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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61화 (61/563)

제61화

제11편 왕궁 (1)

"당장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남작 아들의 말에 집사가 조언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남작의 영지는 무척 멀었다.

"아침까지 준비할 수 있지?"

마누엘의 말에 집사가 대답했다.

"네. 준비해 놓겠습니다."

남작 아들은 마누엘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변고에 모두들 표정이 좋지 못했다.

고용인들은 빠르게 짐을 정리하고 내일 출발할 사람들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일행도 각자 정해진 방으로 움직였다.

저녁 만찬도 취소되었고, 남작 아들은 혹시 다른 소식이 없는지 밤늦게까지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렇다고 손님방을 줄 줄 몰랐네."

방을 둘러보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이곳은 왕국의 수도였다.

공작가의 영향력보다 공작부인의 집안인 란사로테 후작가의 영향력이 더 강한 곳.

서자인 내가 이런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근래 들어 본가에서 받은 취급이 나쁘지 않았기에 이런 취급이 새삼스럽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적진에 들어온 것에 가까울까."

충분히 각오한 일이었다.

이보다 더 심한 취급을 받아 죽기까지 한 게 한두 번도 아니었고.

방 안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발코니로 나갔다.

밤이 깊어 나름 보기 좋았던 수도의 야경도 깜깜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내일 출발을 위해 준비를 하던 고용인들도 모두 잠자리에 들었다.

다만 나 말고도 잠들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여태 안 자고 뭐 하세요?"

옆 테라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발코니 위로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작 딸, 발레아가 발코니에 서 있었다.

내 방이 손님방인 것처럼 옆방들도 손님방이었고, 공작가의 손님인 발레아와 그녀의 오빠가 묵고 있었다.

내 옆방은 발레아의 방.

내가 발코니로 나온 것도 그녀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수도에 온 탓에 흥분한 모양이에요."

내 말에 그녀는 묘한 콧소리를 냈다.

"전에도 느꼈지만, 말투로 보면 그 위치와 나이에 걸맞은 느낌인데, 눈과 말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은 영 딴판인 것 같더라고요."

지나가듯이 꺼낸 말은 정확히 핵심을 짚었고, 남작 영지에서 죽기 전의 일을 떠올린 나는 살짝 주먹에 힘을 주었다.

내 연기가 안 먹히다니.

'이대로 보내도 될까?'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영애께서도 잠을 못 이루시나 보네요. 남작님 일은 다시 한번 위로의 인사를 보냅니다."

이야기의 전환에 발레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긴 숨을 내뱉었다.

남작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슬픈 한숨.

하지만, 한숨 뒤에 나온 말은 전혀 달랐다.

"정말 아버지가 죽은 게 맞다면 정말 알맞게 잘 죽은 거예요."

나는 그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생전 처음 어이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다행히 마침 달도 구름에 가려 가라앉은 내 눈빛을 감춰 주었다.

"흥,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돼요.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지만, 이건 공자님에게 훨씬 더 좋은 일이니까요."

당연히 좋은 일이지. 내가 얼마나 힘들게 뛰어다녔는데.

하지만, 이 여자는 이런 이야기를 왜 나에게 떠들어 대는 걸까?

죽기 전 마지막에 보았던 그녀의 본모습은 반쯤 미친 것 같았는데. 설마 여기서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우울해 보이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환하게 변해 갔다.

"물론 나에게도 무척이나, 무척이나 좋은 일이에요. 알아요? 이제 나는 새로 시작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남작 딸이 아니라 발레아로 살아갈 수 있다고요."

그녀의 말은 겉으로 보기에는 부모의 압박에서 벗어난 귀족 딸이 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본뜻을 알고 있었다.

우리에 갇혔던 맹수가 우리를 벗어났다는 뜻이었다!

나는 꾹 쥐었던 주먹의 힘을 풀었다.

우리에서 풀려난 맹수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어요. 돌아가서 아버지가 죽은 것을 확인하면 그 전의 발레아를 지우고 새로 시작할 거예요."

이것도 본뜻은 전에 벌였던 범죄들의 증거를 없애 완전 범죄로 만들겠다는 뜻이려나.

거기다 그녀의 주변에 일렁거리는 마나는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리게 했다.

다행히 마나는 바로 가라앉았다. 환하게 피어오르던 미소도 사라졌고, 그녀는 우울한 얼굴로 돌아갔다.

"이런, 밤기운에 너무 떠벌렸나 보네요. 방금 한 이야기는 모두 잊어 주세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에 정신이 없었나 봐요."

자, 이럴 때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아, 네. 네. 저,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습니다."

나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과 함께 더듬더듬 대답했다.

내 모습에 그녀는 처량하게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그럼 먼저 들어갈게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나도 마주 인사를 했고.

인사를 끝으로,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내게 이런 말을 남기며.

"나중에 봐요. 가면을 쓴 작은 도련님."

발코니에 남겨진 나는 조용히 비어 있는 옆 발코니를 바라보았다.

난 정의로운 자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칼이 있었고, 수많은 악당과 광기가 있었다.

내가 알게 되었다고 그 모든 악당과 미친 자들을 처단할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저번 삶에 그들이 나를 죽였다고 다음 삶에 그들 모두를 찾아다니며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럴 거라면 처음 나를 죽였던 하녀들 모두를 찾아내 죽였어야 했다.

그리고 기대되었다. 남작이라는 조종자가 사라진 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에게 향한 칼이 아닌 이상, 저 광기가 어디로 향하게 될지 궁금했다.

