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제3편 계약 (2)
조용하고 평범한 공원과 숲이 나를 적대했다.
돌벽이 솟아올라 일대를 감싸고, 바닥이 출렁거려서 중심을 잡지 못하게 했다.
촤아악!
나뭇가지가 채찍처럼 휘어져 들어오고.
뿌드득.
뿌리가 땅을 헤치고 나와, 나를 휘감으려 했다.
바람에 실려 온 꽃가루는 미세한 칼날이 되어 내 피부에 상처를 냈고.
밤을 밝혀 주던 달빛은 일그러져 사물을 제대로 파악하기 힘들어졌다.
어느새 발레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역 안의 사물을 움직여서 자신의 모습을 숨긴 것이다.
전에 실내에서 싸웠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하긴, 건물 안에서 싸웠을 때와 똑같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바닥에 발이 거의 닿지 않았다.
솟아오른 벽을 박차고, 찔러 오는 뿌리를 밀어내며 위로 솟구쳤다.
마치 전생에 트램펄린을 하듯이, 기사답지 않은 모습으로 마구 뛰어다녔다.
"그렇게 뛰어다니며 피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요. 공자가 제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사람이 올 때까지 그렇게 버틸 수 없잖아요."
발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로도 위치를 알 수 없었다.
허풍이 아니라면 그녀는 내 예상보다 마나 양이 많거나 영역을 만드는 능력이 생각보다 마나 소모가 적은 모양이다.
원소 계열이나 염력 계열의 상속 능력이라면 마나 소모가 많아 피하기만 하는 나보다 훨씬 빨리 마나가 떨어질 텐데, 그녀의 영역은 다른 것 같았다.
허풍으로 믿고 버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피하고 있는 것은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실내에서 본 것과 어떻게 다른지, 이 영역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
그리고 지금 확인이 끝났다.
파아악!
공격해 오는 사물들을 피해 뛰어다니던 나는 솟구치는 돌기둥을 밟고 하늘 높이 솟구쳤다.
당연하다는 듯이 허공에 떠 있는 나를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돌조각들과 부러진 나뭇가지들.
나는 날아오는 물건들을 쳐 내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예상대로였다.
남작의 저택 때보다 훨씬 영역의 범위가 넓어졌지만 위쪽으로는 그렇지 못했다.
그녀의 영역 안에서는 사물들이 그녀의 의지대로 모양을 바꿀 수 있었지만, 이렇게 영역을 벗어나면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물건들을 쏘아 내는 것밖에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펼쳐진 영역 밖으로 도망가면 그만이었지만, 그녀도 그것을 예상했는지 높은 돌담으로 영역 주변을 둘러쳤다.
거기다, 숲 쪽으로는 돌벽을 만들지 않아 유인하고 있었고.
최고 높이까지 솟구친 나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나뭇가지와 뿌리, 돌과 흙까지 모두 나를 향해 공격할 준비를 하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확실히, 발레아의 상속 능력은 정말 대단했다.
영역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이 무기가 되다니.
사방이 막힌 실내이거나, 무기가 가득한 전쟁터 같은 곳이라면 그녀는 거의 무적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과 같은 곳이라면 무기는 그리 강하지 못했다.
돌무더기와 나무라니. 그녀의 능력으로 재질도 강화되었는지 평범한 돌이나 나무와는 다른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원판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카데미에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나와 싸울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거기다, 하늘이 막혀 있지 않으니 이렇게 훌쩍 뛰기만 해도 충분히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물론, 사방에서 공격해 오는 것이니 눈 말고 다른 감각이 대단히 뛰어난 능력자나 기사만이 겨우 피하긴 하겠지만.
다만, 그녀의 영역을 두 번이나 경험해 보니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영역 내에는 그녀의 마나가 가득 차 있었다.
영역 안에 있는 사물들은 영역 안에 가득 찬 그녀의 마나에 의해 변형되고 움직였다.
마나가 움직이고 모여서 하늘로 솟구치면, 뿌리가 움직여 나를 향해 찔러 들어왔다.
