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제6편 오늘부터 기사 학부생입니다 (1)
다과회가 끝나기 전에 왕비는 또 한 번 나를 놀라게 했다.
"공주는 내일부터 기사 학부에 다닐 거예요."
"네?"
뜬금없는 소리에 놀라 반문을 해 버렸지만, 왕비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대신 친절하게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외가의 능력을 얻었으니, 카트린에게 훈련을 받을 필요가 있어요."
그건 맞는 이야기였다.
"거기다 다른 능력도 있는데, 옆에서 대련하며 실력을 키워 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
이건 나를 말하는 건가?
"왕가의 능력을 얻지 못했다고 알려졌으니 관심은 전보다 줄어들겠지만, 후계에서 물러났다고 생각 없이 공격해 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왕비의 말대로였다. 나도 여러 번 경험했다.
"현장학습도 있을 텐데, 옆에서 보호를 받았으면 해요. 부탁드릴게요."
아이고, 역시 추천장을 그냥 써 준 게 아니었다.
경호원 업무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았다.
충격을 여러 번 받은 덕에 나는 멍한 상태로 왕궁을 빠져나왔다.
카트린과 함께 마차로 외성을 빠져나오자 겨우 정신이 들었고, 나는 카트린에게 물었다.
"저를 쓰실 정도로 공주님의 신변이 위험하신 겁니까?"
"응. 왕께서 건강하셨을 때도 여러 번 습격을 당하셨어. 왕궁 안이어서 어렵지 않게 물리치긴 했지."
역시, 왕궁 안은 무서운 곳이었다.
"왕께서 건강하셨을 때도 그 정도인데, 아예 쓰러지시거나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왕궁 안에서도 목숨을 부지하시긴 힘들어."
"그래서 왕께서 아직 거동하실 때, 형제들의 시선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공주님을 아카데미에 보내신 거야."
왕은 내일이라도 당장 쓰러질 것처럼 보였고, 이제 각성도 했으니 내가 봐도 공주는 보호가 필요했다.
"우리가 공주님을 지켜 드려야지."
음, 이제는 완전히 저 '우리' 안에 내가 들어가게 된 모양이다.
외성에서 빠져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가 멈추었다.
카트린의 집이자 왕비의 친정인 라텐하마르 백작가에 도착한 것이다.
저택은 무척 아름다웠다.
우리 영지에 있는 공작가의 저택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수도에 있는 공작의 '별장'보다는 훨씬 컸다.
백작은 그레시아 공작과 다르게 수도에 기반을 둔 중앙 귀족이지만, 수도 중앙에서 이 정도 규모의 저택을 가지고 있는 사실만 봐도 백작가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집사의 안내로 백작의 집무실로 향했다.
"반갑네. 라텐하마르 백작이네."
아직 정정해 보이는 노인이 소파에 앉아 안으로 들어오는 나를 훑어보았다.
숱이 거의 없는 머리에 날카로운 눈. 거기다 단단해 보이는 몸까지.
딱 봐도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
나는 그의 인사에 대답했다.
"알렉스입니다."
제대로 된 귀족이란 뜻은 다른 의미로 계급 차별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괜히 풀네임을 말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할 이유가 없었다.
나를 훑어본 그는 바로 카트린에게 물었다.
"각성식은 잘 마친 거지?"
"네.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카트린은 딱딱한 어조로 대답했다.
"계획대로라……. 잘되었군."
두 사람의 대화는 아버지와 딸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마치 직장 상사와 부하 사이의 대화 같았다.
제대로 된 귀족이라면 흔한 모습이었으니, 별로 특별해 보이진 않았다.
대답을 들은 백작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앉으라는 말 대신에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카트린에게 선조의 유물을 얻는 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계약대로 했을 뿐입니다. 저도 충분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보상이라. 선조의 단검도 포함되는 거겠지?"
단검? 보상을 꺼내면서 단검에 대해 이야기한다라…….
노인네가 귀족일 뿐 아니라 욕심쟁이였나.
그의 말에 슬쩍 카트린을 훔쳐보았다.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그녀는 내 눈짓에 살짝 손가락을 움직였다.
긍정적인 대답을 하라는 용병들의 신호였다.
단검은 그녀의 선물에 가까웠지만, 아무래도 보상으로 이야기한 듯했다.
"계약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다만 지금 단검은 제 소유물입니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계약 핑계를 대고 오해하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보상이었군."
역시, 바로 오해해 버렸다.
"알겠네. 앞으로도 카트린이나 아이샤 공주님을 잘 도와주게나."
"명심하겠습니다."
명백한 퇴거 요청에 바로 대답했다.
"카트린은 잠깐 남고."
나는 혼자 방 밖으로 내쫓겼고, 기다리던 하녀가 나를 안내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카트린 님이 손님을 연무장으로 안내하라고 하셨습니다."
아이고, 열심히 머리를 쓴 뒤에 이제는 몸을 쓸 차례인가.
나는 하녀를 따라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특이하게도 건물 지하에 있었다.
하기야 저택이 크다고 해도, 복잡한 수도에서 저택 밖으로 연무장을 만들기는 어려워 보였다.
연무장은 단단한 돌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돌도 평범한 돌이 아니었다.
"돈으로 발라 버린 느낌이야."
거기다 한쪽에는 소파와 탁자까지 놓여 있어서 소파에 앉아 하녀가 타 주는 차를 마실 수 있었다.
땀내 나는 연무장에서 차를 마시고 있다니, 수도에 와서 처음으로 문화 충격을 받았다.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 본 각성식의 왕족들, 조금 전에 만난 백작.
