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73화 (73/563)

제73화

제23편 실험체 (1)

그는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보며 비웃었다.

"이미 늦었다. 큭, 도망가도 소용없어. 지금 안 터지는 것도 내가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 아니면 지……금이라도 신나게 도……망가 보든가."

나도 별로 도망칠 생각이 없었다. 대신 그에게 질문했다.

"두 사람은 너를 믿은 것 같은데, 이렇게 배반해도 되는 건가?"

담담한 표정 때문일까. 그는 인상을 썼다.

그는 평온한 내 표정이 자신이 죽어 가는 것보다 더 싫은 듯했다.

그래도 좀 전과는 달리 내 말에 대답했다.

진작 이럴걸.

"바, 바보같이 스승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결국 실험체에 불과했던 거지. 나도, 이 애들도. 뭐, 이 애들은 이유도 모르고 당한 거니까 나보다 더 안된 건가……. 크윽. 그…… 그래도 뭐 능력을 줘서 미래를 꿈꾸게 해 주었으니 둘 다 나를 용서해 주겠지."

"용서해 주기는 개뿔."

내 말에 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 시원해. 생각해 보니까 지금은 속으로 구시렁댈 필요가 없잖아."

반쯤 죽여 놓은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

슬슬 대답도 어려워 보이니 지금은 더 정보를 뽑기도 어려울 것 같고.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어보았다.

"네 소속은 어디야? 제1 왕자? 제2 왕자? 공국? 아니면 제국? 혹시 뭐 더 내게 알려 줄 건 없어?"

내 질문에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네, 네놈은……."

역시, 더 말하기는 무리였다.

한쪽 팔만 자를 걸 그랬나?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피해서 찔렀지만, 양팔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너무 많았다.

각성한 귀족이라도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것이다.

쿨럭. 쿨럭.

그는 마지막으로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피뿐이었다.

"또 만나."

나는 숨이 넘어가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는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끝으로 숨이 멈췄다.

뚝.

그 순간, 그와 아이들을 연결하고 있던 마나가 끊어졌다.

그리고 아이들의 몸이 환하게 빛났다.

입학식 때와 같은 현상.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입학식 때는 하나였는데. 건물도 튼튼했었고. 둘이면 이 거리가 다 날아가 버릴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얼핏 스쳐 지나갔지만, 나도 휘말리고 있기에 의미 없는 이야기였다.

죽는 순간이라서 그런가. 빛이 천천히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플랜 B.

죽어서 다시 시작하는, 정말로 한숨 나는 계획의 시작이었다.

나는 다가올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번쩍!

세상이 온통 빛으로 가득했고.

다음 순간, 온몸이 부서지며 통증이 내 머리를 세게 강타했다.

그리고 암흑.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이상으로 입학식을 마치겠습니다."

눈을 뜨니 입학식장 안이었다.

막 입학식이 끝나는 시간.

'그래도 이번에는 버틸 만하네.'

입학식장에서 죽음을 반복했던 때와 달리, 며칠이나마 텀을 주어서인지 오래지 않아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고통은 여전했다.

벽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자, 주변에 있던 어른들이 괜찮으냐고 한마디씩 하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전생에 보았던 소설에서는 수백 번, 수천 번 잘도 죽던데, 한 번 죽기가 이렇게 힘이 들다니.

뭔가 해 보려고 하면 매번 죽음이 찾아오는 꼴을 보니, 역시 내 인생은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지독한 인생이었다.

그 뒤로 시간은 저번 삶과 같이 흘러갔다.

진료실에 누워 있던 여강사는 이미 자살한 뒤였고, 이번에도 여강사의 자살은 조용히 묻혔다.

입학식도 정상적으로 마쳤고, 카트린과 수석 기사와의 면담도 별다를 바 없이 지나갔다.

대신 마지막 부탁은 전과 달랐다.

"개인실을 주셨으면 합니다. 복도 끝 쪽으로요."

피아르와 같은 방을 달라고 할 때처럼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도 내가 방을 혼자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저녁에 기숙사 방 앞에 도착했을 때 옆방에서 나오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그 학생에게 인사를 건넸다.

"옆방이 너였어?"

"아……. 네……."

내 말에 피아르가 움찔하며 대답했다.

인사와 달리 나는 그가 옆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 삶에서 피아르 옆방이 비어 있는 것을 보았기에 이 방으로 부탁한 것이다.

나는 간단하게 인사만 한 뒤에, 방 안에 들어왔다.

피아르와 같은 방을 썼을 때처럼, 짐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나는 짐을 정리하기 전에 책상에 앉았다.

서랍을 열어 펜과 종이를 꺼낸 뒤, 계획을 정리했다.

이번에 죽기 전 며칠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시간이었다.

신입생들의 어수선한 움직임들 때문인지 나도 꽤나 허둥거렸고.

피아르의 갑작스러운 외출 탓에 준비 없이 적과 마주쳐서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솔직히 이번에는 죽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었는데……."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 뒤에 그냥 도망쳤어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게 따지면 이 학교를 다닐 필요도 없었다.

자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 공작 각하께 넙죽 엎드린 뒤에 어머니를 모시고 멀리 시골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쩝, 다시 생각해도 그쪽도 만만치 않네. 형들과 공작가에 딸린 귀족들이 그냥 놔둘 것 같지도 않고.

어쨌거나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시간 동안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우선 그 스승이라는 자.

죽을 때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 상속 능력을 만드는 자들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게 가능한가?

전생이었다면 세기의 발명으로 대서특필되고 노벨상을 휩쓸 만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음. 실험체라고 했는데, 아직 임상 실험 중이라는 건가.

