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77화 (77/563)

제77화

제2편 계약 (1)

왕립 아카데미는 전에 말했듯이 수도 남쪽의 거대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거대한 운동장들과 건물들. 그리고 창고와 실험실까지. 다양한 시설이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제일 큰 것은 왕립 아카데미의 1/4를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숲과 공원이었다.

이곳은 학생들의 휴식처이기도 하고 각종 훈련과 실습 장소로도 활용되는 곳으로, 밤이 되면 그 거대한 지역이 불빛 하나 없이 오로지 곤충과 작은 짐승들의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오늘은 그런 작은 소리들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작은 발소리만 들려왔다.

그리고 낮은 허밍.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 발레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였다.

그녀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나는 머릿속이 무척이나 복잡했다.

분명 잘 넘어간 것 같은데. 집에 잘 갔다가 오더니, 골치 아픈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남작에 대한 일이라니, 들킨 걸까?

아니면 뭔가 의문이 생길 여지가 남아 있었나?

아니, 의문 정도는 충분히 생길 수 있었다.

남작이 날 죽이고 싶어 한 것은 사실이었고.

남작이 죽은 그날, 나는 사냥한다는 핑계를 대고 사람들과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의심을 사긴 힘들었다.

거기다, 남작이 나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지금의 나는 모르는 일이고.

뭔가 알아차린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보려는 걸까?

하지만, 평범한 질문을 하려고 이 밤에 이런 외진 곳까지 나를 끌고 오지는 않을 텐데.

저벅, 저벅.

잘 가꿔진 공원을 지나 이제는 우거진 숲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턱.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아무래도 더 따라 들어가선 안 될 것 같았다.

뭔가 일이 틀어진 거라면 발레아의 상속 능력에 대비해야 했다.

"더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습니다만. 숲은 낮에도 학생 혼자 함부로 진입하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이 뒤쪽 공원도 밤에는 웬만하면 다니지 말라고 했고요."

내 말에 그녀도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그녀는 조금 아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조금 더 가면 될 텐데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겁이 많아서요."

내 말에 그녀의 얼굴이 샐쭉하게 변했다.

"밤새 사냥하러 다니셨던 분이 아니셨나요."

"사냥꾼도 무서울 때는 무섭습니다."

그녀는 뻔뻔한 내 말에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죠."

그녀도 더 들어가기를 포기하자 나는 입을 열었다.

"돌아가신 남작님에 대해 물어볼 말이 뭔가요? 제가 남작님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데요."

내 말에 그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디 보자."

그녀는 발을 두드렸다.

콩. 콩.

발을 두드릴 때마다 바닥에서 마나가 퍼져 나갔다.

"다른 사람이 따라오거나 누가 보고 있지는 않네요."

그녀는 나를 보고 웃었다.

"우리 둘뿐이에요."

젠장, 설마 여기도 그녀의 영역 안인가.

목덜미에 땀이 맺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물어볼 말은요."

그녀의 미소가 활짝 피어났다.

"공자님이 저희 아버지를 죽이신 건가요?"

뭔가 에두른 말도, 귀족적인 수사도 없었다. 그녀는 나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네?"

놀란 눈, 그리고 황당한 표정.

오랜만에 하는 표정 관리였다. 오케이, 들킬 여지는 주지 않았다.

하지만, 바로 '범인은 너!'라는 질문을 던지다니.

예상한 것 중에 제일 나쁜 쪽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진짜 뭔가 아는 건가? 그럼 답이 없는데.

저장 시점이 짧아서 수습할 방법도 없고.

분위기가 싸하긴 한데, 지금은 모르는 척해야 했다.

"갑자기 무슨 말을……."

"정말 대단하다니까. 나조차도 연기인지 진짜인지 모를 정도예요."

당연하지. 그때 죽고 난 뒤에 얼마나 연습했는데.

지금 내 연기는 완벽에 가깝다!

"아니, 뭔가 알아듣게 이야기해야 내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황당한 것은 둘째 치고, 남작님을 내가 죽였냐고 물어보시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흠. 그러네요. 설명이 부족하기는 했어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어. 설마.

