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제10편 파티 전투
흑표범처럼 보이는 마물 두 마리.
크고 작은 두 마리의 마물은 서로 거리를 벌리고 등장했다.
'동시에 상대하기엔 거리가 먼데.'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아, 마침 두 마리네요. 알렉스 학생! 적어도 한 마리를 꼭 막아!"
니엘 교수가 화난 표정으로 나에게 소리쳤다.
말도 안 하려고 하더니 이름까지 불러 주셨군.
두 마리가 등장한 게 예상과 다른 모양이었다.
"한 마리는 제가 막아서겠습니다."
그때, 마누엘이 슬쩍 앞으로 나섰다.
그는 나를 보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파지지직.
그의 손에서 스파크가 뻗어 나갔다.
캬아아악!
전기에 직격을 당한 마물이 몸을 웅크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말대로 마물이 다가오는 것을 막은 것이다.
그는 멋지게 폼을 잡으며 계속 전기를 내뿜었다.
꼴을 보니 금방 탈진할 것 같았다.
그래도 그 덕분에 다른 마물도 수풀 속으로 몸을 낮추었으니, 처음 마물을 상대한 것치고는 나쁘지 않은 대응이었다.
겁에 질려서 교수 뒤에 숨은 피아르보다야 100배는 훌륭했다.
공주도 얼굴이 창백해졌지만 검을 놓지 않았고, 발레아는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아이샤 공주는 아직 못 미더웠지만, 발레아가 있으니 괜찮을 듯했다.
그럼 교수의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마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교수의 말대로 한 마리만 상대하면 될 듯했다.
크아아앙!
다른 마물이 전기에 구워지는 모습에 멈추었던 마물이 다시 움직였다.
수풀 속에서 튀어나오더니, 나무와 나무를 박차며 내 쪽으로 달려왔다.
'마물 따위가 파쿠르를 하고 있냐.'
좌우로만 움직이는 것이 아닌, 3차원적인 움직임이었지만, 그렇다고 내가 놓칠 이유는 없었다.
나는 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오랜만에 잡는 대검이었다. 특별한 능력도 없고, 명검도 아니었다.
하지만, 무척이나 단단한 검이었다.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고 말하던 이에로 후작의 아들 마르틴. 죽어 버린 서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배워 왔던 심법으로 마나를 돌리고,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몸이 가벼워지고 검이 더 날카로워졌다.
다른 능력은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머리 위로 뛰어내리는 검은 마물을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부우우웅.
길어진 열 개의 날카로운 발톱이 내 머리로 떨어졌지만, 내 머리가 갈라지기 전에 검과 먼저 부딪혔다.
내 검처럼 마물의 발톱에도 마나가 흐르고 있었다.
전에는 이런 마나가 흐르는 단단한 발톱 때문에 마물을 상대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전과 달라졌다.
서걱.
대검이 마물의 발톱을 잘라 버렸다. 이어서 다리도 분리하고, 머리까지 반으로 잘라 버렸다.
쿵.
마물은 내가 서 있던 자리로 추락했다.
나는 검을 휘두른 김에 몸을 굴려 마물에 깔리는 것을 피했다.
검에 묻은 검은 피를 털어 내며 죽은 마물을 확인했다.
확실히 시체가 되어 있었다.
죽은 마물은 생각대로 동물이 마나에 오염되어 변형된 마물이었다.
마물이 되기 전의 습성대로 움직였지만,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지 못하는 놈이 공중으로 뛰어내린 게 잘못이었다.
"윽!"
크아아앙!
내가 마물을 잘라 내는 순간, 마누엘의 마나도 다 떨어졌다.
나쁘지 않은 실력에 괜찮은 위력이었지만, 저렇게 무식하게 퍼부으면 마나가 남아날 리 없었다.
모락모락 연기를 뿜어내던 나머지 한 놈의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나는 달려가는 마물을 향해 검을 던지려 했지만, 바로 멈추었다.
달려가는 마물 아래로 바닥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이미 발레아의 영역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발레아는 준비만 해 놓고 마물을 공격하지 않았다.
'실력을 숨기려는 걸까?'