뭐, 인권이 개판인 이 동네 꼬라지를 보면 사람으로 임상 실험을 하는 것도 딱히 특별해 보이지 않는 것 같고.

그런데, 입학식장을 날린 것도 그렇고, 스승이라는 놈을 봐도 학구적인 놈들이 꾸민 짓거리는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뭔가 대단한 놈들이 뒤쪽에서 암약한다는 소리인데.

왕립 아카데미 안에서 공주와 귀족들을 날려 버리는 테러를 자행하고, 이 세계의 계급을 지탱하는 상속 능력을 만들어 내는 어마무시한 놈들이다.

괜히 끼어들었다가는 나만 신나게 죽어 나갈 것 같은데.

아니, 이미 끼어들어 버린 건가.

공주와 카트린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주와 카트린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피아르와 미리사의 목걸이.

피아르의 폭파는 그의 고유한 상속 능력이 아니라 목걸이를 매개체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마나를 과부하되게 만드는 아이템이려나. 이것도 확인해 봐야겠네."

그렇게 대충 일정과 만날 사람들을 종이에 적으며 머릿속에 남긴 뒤, 종이를 불태웠다.

그리고 대충 짐을 정리한 뒤에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무척이나 바쁠 게 분명했다.

"그것보다 짐 정리를 또 안 했으면 좋겠네."

나는 오늘을 다시 경험하지 않기를 바라며 어서 잠을 청했다.

* * *

다음 날 오전 수업인 두 교양 수업.

역사와 상속 능력 기초는 저번 삶과 다르지 않게 지나갔다.

대충 왕따 비슷하게 된 상황도 똑같았고, 교수들의 지루한 수업도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점심도 혼자 먹었고.

결국, 오후 수업도 똑같이 진행되었다.

기사 학부 전공 수업으로 기사들과의 대련이 시작되었고, 나는 카트린에게 불려가 그녀와 대련을 하게 되었다.

캉!

검과 검이 부딪치고,

텅!

검이 방패를 튕겨 냈다.

"세상에, 설마 마나 없이 대련하는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돼. 마나 없이 저런 움직임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그런가……."

"그래도 대단한데. 웬만한 견습 기사 수준은 되는 것 같아."

이미 대련을 끝낸 학생들은 나와 카트린의 대련을 보고 수군거렸다.

대련을 끝낸 기사들과 한두 학생들은 나와 카트린이 마나 없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고.

"역시,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네."

"그럴 리가 없죠."

검을 맞대며 카트린과 나는 대화를 나누었다. 마나를 쓰지 않고 있으니 정신력도 남아돌아 이 정도 여유를 부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저번 삶과 달리, 이번 대련에는 이미지를 잡고 싸우는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실력 확인이 어려운데 사람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바꾸는 편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마나를 써서 싸울 일도 아니었으니, 이렇게 땀을 흘리며 카트린과 검을 겨루는 수밖에 없었다.

"쩝, 그런데 이런 대련으로는 실력 확인이 어려울 것 같은데."

카트린이 아쉬운 얼굴로 한 걸음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한참 동안 검을 겨루었지만, 결국 이런 대련으로는 두 사람 다 제 실력을 보여 주긴 어려웠다.

나도 한 걸음 물러서며 검을 거두었다.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대련해야겠어. 괜찮지?"

"네."

나야 고마울 따름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들 중에서 그나마 내 실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고, 나와 등을 맞대고 싸운 전우이기도 했다.

실력을 계속 쌓으려면 실전 이외에도 제대로 된 대련이 꼭 필요했다. 그런 대련 상대로 그녀만 한 사람이 없었다.

마무리 인사를 마친 뒤, 주변을 둘러보니 저번 삶과는 확실히 다른 반응을 보여 주고 있었다.

시기, 질투, 감탄, 무시같이 다양한 표정들이 보였지만, 그래도 다들 내 실력을 얕보지 못하게 된 듯했다.

실력을 제대로 보여 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무난한 시작이었다.

이제, 기본 수업을 조금 더 진행하고 오후 수업이 끝날 터.

나는 먼저 카트린에게 양해를 구했다.

"살짝 베인 것 같은데, 양호실 좀 들른 뒤 먼저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피가 줄줄 새어 나오는 팔을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어? 언제 그렇게 다친 거야?"

"오랜만에 마나 없이 대련해서 실수했네요."

"이런, 조심했어야지."

조금 전 두 사람의 대련에서 마나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실전에 가까운 대련이었다.

마나로 몸을 보호하지 않았으니, 충분히 상처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카트린도 나도 이런 대련에서 상처를 입을 경지는 아니긴 했지만.

실수해서 다쳤다는데 그녀가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근육을 다친 건 아니지?"

"아뇨. 그냥 피부만 갈라졌습니다. 진료실에 가서 치료술만 받으면 됩니다."

신관의 치료술은 단순한 상처에 최고였다. 전생의 밴드나 외과 시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면 먼저 돌아가도 돼."

예상대로 카트린의 허락이 떨어졌다.

나는 그녀와 기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연병장을 떠났다.

학생들은 내 팔에 난 상처를 보고 조금 안심하는 기색이었고.

나는 연병장을 벗어나, 사람들의 시야가 사라진 뒤에 손으로 팔을 쓱 닦아 냈다.

흘러내린 피와 달리, 상처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피도 바로 멈췄다.

마나로 상처 주변의 혈관들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정도 상처는 상처로 취급받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신관에게 보일 정도도 아니었고, 쉽게 말해 침만 바르면 나을 상처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입은 상처가 아니었다.

내 스스로 낸 상처였고, 그 상처를 쥐어짜서 피를 뽑아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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