"원래 아버지는 공자님이 우리 집에 오셨을 때, 공자님을 죽이려고 했었어요."

아니, 잠깐만.

"아버지는 공자님의 작은 어머니. 음, 공자님은 서자니까 그레시아 공작님의 둘째 부인이라고 해야 하려나요."

그녀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튼 아버지는 그 둘째 부인을 사랑했어요. 뭔가 미쳐 보이긴 했지만, 좋아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덕분에 우리 두 남작 부인께서는 멘탈이 파사삭 나가셨죠."

나는 입을 벌리고 그녀의 입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왜 다 토해 놓는데?

"저도 고생했다니까요. 그 전에는 그래도 뭔가 이유가 제대로 있었는데, 이번에는 앞뒤 없이 공자님을 죽이느니 어쩌니 계속 그랬다니까요. 저도 엄청 힘들었어요."

아니, 죽이기 전에 싫다고 하는 목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뒤에는 신나서 나를 죽였잖아!

"공자님이 오신 날, 죽일 생각으로 준비해 놓았는데 공자님은 그날 밤 내내 보이지 않아서 취소되었어요. 아침에 문 앞에서 저와 만났잖아요. 그때 저는 밤을 홀딱 새웠답니다."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멋진 표정과 연출이었는데, 이 정도로는 그녀의 말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으시고, 수도로 가는 길이나 안 되면 아카데미 수업 도중이라도 공자님을 죽이라고 지시하셨어요. 그게 나를 왕립 아카데미에 보내는 이유 중 하나라는 거예요."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하지만, 집도 떠났는데 아버지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죠."

머리라도 쓰다듬어 달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 잘했죠?"

잘하긴 했는데, 왜 지금에 와서 내 뒤통수를 때리는 거지?

"다행히 중간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명령은 끝나 버렸어요. 무척 다행이었어요. 딱 봐도 공자님은 무시무시했거든요."

아마도 그녀의 영역을 선포하는 능력은 내가 마나를 잘 감지하는 것처럼 그녀 주변의 힘들을 잘 파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버지도 죽었고, 나도 해방되었고. 모두 행복하게 끝! 집에 돌아가기 전에는 이런 상황이었어요."

나도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발레아도 죽이지 않고 그냥 놔두었고.

"그런데 열심히 집에 돌아가서 확인해 보니까 아버지가 그냥 돌아가신 게 아니더라고요."

하긴 외부에 발표한 것과 달리, 지하에서 불타 죽었으니.

"실제 사인은 지하 창고에서 불타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들이나 가신들은 대충 자살로 생각하고 계시고요."

"아, 자살이셨어요? 아니, 자살이 문제가 아니라……."

중간에 말을 끊는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우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 보기로 하자.

그녀는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강조했다.

"하. 지. 만!"

하지만은 무슨.

"불탄 시체에서 검 흔적이랑 싸운 흔적을 찾을 수 있었어요."

"그……!"

큰일 날 뻔했다. 놀라서 잘못되었다고 소리칠 뻔했다.

흔적이 남아 있을 리가 없을 텐데, 전부 잘 타는 것을 확인했는데?

"정말 잘 탔더라고요. 금붙이도 다 녹고, 그 여자 사진도 불타 버리고, 아버지 시신도 뼛조각 몇 개만 남았어요."

"그래서 다들 지금도 아버지가 불타서 죽은 거로 생각하고 있죠."

어라?

"몰래 아버지 뼛조각을 뒤져서 부러진 흔적하고 검 흔적을 찾아내긴 했는데, 흔적이 흐릿해서 논란만 생길 것 같고, 다들 불타 죽은 사실에 납득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말 안 했어요."

아버지 뼛조각을 몰래 뒤지다니 귀족가의 딸이 할 짓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말을 안 했다고?

"지금 말대로라면 그냥 불타서 돌아가신 것 같은데요. 거기다 혹시 싸운 흔적이 있다고 해도 내가 돌아가시게 했다는 건 너무 심한 억측 아닙니까!"

