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제12편 왕궁 (2)
어쨌거나 미안한 얼굴로 사죄를 하는 카트린의 모습은 용병 때의 모습과 달리 무척이나 여성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마치 이 모습이 원래 그녀의 모습인 것처럼.
더구나 그녀가 왕비를 대하는 모습은 언니와 동생이 아니라 엄마에게 칭얼대는 딸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치 가족과 다과를 나누는 모습처럼 편안해 보였다.
너무 편한 모습이었을까. 왕비가 그녀를 살짝 혼냈다.
"이 녀석아, 네 나이가 얼마인데 손님 앞에서 그런 모습인 거냐."
왕비의 꾸지람에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요. 손님이 아니라 같이 싸운 동료예요."
"흐음, 생각보다 더 친한 모양이구나."
왕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번 나를 살폈다.
덕분에 나른했던 신경이 바짝 조여졌다.
왕비의 관심이라니, 이건 이것대로 무척 곤란했다.
그냥 후원만으로 끝나면 좋을 텐데, 꼴을 보니 그렇게 끝날 것 같진 않았다.
차라리 신나게 싸우는 쪽이 편해 보였다.
칼에 목이 잘려 나가면 다시 시작하면 그만이지만, 이런 정치적인 관계는 잘못했다가는 다시 시작도 못 하고 고생만 죽어라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일은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게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잖니."
그녀는 아직 어려 보이는 나를 보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내 모습을 보면 그동안의 일을 믿기가 어려울지도.
하지만, 그래서 더 후원할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그렇다고 카트린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에요. 공자가 카트린을 도와준 것은 무척이나 고맙게 생각해요. 카트린뿐만 아니라 라텐하마르 백작가에 큰 도움이 되었어요. 백작가의 일원으로 감사드려요."
확실히 그녀의 선조가 남겨 둔 유물을 같이 찾아 주었으니 감사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나도 그 덕분에 꽤 많은 보상을 받았기에 지금의 감사가 당연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꽤 이상한 단검도 받아 버렸고.
쩝, 그 이상한 단검은 뭔가 대단한 듯이 말까지 꺼내 놓고 지금까지 잠잠한 상태였다.
원래 그때 말하고 끝나는 거였는지 아니면 뭔가 새로운 계기가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꽤 시간이 지났는데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다행히 단검의 능력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닙니다. 카트린. 아니, 카트리네 영애에게 충분한 보상을 이미 받았습니다."
"오, 카트린이라. 정말 공자가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네요."
왕비는 여동생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카트린은 어깨를 으쓱였고.
그런데 여기는 분명 왕궁의 왕비 앞인데,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돼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자꾸 긴장이 풀려서 걱정되었다.
"그건 카트린과 집안이 드리는 보상이고, 이 후원은 제가 따로 드리는 보상으로 생각하면 될 겁니다.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돼요."
부담이 더 되는데요. 더구나 보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엮일까 봐 더 걱정될 지경이었다.
하지만, 왕비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저 감사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소소한 이야기.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카트린과 함께 모험을 한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왕비는 훌륭한 청취자였고.
"그런 일이 있었군요. 카트린이 해 준 말은 정말 딱딱해서 무슨 보고서를 듣는 줄 알았다니까요."
나는 꽤 괜찮은 이야기꾼인 듯했다.
그렇게 담소가 끝나 갈 무렵, 왕비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에는 무엇을 할 생각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갑자기 진로 문제라니, 난데없이 검에 푹 찔린 기분이었다.
곤란했다.
솔직히 여러 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그 계획들을 여기서 꺼낼 수는 없었다.
질문을 꺼낸 왕비의 입은 지금도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는 중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 질문은 후원자가 후원받은 사람의 미래를 걱정해서 꺼낸 말이 아니었다.
분명 정치적인 내용이 다분히 들어간 질문이었다.
옆에 있는 카트린은 조금 난감한 얼굴이었고.
아무래도 내 뒷조사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카트린에게 너무 내 능력을 보여 주었는지도.
아직 14살 어린 소년이었는데, 두 여성이 나를 보는 모습은 분명 성인을 대하는 듯 했다.
어린 척하는 것은 이미 글러 버린 것 같고.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졸업한 뒤에는……."
똑똑.
그런데 말을 채 이어 가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인가? 그런데 왕비가 이야기 중인데, 문을 두드린다고? 대체 누구지?
"공주마마 오셨습니다."
메이드의 말과 함께 문이 열렸다.
문을 여니 꼬마 숙녀가 보였다. 10살 안팎의 작은 인형 같은 소녀.
그녀는 방 안에 카트린이 있는 것을 보고 환한 미소를 띠었다가 내가 있는 것을 보고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그녀는 양손을 모으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어마마마, 아이샤가 왔어요."
그녀는 왕비를 향해 인사를 올렸고, 왕비는 그녀에게 말했다.
"어서 오렴. 소개할 사람이 있어서 불렀단다."
분명 공주마마가 들어온다고 했고, 왕비의 딸 이름이 아이샤였으니.
지금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은 분명 손이 귀한 이 나라 왕의 세 번째 자식이자 승계 서열 3번째인 아이샤 공주가 분명했다.
나를 공주에게 소개한다고? 도대체 왜? 뜻밖의 상황에 눈을 끔벅일 수밖에 없었다.
공주도 어리둥절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왕비가 말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주에게 기사식으로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주마마.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음, 이번에는 안 더듬거렸다.
"아이샤 데 카를로스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그녀도 드레스를 손에 잡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어린 소녀의 앙증맞은 인사는 무척이나 귀여웠다. 음. 뭔가 힐링이 되는 기분이었다.
"후후, 그림으로 남겨 두고 싶은 모습이네요."
