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제21편 거짓된 스승 (1)
나는 손을 들어 이의를 제기했다.
"잠깐만, 잠깐만요……. 으악!"
뻑!
손을 들었지만 카트린의 검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검면으로 대차게 얻어맞아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아, 미안. 집중하느라 손드는 걸 못 봤어."
카트린은 미안한 얼굴로 사과를 했다.
설마, 그녀 정도 되는 능력자가 내 행동을 감지하지 못했다고?
분명 지금 입꼬리가 올라가 있잖아!
하지만, 모두가 보는 대련. 그녀에게 성질을 낼 수가 없었다.
비척거리며 일어나는 나에게 그녀가 물었다.
"왜 멈춘 거야? 대충 멈출 때가 된 것 같기는 하지만."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제대로 된 대련이 아닌 것 같아서요. 마나도 안 쓰는데 검기를 기준으로 싸우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아, 그러네. 말이 안 되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실력 확인을 하는 데는 문제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어진 말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제대로 된 대련도 아니고 한바탕 운동한 것으로 쳐줘야 할 것 같았다.
거기다 대련을 끝내고 주변을 둘러보니, 뭔가 이것저것 오해들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끙. 어느 정도 실력을 보여 줘서 무시는 안 당하려고 했는데, 설마 전생의 소설 클리셰처럼 되는 건 아니겠지.
"모두 자신들의 실력을 알겠지? 각성한 귀족이라는 자부심은 너희들의 실력이 귀족의 이름값만큼 올라선 뒤에 가지는 것이 좋을 거다!"
카트린은 다시 단상에 올라 학생들에게 일갈을 터트렸다.
"우리 귀족은 상속 능력을 가진 특권층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마물과 외적을 막아 냈고, 또한 막아 내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다. 제대로 된 실력도 없이 기사나 다른 이들을 무시하는 놈들은 내가 친히 대련으로 훈련시켜 실력을 만들어 줄 테니 단단히 각오하도록."
카트린이 단상에 서서 검을 짚고 외치는 모습은 물개박수라도 쳐 주고 싶을 정도로 무척이나 멋지고 훌륭했다.
문제는 바닥에 널브러진 저 귀족과 귀족 아류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대전쟁, 그리고 왕국이 만들어진 지도 수백 년.
의무는 형식이 되어 가는 중이었고, 권리는 이미 특권으로 굳어져 버렸다.
실질적인 능력을 기반으로 계급이 정해져 있으니 레볼루션, 즉 혁명이 일어날 리도 없고.
결국 이곳도 굳어진 계급으로 계속해서 썩어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그런 건 나와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런 거창한 것을 생각하기에는 내 코가 석 자였다.
그렇게 오후 수업도 끝이 났다.
첫날 수업.
친구 0명. 대화 상대 0명.
아무래도 왕따 확정인 것 같았다.
한숨이 나오는 결과를 들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룸메이트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저녁 식사도 혼자 해야 할 듯했다. 아니, 룸메이트가 있어도 식사를 혼자 했으려나.
우울한 예상을 머릿속에서 날려 버리고, 후딱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대충 숙제를 하다가 잠잘 시간이 되었다.
그 말인즉슨 기숙사 통금 시간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아직 피아르는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부터 무단 외박?
내게 말도 안 하고 외박이라니, 그럼 숨겨 줄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건물 1층에 있는 기숙사 사무실로 찾아갔다.
"룸메이트가 아직 안 왔는데요."
"아, 피아르 학생은 면회가 와서 일일 외박입니다."
"아, 그런가요?"
아니, 미리 좀 알려 주지. 아니, 피아르가 내게 말했어야 하는 건가? 아무튼 헛걸음이었다.
고개를 젓고 다시 올라가려다가 머릿속으로 뭔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몸을 돌려 다시 기숙사 교직원에게 물었다.
"피아르만 외박입니까? 사촌 누나 미리사도 있는데?"
"아, 미리사도 외박……. 이런, 여학생 쪽은 말하면 안 되는 건데. 못 들은 걸로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난감한 얼굴로 말하는 교직원을 뒤로하고 나는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면회가 와서 둘 다 외박이라.
영지와 수도가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 가족이라면 시골 마을 촌장 집안일 텐데, 가족이 찾아와 수도에서 두 사람을 외박시킨다고?
아무래도 금방 일을 끝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옷을 서둘러 갈아입고,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깊숙이 숨겨 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벽에 세워 둔 대검이 있었지만, 밤 나들이에는 카트린이 준 단검이 제일 안성맞춤이었다.
오랜만에 단검을 쥐자, 손바닥에 전류가 이는 것 같았다.
처음 내게 말을 건넨 이후 이 단검은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다시 말을 걸어 주길 기대하며 나는 단검을 허리에 꽂았다.
마지막으로 후작가에서 활약을 했던 망토를 위에 걸친 뒤.
방에 불을 끄고, 베개와 이불로 사람이 자는 것처럼 만든 뒤에 창문을 열었다.
마나를 끌어올렸다.
웅. 웅. 웅.
기분 좋은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멀리서 내가 심어 놓은 기운이 느껴졌다.
기껏 룸메이트를 한 이유도 내 기운을 피아르에게 심어 놓기 위해서였다. 기운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만, 다행히 그가 있는 방향을 알 수 있었다.
역시,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나는 창밖으로 몸을 빼낸 뒤, 창문을 닫고 그대로 몸을 날렸다.
구름이 가득한 밤.
검은 옷을 입은 어린 능력자가 아카데미 안을 가로질렀다.
* * *
상속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마나 연공술을 이용해 기사가 검을 사용하게 만드는 마나.
내가 전생한 이 세계는 마나를 기반으로 세워진 곳이다.
