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화
제20편 수업 첫날 (3)
이어진 점심시간은 예상했던 대로 혼자 먹게 되었다.
첫날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나만 혼자 먹는 것은 아니었지만, 꼴을 보니 잘못하다가는 내내 혼자 먹게 될 것 같았다.
그건 또 곤란할 것 같아 대충 몇 명 꼬셔 봐야 할 듯하다.
다행히 식사는 훌륭했다. 집에서 먹던 식사에도 뒤떨어지지 않는 음식. 왕립 아카데미 만세였다.
식사 후에 이어진 오후 수업.
오후 수업은 오전과 달리 학부별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나는 기사 학부의 수업이었다.
우리는 아카데미에서 지급한 가죽 갑옷으로 갈아입고, 검을 찬 뒤에 연병장으로 나왔다.
아카데미에 있는 여러 연병장 중 하나였는데, 이곳도 모인 사람들에 비해 엄청나게 큰 연병장이었다.
"빨리 집합! 모두 정신을 빼놓고 왔나!"
연병장 안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에 줄을 맞춰 서면서 나는 속으로 피식 웃고 말았다.
카랑카랑한 저 음성 때문이었다.
그리 오래전에 들은 것도 아닌데, 왠지 추억의 음성을 듣는 것 같았다.
지금 듣는 음성은 후작가에서, 지하 던전에서 듣던 음성이었다.
용병 때의 카트린의 음성. 왕실과 교사 때의 음성이 아니라 용병 때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였다.
"나는 1학년 기사 학부를 담당하게 된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다. 기사 작위는 없지만, 너희들을 훈련시키기에는 충분하니 걱정하지 말도록!"
우리와 같이 가죽 갑옷을 입고 단상 위에 서 있는 카트린은 용병 때 보던 그녀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아마 귀족이라는 직위와 단정한 그녀의 모습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기사 작위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녀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라텐하마르 백작가가 무엇으로 유명한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거기다 그녀가 기사 학부를 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 그녀가 누구라는 것도 모두 알게 되었다.
왕비의 여동생이자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후계자라는 것을.
뭐, 그녀의 진짜 실력을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테지만.
단상 위에는 그녀와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서 있었다.
그녀는 줄을 맞춰 서 있는 우리를 훑어보며 말했다.
"처음 만났으니 우선 실력을 봐야겠지?"
그녀의 말에 불쑥 한 학생이 물었다.
"설마 저 기사들을 상대하라는 말씀은 아니겠죠?"
누구냐. 이 한심한 말을 꺼내는 자가.
나는 괴상한 말을 꺼낸 신입생을 바라보았다.
남들보다 훨씬 더 큰 덩치를 자랑하는 학생이었다. 거의 2m에 육박하는 덩치에 근육으로 꽉 찬 몸을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육체 강화 능력자였다.
어라. 그런데 그를 어이없게 바라보는 학생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모습을 보이는 학생이 더 많았다.
설마, 다들 나보다 강한 건가?
그럴 리가, 몇몇 빼고는 전부 허접해 보였는데?
"하아, 내가 이럴 줄 알았다."
학생들을 보고 카트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네놈들의 정신머리를 제대로 고쳐 주겠다. 모두 기사가 얼마나 강한지 제대로 보여 주겠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부탁했다.
"제대로 혼내 주세요."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각 줄의 앞에 섰다.
오, 왕실 기사와의 대련이라. 실력을 얼마나 드러내야 하나. 제대로 싸워 보고 싶은데.
나는 왕실 기사와의 대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런 내 앞으로 카트린이 다가왔다.
"너는 나하고 대련이야."
"네?"
"네 실력을 아는데, 기사들하고 대련을 붙일 것 같아? 네놈 때문에 교육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이쪽으로 나와."
그녀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련은 앞으로도 계속 있어. 충분히 싸워 볼 테니 오늘은 나하고 붙어 보자고."
얼마 전까지 얌전했던 그녀가 아니었다. 용병 때의 거친 그녀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솔직히 나도 궁금했다. 선대의 유산을 얻어 성장한 그녀의 실력과 그동안 성장한 내 실력이.
