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제10편 수도
두서없이 늘어놓은 그의 말에 따르면, 공작부인은 이곳에 없었다.
공작부인이 그를 사주한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가 공작부인을 마지막으로 본 것도 아주 오래전이었다.
공작가 만찬에서 공작부인을 보고 반한 뒤, 공작부인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맹세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없어도 그녀에게 첫 번째 공작부인의 정보를 보내 주고, 선물을 보내고, 가족과 아내들은 버려두고 맹목적으로 그녀에게 매달렸다.
그녀도 감사의 답장을 보내긴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편지 어디에도 불륜을 이야기하거나 사랑을 속삭이는 내용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녀와 나의 사랑은 그런 천한 것이 아니야! 어린놈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점에 대해 말해 주었더니, 저런 소리나 외치고 있었다.
결국, 불륜 혹은 사랑에 빠진 유부남이 혼자서 벌인 일이었나.
왠지 한숨이 절로 나오는 결과였다.
물론, 남작 혼자 사랑에 빠졌을 리가 없었다. 공작부인이 그렇게 유도했을 게 분명했다.
다르게 생각하면, 정말 무서운 능력이었다.
자신에게 호감을 품게 하고, 그 호감이 계속 이어져 이런 일까지 벌이게 만들다니.
정치인으로 나섰거나 수도에 있었다면 나라를 발칵 뒤집어엎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집 귀퉁이에서 외로이 늙어 가겠지.
다행히 앞으로의 계획도, 수도에 가는 일정도 바꾸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설마 또 이런 인간이 나타나지는 않겠지.
"사랑하는 마리아, 내가 그대를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했어. 당신을 위해 준비한 아이도 있어. 그리고……."
그는 이제 반쯤 정신을 놓고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다른 연관자가 없으니, 이제 계획대로 마무리하고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남작이 놓친 검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검이었다.
나는 그 검을 횡설수설하는 남작의 가슴 깊이 꽂았다.
남작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숨이 끊어졌다.
나는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흐트러진 방을 배경으로 자신의 검을 가슴에 박아 넣은 남작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지막까지 멍한 얼굴로 초상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꽉 쥐었다.
전생이었으면 감히 할 생각도 못 한 일이었지만,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한 짓도 해야 했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꾸 손에 뭐가 묻은 것같이 느껴졌다. 옷에 손을 문질러도 닦이는 것 같지도 않았고.
한참 문지르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옷에 문지르고 있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역시, 아무리 외면해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수많은 죽음을 감당한 정신으로도, 이런 어린 몸으로는 충격이 없을 수 없었다.
그렇게 인정을 하니 떨리던 손이 멈추었다.
다행이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방 안을 더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초상화도 길게 검을 긋고 술을 뿌렸다.
그렇게 헤집고 난 뒤에 살펴보니, 방 안의 모습은 술 취해 난동을 부리다 자살한 사람의 방 모습 같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이상한 점들이 보이겠지만, 아마 그의 아내들이라면 그런 부분은 애써 외면할 게 분명했다.
뭐, 이상하게 생각해 파헤쳐도 상관없었다.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 야영하고 있을 어린 소년과 연관을 지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
뭔가 비싸 보이는 물건들도 바닥에 굴러다녔지만, 전부 무시하고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고, 지하 통로를 따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귀족 저택의 비밀 통로라면 분명 반대쪽은 저택 밖의 숨겨진 문이 있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달려 나가니, 예상대로 통로 끝에 위로 이어진 계단과 기관이 달린 철문 하나가 보였다.
계단을 올라가 닫힌 문을 살폈다.
바퀴와 판스프링으로 구성된 기관 문이었다.
생각보다 자주 사용했는지 문틈은 반들거렸고, 힘껏 바퀴를 돌리자 쉽게 문이 열렸다.
드르르릉.
문을 열고 위로 올라오니, 반쯤 허물어진 집 내부가 보였다.
아마도 버려진 집인 듯했다. 아니면 버려진 것처럼 위장했든가.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곳에 있었다.
드르르륵.
밖으로 나오자, 판스프링 덕분인지 문이 다시 닫혔다.
지하로 통하는 문은 무척이나 잘 만들어져 있었다.
철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다른 바닥과 구별하기 어려웠다.
거기다 내 힘으로도 밖에서는 철문을 열기가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다시 열 이유도, 열 필요도 없는 문이었다.
나는 집 밖으로 나갔다. 집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주변은 온통 무너진 집들뿐이었다. 마치 무슨 사건으로 이곳만 버려진 것 같았다.
아직 밖은 어두웠다. 해가 뜨려면 멀었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서둘러야 했다.
"가 볼까."
등에 검을 메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다시 달려 나갔다.
시간이 지나 해가 뜰 무렵, 나는 다시 일행이 머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계를 서는 병사 외에 모두 잠들어 있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멍하니 한쪽만 바라보는 병사를 피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나는 조용히 마차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차에 올라서려는 순간.
"이제야 오는 건가요?"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쯤 잠긴 소녀의 목소리.
남작 딸이었다. 그녀는 여행복 차림으로 마차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여태 안 주무신 겁니까?"
"사람이 안 돌아왔는데, 먼저 잠들면 예의가 아니죠."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에 그녀의 웃음이 환하게 빛났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의미 없는 웃음이었다.
공작부인처럼 사람을 홀리는 웃음도 아니었고.