그래서 난 그녀를 그냥 보내기로 했다.

나도 방 안으로 들어온 뒤 창문을 닫았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남작 아들과 발레아를 태운 마차가 길을 나섰다.

헤어지면서 남작 아들은 마누엘과 같이 아카데미에 다니지 못하게 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 돌아가면 그가 영지를 계승해야 했다.

영지 관리인을 따로 두고 아카데미에 입학해도 되겠지만, 당장 영지에 붙어 있어도 관리가 쉽지 않을 터인데 관리인을 두다니 어불성설이었다.

한편, 발레아는 어떻게 하려나.

그녀는 지금 마차에 앉아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딸의 모습을 열연 중이었다.

남작가에 돌아가 영지를 뒤엎을지, 아니면 따로 독립할지, 그것도 아니면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내 손을 떠난 일이었다. 그저 그녀가 내 앞을 가로막지만 말기를 빌 뿐이었다.

그렇게 남작의 자녀들은 수도를 떠났다.

수도까지 왔다가 다시 돌아가게 되는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남작가에 대한 일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마누엘과 이 저택의 사람들은 마누엘의 입학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예상대로 나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도 슬금슬금 끼어들어 아카데미 입학을 준비했다.

고용인들은 최대한 나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들도 공작의 고용인들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시키면 해야 했다.

그렇게 재미있는 은따 생활을 하던 와중에 사람이 찾아왔다.

왕실 문장이 새겨진 옷을 입고 온 집사였다.

놀랍게도 나를 찾아온 왕실의 집사였다.

"리아 카를로스 왕비께서 알렉스 님을 부르십니다."

이 말을 하는 집사의 표정이 처음과 달라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나를 아예 모른 척하던 집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행 부족이었다. 영지에 있는 총집사라면 표시도 안 났을 텐데.

어쨌거나 후원자님의 호출이었다.

나는 왕실 집사와 병사들의 뒤를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 * *

"……음. 멋, 멋있네요."

나는 마차 창밖으로 보이는 왕궁을 보고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대왕인 카를로스 왕께서 만드신 훌. 륭. 한 왕궁입니다."

내 말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왕실 집사가 사무적인 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왕궁이 멋있다든가 아름답다든가 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점점 크게 보이는 왕궁은 기사였던 초대왕의 취향이 담뿍 담겨 있었다.

왕궁은 거대하고 튼튼하며 멋대가리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는 제대로 된 전투용 성채였다.

물론 대전쟁을 겪은 초대왕에게는 제대로 된 전투용 성채가 필요했겠지만, 그 뒤로 왕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외적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 수도가 커지고, 외부의 습격이 사라진 뒤로는 수도에 지내는 대다수 사람은 흉물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는 왕궁의 모습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초대왕 때 붙여진 '기사의 성'이라는 이름은 지금에서는 일종의 자기비하로 여겨질 정도였다.

왕비의 손님이라는 거창한 이름 덕분에 내성에 들어선 뒤에도 마차에서 내리지 않고 그대로 후궁으로 향할 수 있었다.

내성 안에 있는 왕궁과 이어진 '숙녀의 궁'으로 불리는 세 번째 왕비의 저택은 본성과 달리 꽤나 아름다웠다.

마차에서 내려 왕실 집사의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아름다운 복도 그리고 양옆에 멈춰 서서 고개를 숙이는 고용인들.

내가 누군지 알아서 하는 인사가 아니라 왕실 집사 때문에 하는 인사겠지만, 공작가에서 받는 인사와 달리 조금 긴장이 되었다.

몇 번을 죽어 본 경험 덕분에 더 이상 긴장 같은 것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왕궁이 풍기는 기백은 범상치 않았다.

"어서 오세요."

안내를 받아 화려한 문 안으로 들어서자, 나를 반기는 음성이 들려왔다.

문 안의 응접실은 난생처음 보는 화려한 방이었다.

방 안에는 하녀들을 제외하고 두 명의 여성이 있었다.

살짝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성과 젊은 여성. 둘 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젊은 쪽 여성은 아는 얼굴이니, 나이 든 쪽이 왕비로 보였다.

젊은 여성 쪽은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이름을 몰랐을 땐 불새 사냥꾼이라고 불렀던 카트린이었다.

용병일 때도 예뻤지만 용병 모습이 아닌, 드레스를 입고 화장까지 한 모습은 바로 그녀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나는 카트린에게 눈인사를 한 뒤에 왕비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왕비마마.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오랜만의 풀 네임이라 조금 더듬거렸지만, 크게 이상해 보이진 않은 듯했다.

"리아 데 카를로스랍니다. 리아라고 불러도 돼요."

즐거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왕비는 내 인사에 답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이름만 부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녀는 앞쪽 소파에 나를 앉게 하고는 말을 이었다.

"카트린의 부탁을 받고 무척 놀랐답니다.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일이 없었거든요. 덕분에 공자를 무척이나 만나고 싶었답니다."

하기야 공작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정식 후계자도 아니고 서자를 후원해 달라는 부탁은 이상하게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당연한 결과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카트린이 미안한 표정으로 왕비와 나를 쳐다보았다.

"어쩔 수 없었어요. 공작 아들인데 제가 후원을 하는 것도 이상하고, 아버님께 말씀드리기도 어렵잖아요. 그러니 왕비님께 부탁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카트린의 언니였지만, 이 나라의 왕비를 언니라고 부를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리아라고 부르라니 농담이 너무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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