공주와 내가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왕비가 작게 웃었다. 카트린도 옆에서 미소를 지었고.
음. 공주만 아니라 내 쪽도 아직은 귀여워 보이는 걸까. 뭔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아이샤 각성일이 얼마 안 남았어요."
분명 공주가 10살이었나. 아무래도 왕가의 각성 일은 우리와 다른가 보다.
아니, 그런데 공주의 각성과 나를 소개시키는 것은 무슨 상관인 거지?
왕비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 각성일이 남았고, 어린 나이이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겠지요. 그래서 이번에 아이샤도 아카데미에 들어갈 예정이랍니다."
"아카데미 말입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어린애가 내 동기라고? 꼬맹이잖아! 나하고 나이 차가……!
어라, 몇 살 차이가 안 나잖아.
분명 꼬맹이가 분명한데. 아니, 아니, 따지고 보면 나도 아직 꼬맹이인가.
그렇게 보니 키 차이도 그리 나지 않는 것 같고.
맙소사, 주변에서 하도 성인 취급을 하니 나도 헷갈렸다!
그런데 이런 꼬맹이들과 같이 수업을 받게 되는 건가?
아니, 전생에서도 현대 사회가 아니었을 때는 여러 나이대가 같이 수업을 받는 게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렇게 실제로 눈앞에 보니 난감할 따름이었다.
어라, 그럼 우리 마누엘 형님도 이 꼬맹이 공주님과 같은 신입생인 건가?
오! 난감한 쪽은 나보다 형님이 훨씬 심하겠군.
"같은 신입생이니, 공자가 우리 딸을 잘 돌봐 주세요. 아직 어린아이랍니다. 왕궁에서만 자라서 무척 걱정된답니다. 같은 신입생으로 우리 아이를 잘 부탁드려요."
어느새 다가온 왕비가 내 손을 꼭 붙잡고 말했다.
식은땀이 쭉 흘렀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졸업 후 진로가 문제가 아니었다. 후원으로 정치적 입장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입학식 당일부터 큰일이었다.
이건 늑대를 피하다가 범 우리에 들어간 꼴이었다.
정신이 반쯤 날아가 버린 내 얼굴을 공주가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 * *
예상치 못한 만남에 충격을 받은 뒤 왕궁을 나오게 되었다.
카트린은 다음에 만날 때를 기대하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고민할 정신도 없었다.
저택에 돌아와서도 왕궁 방문이 궁금했던 마누엘이 자꾸 기웃거리고 관심도 주지 않던 저택의 고용인들이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놀란 마음을 다스리고, 다시 훈련하는 사이 왕립 아카데미 입학일이 되었다.
왕성에 다녀온 덕분인지 저택에서의 생활도 그리 나쁘지 않았고, 입학식에 가는 길도 마누엘과 같은 마차를 타고 갈 수 있게 되었다.
"너도 그레시아 공작가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니 공작가의 체면을 손상하는 짓은 하지 않도록 해. 이상한 이야기가 들려오면 바로 집에다 보고를 할 테니 제대로 행동해야 할 거야!"
마차를 타고 가는 길에 마누엘이 눈에 힘을 주며 나에게 말을 꺼냈다.
나름 주의를 주겠다고 말을 꺼낸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마냥 귀여울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받은 건 나뿐인지 같이 마차를 타고 가는 수도 저택의 집사는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는 수도의 남쪽으로 향했다.
수도의 중앙에 왕궁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여러 관청과 기사단, 그리고 귀족들의 저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도의 남쪽. 남쪽 외성과 맞닿은 넓은 부지에 왕립 아카데미가 자리하고 있었다.
왕립 학원 혹은 왕립 아카데미로 불리는 거대한 교육기관.
이곳은 대전쟁 이후 초대왕이 이 나라를 세운 뒤 제일 처음 만든 국립 기관 중 하나였다.
대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는 했지만, 아직도 세상에는 수많은 마물이 남아 있었고, 새로 시작되는 왕가의 기초를 세우기 위한 인력을 수급하기 위해서였다.
거기다 대전쟁을 승리로 이끈 용사들로부터 이어진 상속 능력을 체계적으로 교육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그럴듯한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기는 했다.
바로 신왕국의 귀족들과 지방의 호족들의 자식들을 인질로 삼기 위함이었다.
아내를 많이 두는 결혼 동맹이라는 방식은 상속 능력이 무분별하게 퍼져 나가기에 쓰기 어려웠으므로 인재 양성을 핑계로 자식들을 인질로 삼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카를로스 왕국만이 아니라 제국과 다른 왕국들도 대전쟁 이후에 우후죽순으로 수도에 아카데미를 만들어 귀족 자제를 입학시키고 있었다.
마차는 끝없이 이어진 높은 담벼락 옆길을 한참 동안 달려간 뒤에 마침내 왕립 아카데미의 정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넓은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정문으로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고급 마차들이 들어가고 있었다.
귀족이나 권세를 지닌 자들의 마차였다.
그 옆에 난 문으로 사람들이 걸어서 들어가고 있었는데, 의상이나 두리번거리는 모습으로 보아 평민들이 분명했다.
중세로 보기에는 상당히 발전한 세계이자 왕국이었지만, 상속 능력이라는 초능력을 기반으로 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모습이었다.
나도 각성을 하지 못했거나 쓸 만한 능력을 갖추지 못했으면 저들과 같이 갔을 테고.
아니, 그 전에 죽었으려나.
걸어서 들어가는 사람들은 경비병들이 한 명씩 철저한 검사를 했지만,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는 검문 없이 바로 통과했다.
우리가 탄 마차는 그레시아 공작가의 마차라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오히려 경비병들의 경례를 받으며 통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