나는 줄에서 벗어나 그녀 앞으로 걸어갔다.
놀란 학생들의 시선이 내 뒤를 따라왔다.
자, 얼마나 실력을 보여야 하려나.
나는 그녀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 * *
으악!
검이 날아가고, 학생도 바닥을 굴렀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려오고.
"항복! 항복한다!"
"죽, 죽일 셈이냐! 진심으로 휘두르는 거냐!"
겁먹은 목소리들이 연신 악을 써 댔다.
조교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왕실 기사들과의 대련은 학생들 순서대로 박살이 났다.
대부분의 남학생도, 몇 명의 여학생도 차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과거에 제대로 된 대련을 해 보지도 못한 학생들은 실전에 가까운 진심 대련에 공포를 느꼈다.
그들은 기사들에게 고함을 질러 댔지만, 이곳에 있는 학생들 대부분은 대귀족의 자제들도 아니었고, 가문의 후계자도 거의 없었다.
물론, 각성했기에 기사들보다 높은 위치를 지니게 되긴 하지만, 왕실 기사라면 어느 정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시하지 못하는 몇몇 학생들에겐 기사들도 함부로 대하지도 못했다.
캉!
"윽!"
"잘 막으셨습니다."
피루나 백작의 둘째 아들 이케르는 기사의 검을 힘겹게 막아 냈지만, 이어서 들려온 기사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앞 학생과 주변의 학생들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이미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도 기사에 조금 밀리고 있었지만, 각성한 지 이제 5년. 거기다 아직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15살 소년이 완숙한 기사의 검을 받아 낸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사와 상대도 해 보지 못한 하급 귀족들과 달리 자신은 영지의 기사들과도 대련을 해 보았기에 기사들과 자신의 실력을 충분히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물론, 영지의 기사들보다 눈앞의 기사가 더 강한 것 같았지만, 이 정도면 가문에 누가 되지는 않을 듯싶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실력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몇 번 더 검을 주고받은 뒤, 기사가 뒤로 물러섰다.
이케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기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마나가 바닥이라 상속 능력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는데, 다행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서 있는 사람이 몇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바닥에 눕거나 엎어져 있었고, 서 있는 사람은 기사들과 아직 대련을 이어 가고 있는 여학생 한 명.
그는 뜻밖의 광경에 놀라 그 여학생이 누군지 확인했다.
갈색 머리의 가냘픈 여학생이었다.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대귀족의 자녀도 아니었고, 얼굴이 특출나게 예쁘지도 않아 기억해 두지 않은 학생이었다.
기사 학부니, 몸이라도 건장했으면 그래도 관심을 두었을 텐데.
전혀 신경 쓰지 못한 학생이었는데, 지금 기사와 호각을 이루며 싸우고 있었다.
'여학생이라서 봐주는 걸까?'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지금 싸우는 모습만 봐도 대련하는 두 사람의 검 속도가 자신보다 빨라 보였다.
'속도 강화형인가.'
몸을 봐도 파워형은 아닐 듯하니, 대귀족이 아닌데도 생각보다 좋은 상속 능력을 받은 모양이었다.
다만, 속도 위주의 능력으로는 마물을 상대하기 어려울 텐데……. 뭐, 기사가 하는 일이 마물을 상대하는 것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설마 내 쪽이 봐주었던 것은 아니겠지?'
그와 대련했던 기사를 잠깐 쳐다본 후 그는 고개를 저었다.
왕실 기사와 백작가 기사의 실력 차가 그렇게 클 리 없었다. 영지의 기사들이 그를 계속 봐주었다면 모를까.
어쨌거나 그래도 한 명은 대등해 보이는 여학생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그는 반대쪽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슈욱! 슉!
지금 서 있는 사람들은 기사들과 그, 대련 중인 여학생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카트리네 교수와 그레시아 공작가의 서자.
처음 대련을 했던 학생들과 분명 같이 시작했는데, 여태 대련을 이어 가고 있었다.
