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제11편 낙오
공터에 도착한 우리는 자리에 앉아 쉬었다.
교수와 기사들도 쉬고 있는 것을 보니, 이 공터 혹은 저 나무 상자에 마물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는 무슨 장치를 한 모양이었다.
우리 뒤에도, 학생들이 교수나 기사들과 함께 차례로 공터에 모여들었다.
살짝 위험한 일이 있기는 했지만, 이대로 현장학습은 끝날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해가 나무 끝에 걸쳐지며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언제 가는 거지?
생각보다 오래 쉬게 되어서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을 살피니, 교사와 기사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해 있었다.
나는 귀를 기울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직 한 조가 안 왔어요."
"너무 늦는 것 아닌가요?"
누가 안 온 거지?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보았다.
몇몇 학생들이 안 보이고, 교수 중에도 안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카트린. 카트리네 교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우리 조원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발레아의 말에 모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도착을 못 한 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유를 알려 주었다.
"네?"
모두 놀라 주변 사람들을 살폈다.
"브리아가 없어."
발레아가 사람들을 살피다가 친구 한 명이 안 보인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맙소사, 미리사!"
피아르는 사촌 누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 카트린이 없어요."
그리고 공주도 놀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공주의 말대로 카트린 교수의 조가 안 보였다.
"잠깐 기다려 봐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 테니."
우리와 같이 쉬고 있던 니엘 교수가 학장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학장이 있는 곳에는 기사와 교수들이 모여 있었다.
귀에 마나를 불어넣어 이야기를 들어 보려고 했지만, 잘 들리지 않았다. 마나로 막을 두른 모양이었다.
조원들은 안절부절못했다. 특히 공주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공주는 뭔가 아는 모양이었다.
카트린 교수의 조가 더 늦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대로 기다리는 건가? 이제 곧 밤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학장 주변에 모여 있던 교수와 기사들이 각자의 조로 돌아갔다.
니엘 교수도 우리 조로 돌아왔다.
모두 니엘 교수의 입을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학장 핑계를 댔다.
"학장님이 말씀하실 거예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학장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직 조 하나가 낙오된 채 도착을 안 했습니다. 계속 기다렸지만 밤이 되어 가니 더는 기다리기 어렵습니다."
학장의 말대로 해가 나무 너머로 넘어가고 있었다.
깊은 숲이니 금방 어두워질 게 분명했다.
"안전을 위해 기사로 구성된 수색대 일부를 남기고 나머지는 아카데미로 복귀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상대로였다. 도착하지 않은 조 하나 때문에 이곳에서 모두 밤을 지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먼저 복귀하고, 수색대가 사라진 조를 찾아서 이곳으로 데려와 아카데미로 돌아오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일까. 카트린 조가 도착을 못 하다니. 조원들이 아무리 실력이 없더라도 카트린 혼자서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학생들은 갑작스러운 사고에 소란스러워했다.
"좀 더 기다리면 안 됩니까?"
한 학생이 물어보았지만, 학장은 고개를 저었다.
"마물의 접근을 막는 유물의 유지 시간이 거의 다 되었습니다. 얼마 뒤에는 이곳으로 마물이 몰려올 겁니다."
학장은 바로 학생들을 재촉했다.
"밤의 봉인지는 낮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모두 이동할 준비를 하세요."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지만, 학장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공주는 그들과 달랐다.
"저도 남을게요."
"안 됩니다."
니엘 교수는 공주의 요청을 바로 거절했다.
"학장님께 말씀드려도 소용없습니다. 각성한 지 얼마 안 되는 어린 학생을 봉인지에 남겨 둘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 공주님은 왕족이십니다. 아무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니엘 교수는 전과 다르게 단호하게 말했다.
어린 학생이라기보다는 왕족이라 허락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보다 공주가 왜 이리 고집을 부리는지 모르겠다.
이모인 카트린이 걱정되는 것은 알겠지만, 자신이 수색대에 들어가도 전혀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수색대가 찾더라도 금방 복귀할 수 없잖아요."
공주의 말에 니엘 교수가 얼굴을 굳혔다.
그게 무슨 말이지? 찾기만 하면 학장과 같이 돌아오면 되잖아.
아니, 잠깐.
"설마 이동하는데 쿨타임, 아니 대기 시간이 필요하나요?"
내 물음에 공주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대답에 모두 놀랐다.
"언제 가능하게 되는 거죠?"
"오전에 와서 지금 돌아가는 거니까 내일 아침에는 다시 올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오지 못한 친구와 사촌이 있는 발레아와 피아르가 급하게 물었다.
"이곳까지 오게 해 준 마나를 원래 자리로 되돌리는 거니까 되돌아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하시네."
니엘 교수는 전과 다르게 다른 학생들에게도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우리가 돌아가면 마법진에 모아 두었던 마나가 모두 사라지니까 일주일(?) 정도 필요하다고 하시던데."
손가락을 꼽아 보던 그녀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남게 되는 기사들도 이곳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는 쉽지 않을 거야."
니엘 교수의 말에 피아르도 급하게 부탁했다.
