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제18편 수업 첫날 (1)
알지도 못하는 제1 왕자, 제2 왕자의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고, 나와 연관된 사건이라면 공작가를 빼고는 서자 문제로 박살이 난 이에로 후작가 밖에 없었다.
뭐, 관련이 없다고 결론이 나더라도 이곳이라면 심문이나 마법을 쓰든지 해서 테러는 밝혀낼 테니, 그때 가서 잘못 알았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이에로 후작가 건? 제국 쪽인가?"
역시, 알고 있었다. 하긴 공주를 도와 달라면서 내 일을 알아보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뭐, 관계는 없겠지만.
"공주가 계신 입학식장에 같이 있다는 것이 위험해 보여서요. 잘못했나요?"
만약을 대비해서 살짝 발도 빼 보고.
"아니, 잘했네. 여기서 기다리게. 내가 확인해 보지."
그는 바로 다른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직접 진료실로 향했다.
자, 그럼 어떻게 되려나.
나는 자리에 앉지 않고 뒤에 서서 입학식을 구경했다.
식순이 진행됐고, 신입생 선서도 지나갔다.
피아르도 훌륭하게 선서했다.
시간이 흘렀다.
중간에 진료실 쪽에 소란이 일었고, 입학식이 끝나기도 전에 메시지가 눈앞에 떠올랐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 * *
진료실에 누워 있던 여강사는 깨어나자마자 자살했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메시지가 눈앞에 뜬 바로 그 시점이었다.
반복되는 죽음이 멈춘 것은 기뻤지만, 범인의 자살은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면, 이런 식의 아쉬운 결말은 그 뒤 죽음의 위기가 계속 닥쳐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뒷일은 뒷일이고.
지금은 죽음의 고통이 멈춘 사실에 감사해야 할 때였다.
여강사의 자살은 생각보다 훨씬 조용히 묻혔다.
입학식은 정상적으로 끝이 났고, 여강사는 조퇴 후 퇴직한 것으로 처리된 모양이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왕실 담당자들과 학원 관계자 몇몇만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도 내가 알려 준 진실만.
그렇게 입학식이 끝나고, 빠른 뒤처리 뒤에 나는 카트린의 호출을 받아 그녀의 교수실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카트린과 여강사의 자살을 지켜본 수석 기사가 있었다.
카트린의 교수실은 상당히 깔끔하다 못해 삭막하기까지 했다.
벽에 검 몇 자루가 걸려 있었고, 책상과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짓에 남은 의자에 앉아 카트린과 수석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아이샤 공주의 호위 미팅이나 대책 회의라고 여기면 되려나.
"일어나자마자 추궁을 하려고 했는데, 눈치를 채고 바로 독약을 깨물었습니다."
수석 기사의 말에 카트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누가 사주를 했는지를 파악 못 한 건가요?"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아쉽게 되었네요. 오랜만에 찾은 끈이었는데."
아쉬워하던 카트린이 이번에는 나에게 물었다.
"혹시 다른 의심스러운 사람은 없었나요?"
카트린의 말에 나는 고심에 잠겼다.
하지만, 처음 생각을 바꾸지는 않았다.
"네. 그 여자도 우연히 기억한 것뿐이었습니다. 솔직히 확신도 없었고요."
바로 폭탄이 되었던 두 학생을 숨긴 것이다.
물론, 희생자에 불과한 어린아이들을 지키자는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미끼를 남겨서 끊어진 끈을 다시 이어 보자는 생각도 그리 크지 않았다.
숨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두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후작 영지에서 둘을 보았다는 것도 말이 안 되었고, 두 학생과 여강사가 만난 모습을 본 적도 없으니 둘 사이를 연관지을 방법도 없었다.
두 학생이 폭탄이라는 것을 밝히려면 결국 내 능력을 드러내야 하는데, 나는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보면, 위기 상황 종료는 동일 조건으로는 반복되지 않았다.
