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제4편 공주의 각성식 (1)
이른 아침.
기숙사에서 나온 학생들이 첫 교시 수업을 듣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껴서 기숙사를 나섰다.
시간이 흘러서인지 몇몇 학생들이 나에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평민 출신이거나 어디 지방의 이름 없는 작은 영지의 삼남, 사남들이었다.
학기 초와 달리 학생 전부가 나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나와 아는 척을 하는 학생도 없었다.
귀족가의 서자 취급이 이러니 어쩔 수 없었다.
수업을 받으러 가는 학생들과 달리, 나는 아카데미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학생들이 있었지만,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인가요?"
아니, 한 명 물어보는 사람이 있었다.
길 반대편에서 수업하러 가는 여학생 그룹에서 들려온 소리였다.
신입생뿐만 아니라 선배들까지 함께 모여 있는, 작지 않은 그룹이었다.
서로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움직이던 이들이었는데, 나에게 말을 건 학생 때문에 모두 대화를 멈추었다.
나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그룹에서 홀로 미모를 발하고 있는 학생, 즉 발레아였다.
발레아의 처세술은 아무리 봐도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와 계약을 한 뒤에 그녀는 전보다 더 나와 친한 척을 했다.
수업 중에 옆에 앉을 때도 많았고, 지금처럼 지나가다가 항상 아는 척을 했다.
그런데도 저렇게 다른 친구들과 사귈 수 있다니.
아버지가 죽은 남작가의 딸이면서도 귀족들과 저렇게 잘 지낼 수 있다는 점에서 나보다 처세술이 100배는 훌륭했다.
"네. 지금 가는 길입니다."
내 말에 여학생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오늘 공주님 각성일이잖아."
"설마 각성식에 초대받았다는 거야?"
"설마 각성식 하는 곳에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잖아. 가족, 아니 왕족분들만 참석할 텐데."
"그럼 따로 축하하러 가는 건가?"
"그렇겠지."
"그것만도 대단하잖아. 공주님의 각성 축하라니."
"그건 그렇지. 아카데미에서는 초청받은 사람이 없잖아."
"아니, 그레시아 공작가 자제라지만 서자잖아. 그게 가능한 거야?"
"쉿! 함부로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해!"
"아무튼 신기하긴 신기하네. 어떻게 공주님하고 알게 된 걸까."
이제는 따로 귀에 마나를 불어넣지 않더라도 이 정도 거리에서 수군거리는 말들은 쉽게 들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리 듣기 좋지 않은 뒷말을 실컷 듣게 되었다.
발레아도 내가 듣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내게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공주님께도 안부 전해 주시고요!"
그녀는 내게 손을 흔들고는 다른 여학생들과 걸어갔다.
나에 관해서 물어보는 수군거리는 말들도 점점 멀었다.
그녀들의 말대로, 나는 오늘 공주의 각성식에 가는 길이다.
당연히 각성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고, 각성 축하와 왕비님의 호출 때문이었다.
공주와 공주의 호위 기사, 시녀들은 어제 미리 왕궁으로 가 있었다.
정문 앞에는 왕실에서 보내온 마차가 서 있었다.
나를 위해 보내온 마차는 아니었다.
"어서 와."
왕비의 여동생이자 공주의 이모인 카트린을 위한 것이었다.
마차에는 카트리네 교수가 와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 마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왕실에서 보내 준 마차였으니 무척이나 화려했다.
공작가 본가에 있는 마차 정도랄까.
"이렇게 둘이 움직이는 것도 오랜만이네."
카트린은 반가운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정말 오랜만이네요."
나도 그녀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녀와 같이 던전을 탐험할 때가 떠올랐다.
그렇게 몇 마디 대화하다가 카트린은 멀어져 가는 아카데미 정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답답해서 혼났어. 아이샤만 아니었으면 정말 붙어 있기 싫은 곳이야."
수업 시간에 보았던 그녀의 딱딱한 얼굴이 한껏 풀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이 없어서 긴장이 풀어진 것 같았다.
