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64화 (64/563)

제64화

제14편 테러 (1)

"……그리하여 왕립 아카데미를 졸업한 수많은 졸업생은 수백 년 동안 왕국과 왕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왔습니다. 여러분도 최선을 다해 교육에 임하여 앞서 졸업하신 부모님과 선배의 뒤를 이어……."

전생에 보았던 영화나 만화에서는 고깔모자를 쓴 백발의 할아버지가 학장으로 나와 멋진 연설을 하곤 했는데, 아쉽게도 이곳 학장은 그런 멋진 노인이 아니었다.

대충 아랫배가 나온 중년과 노인의 중간쯤 되는, 지쳐 보이는 남자가 이 학원의 학장이었다.

수도에서 꽤 유명한 귀족이라는데, 딱 봐도 전형적인 낙하산 관료가 분명했다.

지금도 무척이나 졸린 연설을 끝없이 계속하고 있었다. 만약 연무장에서 연설했다면, 벌써 수십 명의 신입생이 기절했을 정도의 기나긴 연설이었다.

학생 일부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고, 옆에 앉아 있는 꼬맹이 공주님도 허벅지를 꼬집는 것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다.

꽤 시간이 흐른 뒤, 학장의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은 학장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모두 긴 연설이 끝났다는 사실에 크게 감동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교사의 소개가 이어졌다.

공통 교과인 역사, 예절 교사로 어딘가의 현자가 나와 인사를 했고, 체육인지 교련인지 모를 과목의 교사로 왕실 기사가 등장한 뒤에 각성 능력 훈련을 위한 선생들이 인사를 했다.

딱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남녀들이 나와 자기소개를 했다.

어딘가의 자작가, 남작가 출신의 교사들이 인사를 한 뒤, 잘 아는 얼굴이 나와 인사를 했다.

"육체 각성 담당인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님이십니다."

사회자의 소개에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텐하마르 백작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백작가가 공주의 외척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내 옆에 앉은 공주에게로 향했고, 공주 주변을 훑었다.

공주 주변에 마누엘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눈을 빛낸 사람도 많았지만, 나를 보고 의아해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또 쏟아졌다. 죽겠다. 제발, 빨리 끝나라.

당장은 자살도 물 건너갔으니, 입학식이나 빨리 끝나길 빌 뿐이었다.

그 뒤에 신입생 대표 선서도 있었고 기타 등등의 순서도 있었지만, 나는 멍하니 입학식이 어서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던 입학식이 드디어 끝났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학생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목 뒤로 소름이 쭉 돋았다.

"마기가!"

연설 뒤에 멍하니 앉아 있던 학장이 외쳤고, 강단에 서 있던 선생들 중 몇몇이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놀란 고함이 들려왔고, 뒤쪽에서 마나가 치솟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카트린이 우리, 아니 공주를 향해 몸을 날렸고, 나도 반사적으로 마나를 일으켰다.

'뭐지?'

마나를 일으킨 순간, 소름이 돋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당 안은 이상한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나와 다른, 아니 마나를 이상하게 변형한 것 같은 기운이 이 홀 안에 가득 퍼져 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별다른 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학장이 고함을 지르고, 카트린이 몸을 날리고, 내가 마나를 일으키는 순간.

콰아아아아앙!

홀에 가득 찬 기운이 터져 나갔다.

환한 빛이 홀을 가득 메웠다.

빛이 열로 바뀌었다. 열폭풍이 홀 안을 가득 메웠다. 날아오던 카트린의 표정이 바뀌는 게 눈에 보였다.

공주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뭉그러졌다.

온몸이 찢겨 나가는 느낌과 불태워지는 느낌.

'이 안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겠네.'

마지막 순간, 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그리고 어둠. 이어진 빛.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눈을 뜨자 작은 공주마마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나는 막 입학식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 만들어진 '자동 저장 시점.'

'되살아난 건가?'

깨닫는 순간,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손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문턱에 멈춰 서서 벽을 짚었다.

"X발, 엿 같네."

오랜만에 한국말로 욕이 터져 나왔다.

죽을 때 느꼈던 끔찍한 고통의 여파가 지금도 내 정신을 온통 뒤덮고 있었다.

평범하게 죽지 못한 탓이었다.

다행히 앞서 가던 공주와 마누엘은 눈치채지 못했고, 공주의 수행원과 집사는 그냥 지나가라는 내 신호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따라갔다.

다행이었다. 무시 받는 상황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문 안으로 들어간 뒤에, 벽에 기대어 서서 큰 숨을 몰아쉬었다.

어차피 환상통. 정신적인 고통일 뿐이었다. 최대한 빨리 가라앉히고, 지금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그동안 죽으면서 나름 터득했던 방법. 큰 숨과 함께 마나를 작게 돌렸다.

조금씩 가라앉는 통증. 가라앉는 것인지 익숙해지는 것인지 구별이 잘 안 되었지만, 어쨌거나 슬슬 견딜 만해졌다.

정신을 차리니, 다시 욕이 나왔다.

몇 시간 전에 만들어진 황당한 저장 시점 덕분에 죽는 시점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지금은 무슨 일인지, 어떤 상황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자연재해? 폭탄? 실수? 실험? 테러?'

당장은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이 건물 안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여기를 벗어나면…….'

거기까지 생각을 이어 가다가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나 혼자 일을 피하고, 홀 안에 있던 사람이 모두 죽게 되면.

