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59화 (59/563)

제59화

제9편 비밀 (2)

책장 뒤에 있는 비밀 통로라.

"전형적이라면 정말 전형적인 곳이긴 한데……."

나는 양쪽의 책장을 잡고 슬쩍 밀어 보기도 하고, 당겨 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과 달리 책장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분명 숨겨진 스위치 같은 것이 있을 텐데…….

뒷일을 생각 안 한다면 그냥 부숴 버리면 그만이지만, 지금은 최대한 조용히 움직여야 했다.

나는 책장을 신중하게 살펴보았다.

철학서들과 역사서 같은 딱딱한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거기다 전부 집에 있을 때 읽어 본 책들이었다. 남작의 개인 서재에 있는 책들은 공작이 자랑하는 장서에 감히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렇게 쭉 책들을 살피던 나는 한참 아래쪽 책 제목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책이 왜 여기 꽂혀 있는 거지?"

우리 왕국의 초대왕이자 공작의 선조이기도 한 [기사 카를로스의 일대기] 전집 옆에 엉뚱한 책이 꽂혀 있었다.

[카를로스 기사의 귀환]

제목만 보면 일대기의 한 부분처럼 착각할 만한 책이었지만, 이 책은 분명 카를로스 기사의 사랑 이야기가 적혀 있는 소설이었다. 일종의 팬픽이라고 할까.

초대왕에 대한 애정 소설이라 당연히 공식적으로 금서로 지정되어 있어 알아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창고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로 굴러다니던 책을 보았기에 알아본 것이었다.

"아무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소설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살짝 책을 잡고 조심스럽게 당겨 보았다.

철컥.

역시, 책은 뽑혀 나오지 않았고, 책장 뒤쪽에서 무언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책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기대 어린 눈으로 책장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한참 동안 책장은 변화가 없었다.

"분명 영화 같은 데서는 책장이 쫙 하고 열리고 비밀 통로가 나타나던데."

그 책이 스위치 같은 게 아니었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책장으로 다가가 책장을 움직여 보았다.

스르르.

그런데 어이없게도 책장은 조금 전과 다르게 부드럽게 옆으로 밀려 나갔다.

아쉽게도 이 서재에 있는 비밀 문은 자동문이 아니었다.

뭔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열린 책장 뒤로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불빛이 없어 깜깜한 계단이었지만, 눈에 마나를 밀어 넣으니 내려가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였다.

발소리를 줄이고, 조용히 계단을 내려갔다.

저벅, 저벅.

아래로 내려가던 계단은 얼마 뒤에 통로로 바뀌었다.

역시, 이 비밀 통로도 후작 저택 때처럼 밖으로 향하는 통로인 모양이었다.

설마, 저택 밖으로 나간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행히도 통로를 빠져나가기 전에 통로 벽에 닫힌 문이 보였다.

나무 문 틈새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빛과 함께 웅얼거리는 말소리도 들려왔다.

"……조금만 더 기다려 줘요. 운 좋게 빠져나갔지만, 내 딸이 금방 좋은 소식을 가져다줄 테니까."

분명 남작의 목소리였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의 말을 듣는 것은 예상했던 그 사람인가?

죽기 전에 남작이 내 귀에 대고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네가 마리아를 내쫓는 데 한몫을 했다지? 바보같이 영지 밖으로 기어 나오다니. 공작은 손대기 어렵지만, 저택에서 기어 나온 네놈은 여기 이 자리에서 죽게 되는 거야. 이건 마리아의 복수다."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황당했는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고, 이제는 다시 떠올리지도 않는 일이 되었다.

그런데, 이런 때에 이런 장소에서 쫓아낸 두 번째 공작부인의 사주로 죽게 되다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곳은 다른 눈도 없었고, 대화하는 것까지 들었으니 이제는 더 조심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대검을 움켜쥐고, 마나를 가득 모은 다리로 문을 박찼다.

쾅!

큰 소리와 함께 문이 박살 났다. 작은 발로 걷어찼지만, 마나의 도움 덕분에 문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는 파편 사이를 뚫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문 안쪽은 창고를 개조한 것 같은 작은 방이 있었다.

한쪽에는 여러 물건이 쌓여 있었고, 반대쪽에는 침대와 탁자, 그리고 와인 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탁자 앞에는 남작이 앉아 있었다. 그는 놀란 얼굴로 뒤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남작은 확인했고.

나는 남작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그가 말을 걸던 여자가 보였다.

아니, 여자가 아니라 여자가 그려진 그림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림 속에는 지금보다 좀 더 젊어 보이는 마리아 공작부인이 있었다.

내가 멍하니 그림을 보는 사이.

"네가 어떻게 여길?"

내 모습을 확인한 남작이 옆에 놓여 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휙.

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모습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검이 혼자 움직이다니, 설마 딸하고 비슷한 능력인가?

젠장, 그럼 지금은 꽤나 위험한 상황이잖아!

놀란 나는 급하게 검을 치켜든 뒤에 남작의 공격에 대비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남작은 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검을 손에 쥔 그는 황당하게도 숨을 헐떡거렸다.

방금 그 능력을 써서 힘든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아니, 그것 때문인가? 비슷한 능력이긴 한데, 엄청나게 약한 건가?

어쨌거나 이 기회를 날려 버릴 수는 없는 일. 나는 한걸음에 앞으로 달려가 그를 향해 대검을 휘둘렀다.

그도 검을 어느 정도 배웠는지, 검을 들어 내가 휘두른 대검을 막았다.

콰아앙!