어이없는 표정에서 조금 화난 표정으로. 목소리 톤도 조금 높이고. 음. 괜찮았어.

"그건 맞아요. 다만 제 상속 능력 때문에 공자님께 말한 거예요. 제 능력 가운데 영역, 아니 집 안에 있었던 마나의 흔적을 파악하는 능력이 있어요. 불타 버린 지하 창고에는 공자님의 마나 흔적이 남아 있었어요."

설마, 발레아의 상속 능력인 일정 영역을 지배하는 능력에 그런 능력까지 포함되어 있었나.

이러면 곤란해지는데, 우선 말을 꺼내 보자.

"아무도 안 믿어 줄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로 누명을 씌운다고 될 줄 알았나요?"

내 말에 발레아가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그 말대로예요. 이런 이야기를 누가 믿어 주겠어요. 가족들에게도 말하지 못한 걸요."

본성을 알고 있으니 시무룩한 표정을 봐도 긴장으로 뒷머리가 뻣뻣해질 뿐이었다.

그래도 우선 한 발 뒤로 뺄 수 있을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더 하실 말씀 없습니까? 오해를 받아 기분이 안 좋군요. 전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뒤로 돌았다. 그리고 한 걸음.

두두두두두.

돌아가려는 벽돌 길이 위로 치솟았다.

4m 이상의 높이로 길게 이어진 돌벽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역시, 안 되는 건가.

나는 다시 몸을 돌렸다.

"어쩔 수 없어요. 아무도 믿지 않아도 제가 알고 있거든요. 어떻게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 지하실을 찾아서 아버지를 죽였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저는 공자님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생각해요."

결국, 최악의 결말이었다.

발레아 성격에 증거나 다른 사람의 확인은 필요 없었다. 알리바이가 있어도 앞뒤가 안 맞아도 그녀가 그렇게 믿어 버리면 그만이었다.

"정말 증오하고, 매일같이 죽어 주었으면 하고 노래를 불러도 제 아버지잖아요. 죽은 아버지의 복수는 해야겠어요."

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 뒤쪽에 늘어선 나무가 휘청거리며 다가왔다.

공기가 날카롭게 변하고, 숨을 쉬기도 어려워졌다.

이곳은 그녀의 영역 안이었다.

나는 허리춤에 숨겨 둔 단검을 꺼냈다.

우우웅!

붉은 검기가 검에서 뿜어져 나왔다.

죽은 아버지 이야기를 하자고 불러냈는데, 그냥 따라갈 리가 없었다.

갑옷이나 다른 준비는 못 해도, 단검 정도는 준비해 놓고 있었다.

"세상에! 밖으로 마나를 뿜을 수 있군요! 그 정도면 밤새 달려가면 시간이 되려나?"

그녀는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짓입니까? 여기는 아카데미 안입니다! 허락받지 않은 대결은 퇴학 사유입니다!"

대충 망한 느낌이었지만, 끝까지 연기를 하기로 했다.

다 포기하고 자살하기에는 저장 시점이 너무 가까웠다.

아카데미 수업을 다 포기하고 아카데미로 오는 발레아를 중간에서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고, 출발하기 전에 남작 영지까지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카데미 안이라 여기서 발레아를 죽인 뒤, 숨기기도 어려워 보였고.

어쨌거나 우선 결판을 내야 했다.

발밑이 푹 꺼졌다.

나는 몸을 위로 솟구치게 했다.

둘러싼 벽에서 돌들이 튀어나왔다.

날아온 돌들을 검으로 튕겨 냈다.

그 모습을 보고, 발레아가 입을 열었다.

"발버둥쳐도 소용없어요. 이곳은 내 영역으로 선포된 나의 왕국이에요. 이곳 안에서는……."

죽기 전에 들은 이야기였다. 또 반복해서 들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다시 날아오는 돌을 박찼다.

출렁이는 숲 가까이 서서 나를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는 발레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상속 능력이었다.

이번에는 질 생각이 없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