"저도 남겠습니다."
"안 돼. 넌 도움이 전혀 안 되니 허락할 수 없어."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조원 모두에게 말했다.
"이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모두 확실히 기억해 둬. 왕립 아카데미는 학술원 같은 교육기관이 아니야. 이곳은 귀족의 의무를 배우는 곳이자 죽음을 보게 되는 곳이야. 동료의 죽음에도 익숙해져야 해."
교수는 도착하지 못한 학생들과 교수의 죽음을 각오하라고 이야기했다.
학생들은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았고, 나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이 세상의 아카데미는 내가 아는 전생의 학교와 전혀 다르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평범한 학교가 아니라 사관학교에 가까운 곳이라는 것도, 예상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금 처음으로 실감했다.
학장부터 시작해 교수들도 교육 도중에 학생과 교직원이 죽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두 나라를 이끌어 갈 각성자이자 귀족이지만, 교육 중에 죽을 수도 있는 인력이었다.
'그래도 공주는 예외겠지.'
자신은 절대 남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공주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말로는 부탁하지 못하고 있지만,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데 못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공주의 부탁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카트린을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목숨이 하나라면 거절했겠지만, 한 번 정도는 들어줘도 될 듯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몸을 돌려 학장에게로 걸어갔다.
"너도냐! 안 된다니까!"
뒤에서 니엘 교수가 소리쳤다. 아무래도 본래의 성격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사람들은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교수들의 지도 아래 이곳에 올 때처럼 위치에 맞춰 선 것이다.
그리고 기사 몇 명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수색대로 선택된 사람들인 것 같았다.
나는 닫힌 상자 위에 걸터앉아 마나를 다스리고 있는 학장 앞에 섰다.
그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수색대에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는 내 말에 눈썹을 찡그렸다.
"자네 이름이 어떻게 되나."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내 이름을 들은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날 귀찮게 한 게 누군가 했더니 바로 자네였군."
그는 내 뒤쪽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공주님이 저렇게 원하시니 어쩔 수 없군. 참여하게나."
각성도 하지 못한 공주를 아카데미로 대피시킨 이유는 바로 눈앞의 학장이 공주, 왕비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카트린을 교수로 받아들인 것도, 왕비의 후원으로 나를 아카데미에 받아 준 것도 그였고, 입학식 때 자살한 강사 건을 묻어 버린 것도 그였다.
그리고 내가 공주의 숨겨진 호위 같은 존재라는 것을 교직원 중에 아는 사람은 카트린과 학장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수색대에 참여시킬 수 있었다.
"너, 어디 가!"
"수색대에 참여합니다."
"뭐?"
학장과 대화를 마친 뒤 다른 곳으로 움직이자, 마누엘이 나에게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대충 손을 흔들어 줄 뿐이었다.
공주는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입술만 꽉 깨물고, 양손으로 바지만 잡아 늘리는 중이었다.
공주 때문이 아닌데, 생각보다 꽤나 자책하는 것 같았다.
그냥 놔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해서 나중에 포상이라도 듬뿍 받아 내면 좋을 테니까.
발레아는 부러운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부러운 건지.
그리고 피아르는 간절한 표정으로 나와 수색대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사촌 누이가 많이 걱정되는 듯했다.
다른 학생들도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수색대 쪽으로 가는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기사들 앞에 도착했다.
"수색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알렉스입니다."
내 인사에 기사들은 황당한 얼굴이 되었다.
학생이 수색대에 참여하다니, 내가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될 게 분명했다.
"학장님이 허락하셨습니다. 공주님께서 부탁하셨고요."
기사들이 뭐라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다들 황당해하면서도 뭐라 하지 못했다.
학장과 공주. 역시 좋은 백이었다.
잠시 뒤.
부우우웅.
환한 빛과 함께 사람들이 사라졌다.
직접 이동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이동하는 방법이 무척 신기했다.
'순간 이동 같은 게 아니라 마나에 실려 가는 것처럼 보였는데.'
너무 빨리 움직여서 마치 사라진 것같이 보였지만, 남겨진 마나를 살펴보니 마나로 이어진 길을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멀미를 한 건가.'
아직 제대로 파악한 것은 아니었지만, 좀더 조사하면 재미있는 결과가 나올 것 같았다.
모두 사라진 뒤에 기사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숲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문을 열었다.
"살아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겠죠?"
"솔직히 같이 못 돌아가면 죽는다고 봐야겠지."
그들의 대화에는 우울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식량은 있지?"
"일주일분은 있습니다. 아니, 한 명 늘었으니 6일분이네요."
동료가 메고 있는 배낭을 보던 중년 기사가 뒤따라가고 있는 나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왜 죽을 자리에 찾아온 건가."
그의 말에 나는 씩 웃었다.
"기사님들과 비슷합니다. 저도 매여 있죠."
대충 둘러친 말이었지만, 기사들은 내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실력은 어느 정도지? 설마 우리의 발목을 잡지 않겠지?"
다른 기사가 물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했다.
"영지의 기사에게 인증 받았습니다. 중급 기사 이상이라고."
내 말에 기사들이 전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