나도 다른 사람인데, 주의하라고 말해야 하나.
잠깐 떠오른 생각은 뒤로하고, 위로의 말을 꺼냈다.
"잘하시던데요."
위로이긴 했지만, 실제로도 그녀는 정말 잘 가르쳤다.
기사 학부 1학년 담임 교수 역할도 잘했고, 기사 학부 학생들도 잘 가르쳤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를 존경하는 학생도 많아졌고, 그녀의 수업으로 학생들의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처음 수업 때 기사들에게 완패를 당해 수모를 겪었던 학생들이었지만, 왕립 아카데미 학생들은 모두 각성을 거친 상속 능력자들이었다.
그러니 적절한 교육과 훈련을 거치니, 금방 제 실력을 보일 수 있었다.
이제 기사들과 대등하게 대련을 벌이는 학생들도 나오고 있었고, 다른 학생들도 대련에서 쉽사리 지지 않았다.
"잘하기는. 그냥 가지고 있는 상속 능력들을 제대로 쓰게 하는 것뿐인데 뭐. 재미없어."
용병 때의 반짝이던 그녀의 눈빛이 생각났다.
가문의 보탬이 되고자 용병 생활을 했었지만, 그녀도 모험과 용병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용병 일은 힘이 들지만 이렇게 답답하지는 않았는데, 던전 탐사 때는 재미도 있었고."
그런 자유로움에 맛을 들였으니 교수직이 답답할 것 같기는 했다.
솔직히 나도 답답하긴 했으니, 마음속으로 그녀의 말에 동의했다.
왕궁으로 가는 동안, 카트린과 오랜만에 편한 대화를 나누었다.
여러 신변잡사와 학교생활 이야기 등.
숨겨야 하는 것들은 빼야 했지만, 나름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 어느새 왕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아, 단검은 오늘 돌려줄게."
"네."
며칠 전 카트린이 내 단검을 빌려 갔다. 연구를 할 게 있어서라는 이유에서였다.
원래 카트린의 가문 것이었으니, 며칠 정도는 충분히 빌려줄 수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기 전에 카트린은 방금 떠올랐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까먹을 뻔했네. 각성식이 끝난 뒤에 시간이 좀 있지? 아카데미로 돌아가기 전에 한 군데 들르자."
"네? 어디를요?"
"우리 집."
카트린의 집이라면 설마.
"라텐하마르 백작가요?"
"응. 우리 집에는 제대로 된 대련실이 있거든."
그동안 제대로 된 대련을 못 해서 그런 건가.
아카데미의 대련 장소들은 모두 공개된 곳들뿐이어서 그녀와 제대로 된 대련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도 자신의 능력을 다 보여 줄 수 없었고, 나도 내 실력을 모두 드러낼 수 없었다.
가끔 뒷말이 너무 심해 제 실력을 드러내 볼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 뒷일이 걱정되어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대련을 꼭 거기서 해야 하나요?"
나도 그녀와 제대로 붙어 보고 싶기는 했지만, 그 장소가 꼭 백작가 대련실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그게……."
내 대답에 그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대련 때문이 아니라 뭔가 더 있나?
"아버지께서 보자고 하시기도 했고."
결국, 이게 집에서 보자고 하는 이유였나 보다.
하긴, 내가 가지고 있는 단검은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유물이었다.
탐사에서 같이 얻었고, 카트린이 나에게 준 것이니 지금은 내 소유였지만.
그래도 한번 와 보라는데 안 갈 수는 없었다.
저렇게 미안해하는 표정을 보니 거절하기도 어려웠고.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왕궁의 외성을 지나, 내성 앞에 마차가 멈추었다.
내성 앞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마차가 서 있었다.
각성식은 가문 내부의 행사였다.
공작가에도 순서를 진행하는 신관과 가문 내의 사람들, 그리고 집사 정도만 참석했었다.
왕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들었다.
하긴, 나도 축하 명목으로 왕궁에 왔으니 다른 사람들도 그런 명목으로 왔을 게 분명했다.
"가자."