모두 내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레시아 공작의 아들에다 각성까지 하긴 했지만, 나는 그저 반쪽짜리 서자일 뿐이었다.
영지에 있을 때는 어느 정도 이겨 냈다고 생각했는데, 수도에 와서 보니 전혀 아니었다.
서자는 생각보다 더 천대받는 위치였고, 계급 간의 사다리는 부서진 것이 아니라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왕비와 공주가 나를 가까이 두는 것도 서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 위치는 두 왕자에게 무시당하기 충분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막막하기 그지없었지만, 지금 나는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단도에 욕심을 내는 백작도 무섭지 않았고, 두 왕자도, 왕도 두렵지 않았다.
죽음에서 되돌아오는 경험 덕분에 공포가 사라진 것도 있지만, 죽음을 이겨 내는 내 능력에 대한 자신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카트린이 지하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에게 사과했다.
"미안해. 백작이 너를 찾는 게 단검 때문인 줄은 몰랐어. 내가 대신해서 사과할게. 아니, 내가 이 집에 데려온 것도 잘못했어."
그녀다운 사과였다.
"어제까지는 단검 이야기는 꺼내시지도 않았어. 그냥 알렉스에 대해 궁금해서 부르신 줄 알았어."
어제라면 아직 단도의 효과가 확실한 것이 아니었을 테니 말을 안 했을 테지.
아니면, 옳은 것에 매달리는 딸 성격 때문일지도.
"괜찮아요. 어차피 이 단검은 지금 제 손에 있으니까요. 단지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도와주시면 돼요."
"응. 기필코 도와주겠어."
수도에 와서 조금 유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성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꽤 답답해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내 편이라고 느끼기 때문일까.
"가문의 유물이라고 생각해서 그러시겠죠. 이해합니다."
내 말에 카트린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그런 분이 아니셨는데, 왕께서 몸이 안 좋아지신 뒤로는 뭔가 조급해지신 것 같아."
잘못 줄을 서면 가문이 통째로 날아갈 판국이니, 조급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백작님은 공주님 일을 다 아시는 겁니까?"
내 물음에 카트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두 가지 능력을 얻었다는 것은 말씀드리지 않았어.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말씀드리지 않을 생각이고."
엥? 나에게 말한 것을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우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왕비님과 약속했어. 왕가의 능력까지 얻게 되면 욕심을 낼 것 같은 사람에게는 비밀로 하기로."
이런, 단검을 욕심내는 바람에 딸들이 벽을 쳐 버린 건가.
"공주는 아직 어려. 그녀에게는 시간이 필요해."
확실히, 오빠들과 싸우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물론, 그전에 왕이 죽어 버려서 내전이라도 일어나면 별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공주나 왕비 입장으로는 이것이 최선일지도 몰랐다.
"그럼, 전부 알고 있는 사람은 또 누가 있나요?"
생각보다 아는 사람이 많았다. 하기야 나도 들었는데, 아는 사람이 더 있는 게 당연했다.
"단검의 각성 능력을 아는 것은 아버지까지이고, 전부 아는 것은 왕비님과 공주와 나. 그러고 너밖에 없어."
"네? 왜 저죠? 제가 어디가 믿을 데가 있다고……."
실수를 수습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건 나만 아는 일이다.
아버지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를 믿는다는 건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내 말에 그녀가 대답했다.
"나하고 계약했잖아. 그리고 내가 계속 확인했고."
아, 계약. 비밀을 지킨다는 계약을 했었지.
하지만, 전생에 수많은 계약을 경험한 바로 그 계약은 여러 가지 빈틈이 많은 계약이었다.
"여러 가지 알아보고 결정했어. 알렉스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왕비님과 나는 확신했어."
카트린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저게 사람을 신뢰하는 눈이라고 하는 건가.
뭔가 가슴이 쿡쿡 찔리는 것 같았다.
뭐, 지금 당장 배반할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슬쩍 눈을 피했다.
"알겠습니다. 그보다 제대로 대련할 생각 아니었습니까?"
"아, 맞아. 대련해 줄 거지?"
"네. 저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확실히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과연 왕비와 공주, 카트린이 나를 이용하고 말 사람들은 아닌지.
죽지만 않으면 확인할 시간은 충분했다.
결국, 이대로 지내 볼 생각이다.
카트린은 방패와 검을 들어 올렸다.
검과 방패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내 검에서도 내 눈에만 보이는 붉은 기운이 솟구쳤다.
"시작하죠."
"그래!"
그녀와 나 둘 다 정장이었지만.
뭐 어때. 이럴 때도 있는 거지.
바앙!
부웅!
우리 두 사람은 일렁이는 검을 상대방을 향해 휘둘렀다
* * *
대련은 즐겁게 끝이 났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몇 벌 없는 정장이 잘려 나갔다는 점일까.
확실히 방패까지 쓰는 그녀의 능력은 무시무시했다.
그녀의 능력 덕분에 방패가 자유자재로 크기가 변하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성장한다면, 그녀 혼자만이 아니라 여러 명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검에서 솟구치는 기운도 더 강해진 것 같고.
던전 때의 실력이었다면 금방 제압당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 대련은 무승부라고 볼 수 있었다.
능력을 사용했다고 실전과 같지는 않겠지만, 이대로라면 충분히 내 실력에 자신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더 열심히 해야지."
뭔가 쓸데없는 일에 잘 말려드는 느낌이니,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는 없었다.
대련이 끝난 뒤 그녀는 저택에 남았고, 나는 아카데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