적어도 '당장'은 두 학생이 터져서 죽음이 반복되지는 않을 터이니, 뭔가 알아볼 시간은 충분했다.
조금 위험한 생각이긴 하지만, 내 비밀을 지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아카데미 교사 제복을 입고, 머리를 말아 올린 카트린은 용병 때와 달리 성숙하고 멋진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전생이었으면, 보자마자 전화번호를 물어봤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바로 딱지를 맞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나이가 어려져서 그런지 그녀에게 반하거나 그런 느낌은 전혀 없었다.
새로 태어난 뒤에 취향이 변한 걸까…….
어쨌거나 카트린과 수석 기사는 내 말에 아쉬운 표정이 되었다.
"그렇다면 죽은 여자에 대한 조사는 더 해야겠지만, 나머지 조사는 이대로 마쳐야겠군요. 아카데미 측에서도 부담을 느끼는 것 같고요."
카트린의 말대로, 결국 입학식 사건은 이렇게 끝나게 될 것 같았다.
죽기 전에 보았던 입학식 테러였다면 학원이 아니라 왕국 전체가 발칵 뒤집힐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여강사 한 명이 자살한 일일 뿐이었다.
그것도 공식적으로는 묻혀 버린 일이고.
좀 더 과거까지 되돌아갈 수 있었으면, 숨겨진 놈들을 더 끄집어낼 수 있었을 텐데.
이번에는 무척이나 아쉬운 결말이었다. 아니, 아직 결말이 난 게 아닐 수도 있었다.
"수고했어요. 본인도 입학생인데, 공적인 일로 고생했어요."
카트린의 말에 수석 기사는 고개를 끄덕였고, 카트린은 나를 보며 무척이나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저건 아무리 봐도 공주의 호위를 잘 골랐다는 표정이었다.
예상보다 큰일에 휘말리게 되어 곤란한 점도 있었지만, 반대급부로 카트린이나 수석 기사의 신임을 얻게 된 것은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거기다 이렇게 되면 나도 작은 대가를 요청해도 될 듯했다.
"조금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 * *
입학식이 끝나고 다음 날, 나는 아카데미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른 학생들은 입학식 날 기숙사에 들어갔지만, 나는 여강사 자살의 뒤처리 문제로 이리저리 불려 다니느라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늦을 수밖에 없었다.
왕립 아카데미에는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모든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수도에 집이 있어서 등하교를 하는 학생도 있었지만, 전생의 교통 시스템처럼 빠른 운송 수단이 없었기에 대다수의 학생들은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길게 이어진 3층짜리 건물들. 남녀로 나누어진 기숙사 건물들은 전생에 보았던 대학교 기숙사보다 훨씬 크고 고풍스러웠다.
뒤처리로 다음 날 있었던 오리엔테이션도 건너뛰게 된 나는 저녁 식사 후에 기숙사 건물로 들어가게 되었다.
오랜 역사가 느껴지는 넝쿨 담을 지나, 고풍스러운 문을 통과한 뒤에 예상보다 깨끗하게 보수된 계단을 올랐다.
"1동 3층 끝에서 두 번째 방이라."
애매한 시간이어서인지 지나가는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직 서로 얼굴도 익숙하지 않았으니 지나가는 학생들끼리 슬쩍 눈인사만 주고받을 뿐이었다.
이것도 며칠만 지나면 온갖 편견에 휩싸인 시선들로 바뀌겠지.
3층에 올라 긴 복도를 지나고 알려 주었던 방 앞에 섰다.
짐이야 미리 보낸 뒤였으니, 나는 빈손으로 문을 두드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2인 1실.
어제 먼저 입실한 학생이 나를 보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레시아?"
"안녕. 피아르."
나를 보고 눈을 끔뻑이는 신입생은 입학식 때 신입생 선서를 한 평민 대표이자, 나를 몇 번이나 죽게 했던 자살 테러 폭탄범이었다.
"여기는 무슨 일로?"