"그런데, 설마 빈손으로 온 거예요? 사냥 잘한다고 했잖아요."
그녀는 내 모습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아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은 무척이나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예상보다 잡을 만한 것이 없더라고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숙영지 외곽에 던져놓은 물건을 다시 끌고 왔다.
질질질.
내 몸보다 몇 배는 큰 덩치를 끌고 오자, 경계를 서던 병사가 깜짝 놀랐다.
"앗! 그건 멧돼지 아닙니까?"
평범한 크기가 아닌 멧돼지의 모습에 병사는 호들갑을 떨었고, 담요를 덮고 자던 사람들이 모두 잠에 깨어 나와 내가 잡은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마차 앞까지 멧돼지를 끌고 온 나는 그녀를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겨우 한 마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다들 자고 있어서 밖에다 던져놓았죠."
내 말에 날카로웠던 그녀의 눈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무사히 돌아오셨으니 다행이에요."
안심했다는 말투였지만, 그 말속에는 헛일했다는 푸념이 느껴졌다.
병사들과 사람들은 내가 잡아 온 멧돼지를 보며 떠들어 댔고,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적어도 한 시간은 먼저 도착할 수 있었지만, 만약을 대비해서 잡아 온 것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도움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왜 남작의 딸은 잠을 자지 않고 나를 기다린 것일까.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 도련님이라면 그녀가 나에게 반해서 기다렸다든가, 혹시 천사 같은 마음으로 기다린 건 아닌지 착각하겠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추호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빤히 노려보았다.
* * *
뒤에 이어진 아침 식사 시간은 내가 가져온 멧돼지 덕분에 무척이나 활기찼다.
"아니, 이걸 잡느라 밤을 새웠다는 거야? 한심하기는."
예상보다 큰 멧돼지에 놀라긴 했지만, 마누엘은 언제나처럼 나를 무시했다.
당연히 나나 다른 사람들은 못 들은 척했다.
그런 모습을 손님인 남작가의 남매들은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마누엘은 투덜댔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
여행길 음식이 좋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힘쓰는 병사들이 잡은 멧돼지를 바로 해체했고, 멧돼지 고기는 아침 식사용 국에 들어갔다.
그렇게 아침 식사에 어울리지 않는 고깃국을 실컷 먹은 뒤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영지를 벗어나 수도를 향해서.
그렇게 수도로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나는 고민했다.
남작의 딸 발레아를 그냥 두어도 될지.
남작의 경우는 또다시 과거로 돌아가더라도 내게 해를 입힐 사람이었기에 그냥 놔둘 수 없었다. 하지만, 발레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위험해 보이는 성격에 가지고 있는 능력도 대단했지만, 남작이 죽은 이상 과연 내게 해를 입힐 사람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본인도 남작의 말을 듣고 싶어 하지 않았고.
하지만, 그냥 놔두기엔 찝찝했기에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수도에 도착할 때까지 그녀는 가면을 벗지 않았다.
그렇게 일주일 후 우리는 드디어 수도에 도착했다.
* * *
카를로스 왕국의 수도. 용사와 함께 마왕을 무찌른 카를로스 기사가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와 왕국을 세웠다는 도시.
그가 왕국을 세우기 전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지만, 카를로스 기사가 왕국을 세운 뒤, 이 도시는 그의 검의 이름을 따 '팔마'라 불리게 되었다.
우리 눈앞에는 커다란 성벽이 둘러쳐진 거대한 도시.
공작 영지가 있는 메세타 시의 몇 배나 되는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와……."
성문을 통과하면서 수도를 처음 와 본 병사들은 연신 감탄사를 토해 냈다.
남작 아들, 딸도 주변을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고, 마누엘 형도 눈동자만은 사방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나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생각보다 훨씬 큰 도시였다.
5층 이상의 높은 건물들과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마차들과 말들. 하지만, 길은 그리 더럽지 않았고, 냄새도 나쁘지 않았다.
왕국의 수도는 공작가 영지의 수도인 메세타보다 훨씬 번화하고 복잡했지만, 그래도 꽤 보기가 좋은 도시였다.
우리는 검문 없이 성문을 통과해 바로 주택가로 향했다.
공작이나 가문 사람들이 수도에 올 때 지내는 저택.
당연히 영지에 있는 집보다는 작았지만, 공작의 품위에 맞게 고급 주택가에 자리 잡은 고풍스러운 3층 저택이었다.
저택 앞에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집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와 메이드 복장의 하녀들이 문 앞에 나와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그들은 마누엘을 향해 고개를 숙였지만, 막상 인사 다음에 꺼낸 말은 마누엘이 아니라 남작의 아들에게 전하는 말이었다.
"연락 마법으로 남작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당장 돌아오시라는 전갈입니다."
그는 남작 아들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다.
수도 마탑 문양. 마법 통신문이었다.
남작 아들은 편지를 열어 본 뒤, 눈살을 찌푸렸다. 황당한 얼굴, 그리고 어쩔 줄 모르는 표정.
"무슨 일인데요?"
여동생이 묻자, 그는 편지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발레아는 편지 내용을 확인한 뒤에 나지막이 감탄사를 터트렸다.
"오! 아버지가 돌아가셨대요."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슬픔이 가득했지만, 난 그 전에 들은 감탄사를 기억하고 있었다.
기쁨이 섞인 감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