아니면 나처럼 다른 학생들의 실력을 보고 싶어서일지도.
검은 마물은 일행 바로 앞까지 달려들었다.
그 순간.
딱!
니엘 교수가 손가락을 튕겼다.
펑!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폭음과 함께 달려들던 마물도 뒤로 튕겨 나갔다.
'공기를 터트린 건가?'
마물이 튕겨 나간 그 자리는 수풀이 원형으로 누워 버렸고, 내가 있는 곳까지 바람이 밀려왔다.
크앙!
공격력은 그리 강하지 않은 듯했다.
한참을 밀려난 마물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교수가 다시 손가락을 튕기자, 이번에는 튕길 때마다 마물의 몸이 갈라지며 피를 뿌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창이 마물의 피부 위로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공기, 혹은 바람을 움직이는 능력인가 보네.'
좋아 보이는 능력이었다. 방어에도 좋고, 원거리 공격도 가능하고, 거기다 무기가 안 보이니 상대방은 방어하기도 어렵고.
크앙! 컹!
달려들던 마물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공격을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그 모습에 공주가 크게 심호흡을 했다.
싸울 생각인 듯했다.
공주가 막 튀어 나가려는 순간, 교수가 피아르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지? 다른 학생들이 싸우고 있는 거 안 보이나?"
교수의 말에 달달 떨고 있던 피아르가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네!"
그는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더니, 공주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럼, 예비 폭탄은 실제로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볼까.
"증, 증폭!"
피아르는 팔을 내뻗으며 주문 비슷한 것을 외쳤다.
능력을 발휘하기 위한 키워드인 것 같은데, 듣고 있는 나도 조금 창피했다.
피아르의 팔에 모여들던 마나가 공주에게 뻗어 나가는 것이 보였다.
희미하게 빛나던 공주의 몸과 검이 좀 더 빛나기 시작했고, 막 달려 나가려던 공주도 놀라서 피아르를 보았다.
"와, 힘이 넘치는 것 같아요."
"자, 이제 가서 싸워 보세요."
계속 마물을 견제하던 니엘 교수는 공주의 등을 살짝 밀어 주었다.
"넵!"
공주는 힘차게 달려 나갔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공주 한정으로 본다면, 니엘 교수는 참으로 멋진 교육자였다.
'달리 공주와 관계있는 사람 아냐?'
오죽하면 이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공주는 피투성이가 된 마물 앞에 도착했다.
원래 검은색이라 딱히 달라 보이지 않았지만, 마물은 몸에서 연기가 풀풀 나고 있었고 피부 곳곳이 갈라져서 피를 쏟고 있었다.
'정말 예쁘게 밥상을 차려 놓았네.'
피아르 덕분인지 공주는 힘이 넘쳐 보였다.
공주는 작은 몸집이라 마치 대검처럼 보이는 검을 마물을 향해 휘둘렀다.
머리로 떨어지는 검.
엉망이 되었지만, 아직 마물은 움직일 수 있었다.
마물은 급하게 앞다리를 움직여 검을 막았다.
서걱!
하지만, 이미 죽기 직전인 마물이 몸에 마나를 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잘린 마물의 앞다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됐다!"
공주는 잘라 버린 다리를 보고 기뻐했다.
하지만, 다리 하나 잘렸다고 마물은 죽지 않았다.
"위험해!"
교수의 말과 함께 마물이 피를 쏟으며 공주를 덮쳤다.
놀란 공주가 눈을 크게 뜨고, 교수가 급하게 손을 움직이는 순간.
덜컥.
입을 벌리고 공주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왔던 마물이 그 자리에 딱 멈춰 섰다.
마물의 몸에는 땅에서 자라나 있는 넝쿨이 어느새 잔뜩 감겨 있었다.
서걱.
그와 동시에 내가 마물의 목을 잘라 버렸다.
"괜찮나요?"
놀란 니엘 교수가 달려오고, 겁먹은 공주가 딸꾹질했지만.
나는 피 묻은 검을 털며 발레아를 노려보았다.
'힘을 숨긴 찐다'도 아니고, 발레아를 믿었다가 큰일 날 뻔했다.