나는 뿌리가 들이닥치기 전에 마나를 보고 슬쩍 몸을 움직여 솟구친 뿌리를 타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정말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걸 다 피하는 거죠? 마나 심법이 좋으면 되는 건가요? 실력이 좋은 기사도 가능한 건가요?"
하도 잘 피하니, 발레아가 입을 열었다.
그거야 나도 알 수 없는 거고. 왕족들은 기본적으로 '마나 감응력'을 가지고 있다던데, 왕족들은 가능하려나.
발레아는 자신의 위치가 들키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 들키더라도 자신의 영역 안에서는 아무리 물건을 부숴도 다시 만들어지니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그녀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 영역 안에서는 마나를 찾는 내 감각으로도 그녀의 위치를 찾기 어려웠지만.
영역 안에 가득 찬 마나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니 그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발레아는 자신의 영역을 왕국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왕국이라기보다는 몸에 가까웠다.
움직이는 사물들은 그녀의 육체였고, 가득 찬 마나는 신경이자 근육이었다.
그리고 마나의 움직임이 시작되는 곳, 모든 마나의 중심에는 그녀가 있을 게 분명했다.
나는 그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쏘아져 들어오는 나뭇가지를 피하고 날아오는 돌들을 튕겨 내 바로 앞까지 다가가자, 나무들이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이제는 나뭇가지나 뿌리가 아니라 뿌리를 뽑아낸 나무들이 움직였다.
계속 뿌리를 뽑아낸 게 나무 자체를 움직이려고 그랬나 보다.
나는 단검에서 검기를 뿜어내 앞을 막은 나무를 베어 냈다.
서걱.
"소용없어요. 이 안에서는 무한하게 복구되니까요."
그녀 말대로 검기로 나무를 잘라 냈지만, 나무들은 잘린 그대로 나를 향해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서걱, 서걱.
하지만, 나는 계속 잘라 냈다.
"소용없다니까요. 그렇게……. 아니, 왜……."
그녀의 놀란 목소리와 함께.
쿵. 쿵. 쿵.
나무들이 쓰러졌다.
육체가 무한하게 복구된다고 해도, 신경과 근육을 전부 끊어 놓으면 다시 잇기까지 육체는 움직일 수 없었다.
잘린 나무가 버티는 이유는 마나 때문이었다. 마나의 흐름을 전부 끊어 놓으면 마나가 다시 이어지기까지 나무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막아섰던 나무들이 쓰러지고, 나는 한걸음에 뛰쳐나가 나무 중 하나에 검을 휘둘렀다.
다른 나무와 똑같은 평범한 나무였는데, 검이 닿기 전에 사람으로 변했다.
"항복이에요."
발레아가 양손을 들고 서 있었다.
우뚝.
그녀의 목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단검이 멈추었다.
들어 올린 손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검기에 베인 것이다.
슈우우우욱.
그리고 그녀가 항복이라고 말한 그 순간, 주변 환경이 변했다.
흐느적거리던 나무들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고, 솟구쳐 있던 돌벽이 아래로 가라앉았다.
엉망이 된 돌길이 원래의 모습으로 변했고, 달빛도 제빛을 되찾았다.
영역이 사라진 것이다.
원래의 평범한 공원과 숲. 하지만, 싸운 흔적이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아카데미 관계자가 보면 골치 꽤나 아플 것 같았다.
"아버지의 원수라면서요?"
나는 검을 들이민 채로 그녀에게 물었다.
잘못 보았다고 하려나? 그리고 나중에 다시 덤빈다는 생각일까?
"원수는 맞아요."
그건 아니군.
"그런데 제가 이기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포기하려고요."
끙, 역시 이 여자의 머릿속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딸로서 할 만큼은 했으니까요. 솔직히 딸이 아니었으면 싸우기는커녕 죽여 주었다고 좋아했을 거예요. 아시잖아요. 아버지가 죽어서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발레아는 피가 줄줄 흐르는 팔을 든 채로 말을 이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절 죽이려고 했잖아요."
"네. 그럴 생각이었죠."
"죽이는 걸 실패하고 항복하면 그만인가요?"