'그 뒤의 끔찍한 상황을 나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거겠지.'

마누엘이 죽고, 수많은 귀족과 귀족 자제들이 죽고, 아카데미 최초의 대형 폭파 사태까지.

거기다 제일 큰 문제는 조금 전 공주가 이 안으로 들어간 거였다.

내가 왕비에게 불려가 공주와 만났다는 걸 왕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왕비는 그렇고.

그런데 나 혼자 살아남게 되면.

아주 당연하게 왕족 살인 혐의가 씌워질 것이다.

공작가도 엉망이 될 테고, 혐의가 풀리더라도 의심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잘해야 암살, 나쁘면 교수형이겠지.

'제길, 도망가는 건 포기.'

최악의 상황에서도 공주는 살려서 데리고 나와야 한다.

아니, 마누엘도 살려야 하고.

카트린도…….

하아, 그냥 폭발의 원인을 찾아 막는 게 더 쉬울 듯했다.

혼자 도망 나오는 것은 최후의 수단. 우선 원인을 찾아야 했다.

동시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죽지 않고 넘어가기는 어렵겠지."

한 번에 끝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 * *

입학식장을 터트린 이상한 기운. 분명 마나와 비슷한 기운이었다.

'학장이 제일 먼저 알아차렸지.'

평범한 꼰대 중년처럼 보였는데, 그래도 학장을 할 만한 능력을 가진 모양이었다.

비슷하게 나도 알아차렸고.

하지만, 마나를 끌어올리기 전에는 그저 뒷목에서 소름이 돋았을 뿐이었다.

'마나를 끌어올리면 느껴진다라…….'

너무 늦게 끌어올려서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미리부터 마나를 끌어올리고 있으면 되잖아.'

오, 바로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가짜 천재이긴 하지만, 역시 머리가 나쁘지만은 않은 듯했다.

"괜찮으세요?"

조금 늦게 공주의 옆에 앉으니 공주는 내 얼굴을 보고 작게 말했다.

아무래도 얼굴이 꽤 굳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양손으로 한 번 쓰다듬고.

"조금 긴장한 모양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주었다.

내 말에 마누엘은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지만, 무시하고 조금씩 마나를 끌어올렸다.

너무 끌어올리면 기사나 귀족들이 시끄럽게 굴 테니 조금씩 작게.

그렇게 마나에 신경을 쓰는 사이, 식이 시작되었다.

여러 식순이 지나고, 교장의 훈시가 끝난 뒤 교사 소개.

여러 교사에 이어 카트린이 앞으로 나오는 순간.

턱.

내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움찔.

누구? 기척도 못 느꼈는데?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이어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주의 사항 못 들었나요? 훌륭한 운용 능력이지만, 입학식 중에 사용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납니다. 알렉스 학생 벌점입니다. 입학식에 벌점이라니 무척이나 드문 일이군요."

작은 목소리였다. 평범한 목소리였지만, 듣는 나는 소름이 돋았다.

말에 힘이 담겨 있었다. 능력자인지 기사인지 모르겠지만, 분명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학생에게 벌점을 줄 수 있는 사람, 선생이 분명했다.

교사들과 학장이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카트린까지.

음, 찍혔다. 확실히 찍혔다.

이런 미약한 마나를 느낄 수 있는 교사가 있다니, 의외로 이 아카데미는 무시무시한 곳일지도 모른다.

마누엘이 혀를 찼고, 공주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 일이 잘되든 말든 다시 시작해야 할지도.

나에게 주의를 주었던 선생이 떠나갔다.

그는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었는지 강당 귀퉁이로 가서 따로 서 있었다.

금발 머리를 한 평범한 30대 남자였다.

궁금한 사람이 한 명 더 나왔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는 조금 더 약하게 줄인 뒤 다시 마나를 끌어올렸다.

금발 머리 선생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게 바로 눈에 들어왔다.

음, 잘하면 입학식 끝나고 바로 퇴학당할 수도 있을 듯했다.

그래도 다시 이쪽으로 오지는 않았다. 주의를 한 번 주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시 와서 경고할 정도는 아니었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이번에는 죽기로 작정한 상황이었다.

'엄청 아프던데.'

다가올 고통에 인상을 쓰면서 나는 사방을 살폈다.

마나의 움직임. 사람들의 모습.

시간이 흐르고, 결국 다시 죽었던 시간이 다가왔다.

"이상으로 왕립 아카데미 입학식을 마칩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는 순간.

찾았다.

나는 폭발을 일으켰던 이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 * *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공주의 뒷모습.

다시 한번 죽음에서 돌아왔다.

나는 벽에 기대 숨을 들이켰다.

'앞으로 몇 번 더 반복하면 정신이 버티질 못하겠는데.'

죽을 때의 고통이 너무 크고, 간격이 너무 짧았다.

겨우 두 번 만에 한계를 느꼈다. 앞으로 한두 번만 더 지나면 죽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쓸모없는 죽음은 아니었어.'

폭발이 일어나기 조금 전, 폭발을 만든 기운이 시작된 곳을 알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곳이었고, 이 세상이 전생과 다른 세상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꼈던 순간이었다.

후유, 조금씩 통증이 가라앉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상하다는 얼굴로 나를 지켜보는 몇 사람. 하지만 사람들 대부분은 내게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럼, 움직여 볼까.'

몸을 바로 세운 뒤 표정을 숨기고, 공주와 마누엘이 앉아 있는 자리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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