아니, 내 잘못인가. 발레아를 믿다니.
발레아는 나를 보며 손을 모으고 미안해했지만, 아무리 봐도 고의처럼 보였다.
"다행이에요. 발레아 덕분이에요."
하지만, 그녀의 본성을 모르는 니엘 교수와 다른 학생들은 발레아를 칭찬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위기의 순간에 발레아가 나서서 공주를 구해 준 것처럼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공주는 금방 안정을 되찾았다. 이 역시 나이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공주가 안정을 되찾자, 교수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마물들이 강했어요. 피아르를 빼고는 다들 잘했어요."
교수가 학생들을 살필 때 나는 아예 건너뛰었다. 생각보다 잘해서였나? 덕분에 피아르가 배로 혼나는 분위기였다.
마물을 보고 벌벌 떨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신을 차리고 지원을 해 주었는데, 행정 학부 학생이 그 정도면 되지 않나?
마누엘도 페이스 생각은 안 하고 질러 버려서 초반에 나가떨어졌고, 공주는 아직은 싸울 실력이 아니었다.
거기다 발레아는 실력 발휘를 하지도 않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따지면 나도 제대로 싸우지 않은 건가.
따지고 보면 다른 학생들도 모두 문제가 있었다.
니엘 교수도 괜히 공주를 경험시켜 준답시고 공주를 위험에 빠지게 했고.
하지만, 교수가 피아르를 혼내는 것을 말릴 생각은 없었다.
피아르의 잘못은 아니지만, 피아르 때문에 한 고생을 생각하면 그는 더 혼나야 했다.
"……다음부터는 정신을 차려야 해!"
피아르를 열심히 혼낸 뒤에 니엘 교수는 계속 우리를 움직이게 했다.
"원래 마물은 가죽부터 피까지 쓸모없는 게 거의 없을 정도예요. 특히 마나를 쓰는 귀족들이나 기사의 장비로 쓰는 재료에는 마물의 부산물이 제격이랍니다."
다시 교수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아까 전처럼 공주를 보며 하는 강의였다.
"지금은 시간도 없고, 운반할 방법이 없어서 놔두고 가지만, 웬만하면 사람들과 같이 와서 시체를 수거하는 게 좋아요. 아니면, 유물 가방 같은 것을 구하든가요."
왕국의 보물 창고에 있다는 '유물 가방' 이야기인가 보다.
엄청난 양이 들어가고, 무게도 늘어나지 않는다는 가방.
게임에서 보았던 인벤토리나 아공간 같은 물건이지만, 본 적이 없으니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길을 가다가 또다시 마물을 만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안전하게 처리했다.
내가 앞에 나가서 막고, 발레아가 영역을 펼쳐 모두를 보호했다.
피아르도 정신을 차리고 모두에게 증폭을 걸어 주었고, 공주도 내 뒤에서 나를 보조했다.
'마누엘은 마나가 다 떨어져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 버렸지만…….'
마누엘은 무척이나 못마땅한 것 같았지만, 자기가 잘못했는데 다른 사람에게 뭐라 하기에는 그가 배운 귀족의 명예가 문제였다.
'나중에 뒷구멍으로 시비를 걸지도 모르겠지만…….'
그거야 그때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이제 조장이 통솔하도록 해요."
마물과의 전투가 안정적으로 바뀌자, 교수는 우리에게 전투를 맡겼다.
"아, 네, 넵. 모두 진형을 갖춰 주세요!"
우리는 공주의 지휘에 따라 덤벼오는 마물을 잡았다.
공주는 문제없이 일행을 통솔했다.
니엘 교수는 대단하다고 마구 칭찬했지만, 솔직히 이 구성원이면 누가 조장을 해도 상관없었다.
그렇게 몇 차례 전투를 하며 몇 시간 동안 걸어서 우리는 집합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공터에 학장과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학장이 서 있는 앞에는 빛이 솟구치는, 뚜껑이 열린 나무 박스가 있었다.
우리가 따라온 빛이 저 나무 상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다섯 번째 조가 왔군요."
일등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