공작가의 서자는 검을 들고, 카트리네 교수는 특이하게도 검과 방패를 동시에 들고 있었다.
"저거 뭐 하는 거야?"
"춤추는 건가?"
"저 서자, 공주와 관련이 있다는 소문도 있던데 실력을 포장해 주려고 장난치는 거 아닐까?"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럼 저건 뭔데?"
"그래도 움직임은 좋네. 제대로 배우긴 했나 봐."
부상이 크지 않아 바닥에 앉아 쉬고 있던 학생들은 카트리네 교수와 공작가 서자의 대련을 지켜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검도, 방패도 부딪치지 않고 슬쩍슬쩍 몸을 피하며 검을 허공에 찌르고 피하고 있었다.
마치 합을 맞추고 검술을 연기하는 연극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학생들처럼 수군거리지는 않았지만.
둘의 대련을 지켜보며 기사들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이케르도 이 대련을 보며 황당해했지만, 곧이어 머릿속으로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설마 아니겠지.'
저 대련과 비슷한 전투를 본 적이 있었다. 검이 서로 닿지 않는 싸움. 하지만, 검이 부딪치는 싸움보다 훨씬 고차원적이고 무서운 전투를.
검이 서로 닿지 않았지만, 검에서 솟구쳐 나온 빛이 상대방을 베어 내는 능력자들의 전투를 그는 봤던 것이다.
'아니겠지.'
제대로 된 마나 연공술을 배웠더라도 벌써 검 밖으로 마나를 뿜어낼 리가 없었다.
거기다, 분명 저 서자는 신체 강화형의 상속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공작가의 마나 연공술을 이었다면 이 학부로 올 리가 없겠지.'
공작가의 후계자도 기사 학부가 아니라 상속 능력 학부로 갔었고.
뭐, 마나 연공술을 이었으면 이렇게 수도로 오지도 못했겠지만.
서자가 가문의 상속 능력을 이었는데, 공작가에서 그대로 놔둘 리가 없었다.
숨겨서 뒷일에 사용하든가 아예 망가트렸겠지.
* * *
'으악! 살살 좀 해요!'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다.
내가 피하지 않아도 검은 내 몸에 닿지 않았지만, 이미지화한 진짜 그녀의 검은 마나가 길게 자라나 내 몸을 베어 가고 있었다.
만약 옆으로 몸을 피하지 않았으면 반으로 잘려 나갔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로 검을 휘둘렀지만, 카트린은 슬쩍슬쩍 방패를 대는 것만으로도 내 검을 막아 내고 있었다.
그녀가 들고 온 방패는 유적에서 찾은, 마나로 확장이 되는 방패였다. 검과 닿지도 않았지만, 마나로 확장되는 영역을 포함하면 검을 빗겨 낼 수밖에 없었다.
'젠장, 저 방패까지 쓰니까 실력 차이가 나서 못 해 먹겠잖아!'
나는 제대로 대련해 보자는 말을 꺼낸 덕분에 괜한 고생을 하는 중이었다.
제대로 된 대련이면 서로 제대로 된 무기를 사용한다는 의미였다.
다만, 실제로 마나를 뿜어낼 수는 없었다. 마나를 뿜어낼 수 없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검과 방패에 마나를 실었다가는 주변에 피해를 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대신 마나로 확장된 검 길이를 이미지화하고 마찬가지로 방패의 확장도 머릿속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으로 무언의 약속을 한 뒤 대련을 시작했다. 서로 충분히 능력을 보았으니, 이미지 잡기도 쉬웠고.
다만, 마나를 싣지 않으니 움직임도 느려 터질 수밖에 없었다.
여태까지의 훈련 덕분에 기사급의 움직임은 어느 정도 가능해졌지만, 마나를 활용할 수 없으니 이리저리 몸을 날리는 생난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잠깐만 마나를 쓰지 못해서 맨몸뚱이를 움직이는데, 전용 무기까지 고려한 검기의 길이를 이미지화한다고?'
잠깐, 이거 뭐가 잘못된 것 같은데.
분명 이건 앞뒤가 맞지 않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