저 엉킨 마나를 쫓을 수밖에 없었다.
맨땅에 헤딩을 하느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게 나았다.
아래로 내려와 미로 선임 기사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내 말대로 하기로 했다.
잠시 후 악셀 기사가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우리는 내가 말한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밤에 숲을 가로지르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고 지치는 일이었다.
거기다, 달려가는 동안에 몇 번이나 마물과 만났다.
악셀 기사뿐만 아니라 선임 기사도 상처를 입으며 마물을 해치운 우리는 결국 새벽이 다 되어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는 살아 있는 두 학생.
그리고 카트린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