말을 하다가 보니 오해로 공격당했다고 말하지 않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을 테니.
아니, 그보다 뭔가 죽이기 어려워지고 있었다. 검을 멈추지 말 걸 그랬나.
"어쩔 수 없었어요. 딸로서의 의무감과 살고 싶은 욕망 사이의 고민이라고 할까요."
정말 뻔뻔했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예쁜 척, 착한 척 온갖 가식을 부렸는데, 본모습을 보니 차라리 전과 같이 가식을 부려 주길 바랄 지경이었다.
"나를 죽이려고 했는데, 항복한다고 제가 살려 줘야 하나요?"
죽이는 대신 아카데미에 신고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내용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벌인 일이 한둘이 아닌데, 지금 같은 때에 남작을 죽였다는 소문이 돌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죽여야 할 것 같은데.
다시금 죽이는 쪽으로 저울추가 움직이려 할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동료가 되어 드릴게요. 목숨도 구해 주고요. 아시다시피 제가 약한 편은 아니거든요. 공작가 서자라는 위치 때문에 일 처리가 힘들었을 텐데, 드러내지 못하는 일 같은 것은 제가 다 처리할게요."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음. 뭔가 괜찮은 이야기가 들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를 믿기는 어려운데.
"신전에 가서 계약하죠. 원한다면 주. 인. 님. 이라고 불러 드릴게요."
그녀의 목소리가 달콤하게 변했다. 하지만, 달콤한 목소리는 별로 와 닿지 않았다.
그 대신 계약이라는 말은 귀에 쏙 들어왔다.
"정말인가요?"
"그럼요. 그 정도는 각오하고 벌인 일이에요. 거기다 주인님은 아버지처럼 고생도 안 시킬 것 같고요."
"주인님은 필요 없어요."
나는 검을 거뒀다.
"내일 바로 계약하죠."
"네!"
그녀도 팔을 내렸다.
결국 죽이지 않는 것으로 결론 내린 것이다.
아직 그녀를 완전히 믿는 것도 아니었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나는 이 결정을 되돌릴 수 있었다.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나는 궁금했던 내용을 그녀에게 물었다.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요? 분명히 들켰을 텐데요."
나도 그 이유로 발레아를 죽이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도망갈 생각이었어요. 아버지하고 아는 용병이 있어요. 그 용병을 찾아서 제국이나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고요."
뭔가 고민도 앞뒤도 없었다.
그녀는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위치도, 남작의 딸이라는 지위도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았다.
자유롭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계약하자는 말을 들어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고.
다시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녀가 슬쩍 손을 들었다.
"저, 그보다 너무 어지러운데요. 잠깐 기절해도 되나요?"
말과 함께 발레아가 뒤로 쓰러졌다.
소매는 피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 바닥에도 피가 고여 있었다.
나는 쓰러진 발레아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손수건을 꺼내 발레아의 손목을 묶은 뒤 그녀를 안고 진료실 쪽으로 걸어갔다.
다음 날은 휴일이었다.
그녀와 나는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 신전을 찾았다.
아카데미 안에 있는 진료실에도 신관이 있었지만, 계약 전문 신관도 아니었고, 아카데미 안에서 계약을 하는 것은 보안 유지가 어려웠다.
마차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서 신관을 찾은 발레아와 나는 신관을 앞에 두고 계약서를 만들었다.
최대한 나에게 유리한 계약이었다.
나에 대한 비밀을 지켜 주는 것과 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하는 계약이었다.
목숨을 보호하거나 동료로 삼는다는 것은 계약서로 만들기 어려웠지만, 위의 계약만으로도 충분히 불공평한 계약이었다.
계약서의 마나가 한계가 있어 평생의 계약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오랫동안 지켜야 하는 계약이었다.
계약서를 보고 신관이 깜짝 놀라 발레아에게 여러 번 물어보았지만, 발레아는 미소를 지으며 계약서에 서명했다.
동료도 아니었고 믿기도 어려웠지만, 어쨌거나 비밀을 하나 공유한 사람이 생긴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