어차피 나는 카트린의 뒤만 따라다니면 그만이었다.
카트린의 말에 나도 마차에서 내렸다.
당연히 마중 나온 사람이 있었다.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영애와 알렉스 데 그레시아 공자, 어서 오십시오."
마중 나온 집사는 정중한 말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을 안내했다.
우리는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왕궁의 내성. 튼튼하고 거대한 성이 바로 기사의 성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우리는 거대한 복도를 지나 왕궁 내부를 가로질러서 왕궁의 뒤뜰로 나왔다.
왕궁의 뒤뜰에는 커다란 화원과 아름답고 커다란 묘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는 화원에 들어가지 않고 뒤뜰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왕비와 만났을 때 보았던 하녀들도 보였고, 귀족들과 신관, 기사들도 보였다.
모두 나와 같이 공주의 각성식을 축하해 주러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모여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공주의 각성식을 보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다.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오지 않은 사람들보다는 공주의 편일 확률이 높았다.
다만, 모여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각성식에 대한 기대가 별로 없어 보였다.
왕비의 하녀들 중에는 기도를 하는 하녀도 있었지만, 대부분 별다른 표정 없이 주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 [마나 감응력]을 얻으시겠죠?"
"글쎄요. 두 왕자님이 모두 얻으신 능력이긴 한데."
"심법 중 하나를 얻으실지도 몰라요. 카를로스 초대왕께서 가지신 심법이 꽤 많았잖아요."
"심법은 대부분 그레시아 공작가로 넘어간 것 아닌가요."
"어차피 피로 이어진 곳이니 왕실에서 나올 수도 있는 거죠."
"초대왕의 능력은 강철 육체도 있고, 육체 최적화에 방패술도 있으니까 다른 능력이 나올 수도 있어요."
"아니면, 왕비님 쪽 능력이 넘어올 수도 있을 테고요."
귀를 슬쩍 기울이니,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대부분 공주님이 무슨 능력을 얻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표정과 달리 조금 더 과열되면 내기라도 할 기세였다.
다만, 처음 생각과 달리 공주의 세력으로 보기는 어려운 사람들 같았다.
단지 가까운 인맥 정도일지도.
다행히 왕비의 하녀들은 좀 달랐다. 하녀로 불리지만, 전부 귀족 출신들이었다. 작위를 받지 못한 자녀들.
기도를 마친 하녀들은 작은 목소리로 그들과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나 감응력이 아닌 다른 능력이면 좋겠어요."
"왜? 공주님도 마나 감응력을 얻으시면 좋잖아."
"두 분 왕자님이 그 능력을 얻어서 계속 사이가 안 좋잖아요. 공주님도 얻게 되면 두 분 왕자님께 시달리지 않으실지……."
"아, 그 말대로네."
[마나 감응력]
카를로스 왕국의 직계 왕족들만 얻게 된다는 상속 능력이었다.
마나를 느끼고 활용하는 데 최고인 상속 능력.
마법이라 불리는 원소 능력을 사용하든 심법을 따로 배워서 기사로 능력을 사용하든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상속 능력이다.
초대왕인 카를로스 기사가 자신에게 제일 중요하다고 말하고 다녔던 능력이었고, 어느 순간부터 카를로스 왕국의 국왕이라면 꼭 가지고 있어야 하는 능력이 되었다.
'나도 얻지 말라고 기도해야 하려나.'
아카데미 생활을 무사히 보내려면 공주가 별것 아닌 능력을 가져야 했다.
나는 따로 신앙은 없었지만, 살짝 눈을 감고 믿지 않는 신에게 열심히 기도를 했다.
'왕비님 쪽의 능력.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능력을 얻게 해 주시기를.'
잠깐, 그러면 나와 동문이 되는 건가.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 보니, 사람들이 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궁에서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공주도 보였고, 잘생긴 젊은 남자들과 리아 왕비도 보였으며, 화려한 왕관을 쓴 중년 남자도 보였다.
사람들도, 나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왕관을 쓴 중년 남자.
이 나라 왕의 행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