"무슨 일이긴. 저기 내 가방이 있잖아. 나도 이 방에 배정된 거지."
"그럴 리가……. 난 평민이고……."
말을 하다가 피아르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역시 이틀 만에 내 신분이 탄로 난 건가. 하긴 죽기 전에도 옆자리에 있던 귀족 신입생 대표가 바로 알아차렸으니 이번에도 금방 알 수 있겠지.
그동안 소문이 안 난 게 아니라 얼굴을 못 알아본 모양이었다. 편견에 찌든 눈을 보는 게 더 빨라지겠군.
"내가 귀족이긴 하지만, 서자잖아. 영지에서는 그래도 대우해 주던데 이 수도에서는 어림도 없는 모양이야."
"어……. 그런가……."
피아르는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우물쭈물했다.
어림없기는.
나는 공작가의 자제였다.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평민하고 같은 방을 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아이샤 공주의 라인까지 탔는데.
당연히 이 방을 같이 쓸 이유가 없었으나, 피아르와 방을 같이 쓰게 된 것은 내가 카트린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뭐 서자에다 여러 가지 경험을 해 보고 싶고 어쩌고 거짓말을 하면서 열심히 카트린을 설득한 덕분이었다.
폭파 스위치가 없어졌다고 폭탄을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여강사는 죽었지만, 피아르와 그의 사촌 누이는 꼭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애매한 마무리는 결국 또 다른 죽음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원인을 찾든가, 찾지 못하면 폭탄을 없애 버려야 다음번 죽음이 찾아오지 않게 될 것이다.
놀란 피아르를 뒤로하고 나는 침대에 놓여 있는 짐들을 정리했다.
짐들이 꽤 많았지만, 다행히 방이 상당히 컸다.
이층 침대도 아니었다. 가운데 창문이 있고, 양쪽 벽으로 침대가 두 개에 책상 둘.
벽장도 각각 따로 있었고, 세면실과 화장실은 하나였지만, 지내기에 불편함은 없어 보였다.
뭐, 지금 공주가 지내는 곳처럼 방 여러 개에 거실과 응접실까지 딸려 있는 호텔 스위트룸 같은 곳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작은 원룸 이상이었다.
평민인 피아르는 당연히 불편할 것 같지 않았고.
대충 짐을 정리하고, 세면을 한 뒤에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때까지 피아르는 긴장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얼굴도 창백한 것이 방 배정을 한 누군가를 무척이나 원망하고 있는 듯했다.
그 덕분에 카트린은 무척이나 오래 살 것 같았다.
어쨌거나 덕분에 대화를 나누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자, 그럼 슬슬 말이나 붙여 볼까.
"내일부터 정상 수업이지?"
"아, 오늘 오리엔테이션 나오지 않았더라……요?"
"일이 있어서."
"어……. 그래……요."
말을 놓을지 말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불쌍해 보였지만, 그냥 놔두었다. 고의로 날 죽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고생을 한 것을 생각하면 그와 좋게좋게 지내 줄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음, 그러고 보니 같은 방을 쓰려는 이유가 또 있었군.
어깨를 으쓱하고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는 행정 학부지?"
"공자……는 상속 능력 학부인가……요?"
"아니, 기사 학부."
"기사 학부?"
피아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놀랐는지 존댓말도 붙이지 못했다.
아카데미는 크게 3개의 학부로 나뉘어 있었다.
방금 말한 기사 학부와 행정을 가르치는 행정 학부. 그리고 상속 능력을 훈련시키는 상속 능력 학부.
물론 왕립 아카데미는 상속 능력을 각성한 학생이 대부분이지만, 상속 능력이 모두 유용한 것은 아니었다.
전임 왕령 행정관이 가지고 있었다는 완전 기억 능력이라는, 행정에 어울리는 상속 능력도 있었고, 내 능력처럼 기사에 어울리는 능력도 있었다.
물론, 피아르가 놀란 것처럼 귀족, 그것도 대귀족들은 대부분 상속 능력 학부를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