대전쟁 전, 고대 제국도 마법사와 기사가 마나를 사용해서 거대한 제국을 이끌었다.
대전쟁으로 기사도 그 지위를 내려놓았고 마법은 몰락했지만, 대전쟁 때 생겨난 상속 능력도 바로 이 마나가 기반이었다.
상속 능력이 그 강대한 위력으로 기사들의 마나를 눌러 버렸지만, 아쉽게도 상속 능력은 마법이나 기사의 검처럼 다양하게 활용하기는 어려웠다.
기사와 마법사는 알보병이라고 하면, 각각의 상속 능력은 대포와 전투기처럼 특화된 고화력 무기라고 할까.
고대 제국 때에는 몇몇 마법사도 상속 능력 같은 무시무시한 위력의 마법을 뿜어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지만, 대전쟁 무렵 전승이 끊어져 버렸으니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런 이유로 육체 강화 계열의 상속 능력과 기사의 마나를 같이 가지고 있는 나는 두 가지 능력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었다.
거기다 다른 이들보다 뛰어난 마나 감지 능력까지 더하면, 이렇게 자신의 기운을 다른 사람에게 묻혀 놓아서 멀리서도 추적할 수 있었다.
그래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추적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목표물은 아카데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한참을 달려 쇠창살이 삐죽이 올라온 담벼락을 뛰어넘으니, 목표물이 바로 앞에 보였다.
목표물이 느껴지는 곳은 아카데미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상가 지역이었다.
아카데미를 방문하는 사람들과 아카데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거리였다.
각종 음식점과 선물 가게, 그리고 숙박 시설까지.
전생에 보았던 대학교 앞 상가 거리나 군부대 앞 이수 지역 상가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전생의 상가 거리처럼 밤 시간인 지금은 상가 대부분의 불이 꺼져 있었다.
다만 아카데미 앞이라서 그런지 가로등이 몇 군데 켜 있어 아예 다니지 못할 정도로 깜깜하지는 않았다.
'여관이 아니잖아?'
가로등을 피해 조심스럽게 마나의 향을 쫓다가 도착한 목적지는 예상과 달리 평범한 가게였다.
문을 닫아 놓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기념품 같은 것을 파는 가게였다.
"여관도 아니고, 의심스러운 기운이 풀풀 새어 나온단 말이지."
1층은 가게, 2층은 숙소로 보이는 그리 작지 않은 가게 건물.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건물 2층에서 내가 묻혀 놓은 마나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까."
나는 2층에 나 있는 창을 바라보며 고심에 잠겼다.
* * *
2층의 불 켜진 방에서는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서요. 모두 깜짝 놀랐어요."
"오호."
"그래도 생각보다 막 무시하지는 않더라고요. 아니 뭐, 신경도 안 쓴다는 쪽이 더 가깝겠지만요."
소녀는 신나서 그동안의 이야기를 했고, 남자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리 같은 것을 누가 신경 쓰겠어요. 공작 아들에 백작가 후계자, 거기다 공주님까지 계시는데요."
"아, 아이샤 공주님이 입학하셨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그러니까요. 괜히 나서지만 않으면 우리 같은 평민은 관심도 없어요."
소년의 말에 그는 맞장구를 쳐 주었다.
"스승님 덕분에 실수를 안 할 수 있었어요. 우리는 귀족 예절 같은 거 하나도 몰랐잖아요. 스승님께 듣지 않고 왔다면 여러 번 사고를 쳤을 거예요."
"누나 말이 맞아요."
소년 피아르와 그의 사촌 누나는 자신들을 이곳까지 이끌어 준 스승을 기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오후 늦게 누군가 면회를 왔다는 말에 깜짝 놀랐는데, 스승님이라니.
피아르와 미리사는 깜짝 놀라 정문 면회실로 달려 나왔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스승님을 모시는 분과 함께 임시로 마련한 숙소라는 가게로 와서 지금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루이라는 흔한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의 스승은 청년에서 중년으로 넘어가는 나이로 보이는 마른 남자였다.
조금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피아르와 미리사에게는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수도로 오기 한참 전에 마을에서 헤어졌던 스승이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다니, 두 사람은 갑자기 나타난 스승님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리고 그들의 스승은 두 아이들을 위로해 주었다.
"잘 버티고 있어서 다행이야."
"스승님이 능력도 주시고, 저희를 이곳까지 보내 주셨잖아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스승님은 걱정스럽게 물어보기도 했다.
"너희 둘 다 상속 능력을 가졌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고?"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 있는 것 같은데, 그냥 신기해할 뿐이었어요."
"아, 맞다. 같은 방에 있는 애도 물어보긴 하던데……."
"누구?"
피아르의 말에 미리사가 금방 누군지 알아차렸다.
"아, 그 그레시아 공작 서자 말이지? 사람들이 막 쑥덕거리던데."
"뭐, 그렇게 이상한 애는 아닌데. 아닌가, 평범한 아이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피아르의 말에 스승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공작 서자라……. 무얼 물어봤는데?"
하지만, 피아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평범하게 대답했다.
"별거 아니었어요. 어디서 왔는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그런 걸 물어봤어요. 그냥 같은 방에 사는 학생에게 물어볼 만한 내용이에요."
"그건 그러네."
"공작가 자제가 평민에게 물어봤다라……."
"그러니까 그게 좀 특이했어요. 서자라서 그런가……."
"아, 서자……."
피아르의 말에 미리사도, 스승도 고개를 끄덕였다.
대귀족의 아들이 평민에게 신경을 쓴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서자라면 얘기가 달랐다.
"그래도 나름 인정받고 있다고 하던데……."
"네?"
스승의 중얼거림에 미리사가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좀 더 이야기해 주겠니? 입학식 때는 어땠어?"
"그게 말이죠. 그날……."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