하지만, 기사급 이상이라는 힘과 속도를 가진 내 검을 제대로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가 든 검이 부서지면서 그는 반대쪽 벽으로 튕겨 나갔다.

우당탕!

그는 한쪽에 쌓여 있던 물건들과 멋지게 격돌했고 물건들을 부수며 호쾌하게 바닥에 나뒹굴었다.

"설마, 검면으로 쳤는데 죽지는 않았겠지?"

생각보다 허무하게 튕겨 나가서 남작이 너무 빨리 죽었을까 봐 걱정될 지경이었다.

"크으으윽."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물건들 속에 파묻혀 움찔거리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이제 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시간이었다.

* * *

얼마 전 죽을 때 남작에게 들었던 말.

"네놈과 공작이 쫓아낸 마리아의 복수다!"

그때 들었던 말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두 번째 공작부인을 만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녀 대신에 그녀의 초상화가 나를 반기고 있었다.

덩그러니 초상화만 있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뭐,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면 되겠지.

나는 물건들 속에 파묻혀서 끙끙거리는 남작을 꺼내 주었다.

아직 다 크지 않은 몸이지만, 성인보다 강한 육체 덕분에 그를 무사히 끌어냈다.

"컥, 커억."

끌어낸 뒤에도 그는 고통에 숨을 헐떡거렸다.

자신의 부서진 칼에 맞은 상처가 여럿 보였고, 팔은 부러진 것 같았으며, 갈비뼈도 부러져서 숨쉬기가 조금 곤란해 보였다.

그래도 말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였으니.

나는 누워서 헐떡이는 그의 가슴을 발끝으로 툭툭 두들겼다.

"으억."

예상대로 그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안녕하세요. 다시 만났는데, 제대로 인사도 못 했네요."

나는 정신을 차린 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대검을 바닥에 세운 채로 기사의 인사를 하니, 그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너는 도대체……."

"다른 사람들의 눈이 없어도 이렇게 정중하게 대하는 게 좋죠. 나이가 어리더라도 아시다시피 나름 기사급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까요."

그제야 그는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제대로 된 능력도 없으면서 나이가 어리다고 얕잡아 보다니. 갑작스러운 상황에 흥분한 모양이지만, 그렇다고 그 실수가 무마되는 것은 아니었다.

뭐, 나에게는 반가운 실수였다.

"크윽, 여긴 어떻게 찾아온 거지? 거기다…… 어떻게 돌아온 거지? 영지를 벗어났다고 들었는데."

정신이 드니 궁금한 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른 모양이었다.

거기다 우리 뒤를 따라오며 감시하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고.

의외로 철두철미한 부분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지금은 다 의미 없는 이야기지만.

"질문은 제가 하고 싶은데요. 왜 이런 곳에 둘째 공작부인의 그림이 걸려 있는지, 왜 나를 죽이려 했는지 알고 싶어요."

실제로 날 죽인 것은 남작에게는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조금 전에도 나를 죽이려고 했으니 그리 틀린 말은 아니었다.

거기다 공작부인의 그림이 왜 여기 있는지는 정말 궁금했고.

"감히! 어린놈이 남의 집을 침입해서 무슨 망발을 하는 거냐! 크으, 공작이 반쪽이라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은 거냐? 천한 출신이라 어쩔 수 없는 건가."

아픈 게 조금 나아진 건가.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그는 대답 대신에 나를 향해 매도가 섞인 '어른의 훈계'를 퍼부었다.

당연히 효과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효과가 있었다. 반대쪽으로.

나는 발끝으로 건드렸던 가슴 위로 검을 거꾸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검을 든 팔의 힘을 살짝 풀었다.

꾹.

"으으윽."

억눌린 비명과 함께 남작이 꿈틀거렸다.

그 덕분에 검은 좀 더 아래로 내려갔고, 남작 가슴에 슬쩍 피가 비쳤다.

"천한 피가 흘러서 질문 대신 심문으로 바꿔야 할 것 같군요."

"크윽. 네, 네놈이."

그는 팔을 들어 올려 뭔가 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의 마나는 내 검에 실린 마나에 흩어져 버린 뒤였다.

"다시 물어보죠. 날 왜 죽이려고 한 겁니까?"

"크윽. 공작이 마리아를 쫓아낼 때, 네놈이 제일 큰 이유였잖아!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네놈이 죽기에는 충분한 이유다!"

앞뒤가 안 맞는 말이었지만, 여기까지는 그가 나를 죽일 때 한 말로 대충 예상했던 이유였다.

"공작부인이 남작님께 하소연한 겁니까? 억울하게 당했으니 복수해 달라고?"

다만, 내가 궁금한 것은 공작부인이 어디까지 가담해 있느냐는 거였다.

쫓아낸 뒤에 기억에서 지워 버리기까지 했는데 이렇게 뒤통수를 맞게 되었으니, 남작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계획을 바꿔야 할지도 몰랐다.

"불쌍한 마리아에게 또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거냐! 사랑스럽고 청초한 한 떨기 꽃 같은 그녀에게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거냐!"

고함을 지르는 남작의 표정이 몽롱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벽에 걸린 그림을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그녀를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고통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공작에게 팔려 가서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 가는 것도 모자라, 너 같은 반푼이를 죽이려고 했다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다니 그런 거짓말을 대체 누가 믿는단 말이냐!"

마치 고해성사를 하는 듯이,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으로 말을 토해 냈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도 내가 사랑하는 것을 알았고. 나는 그녀를 위해 내 모든 것을 걸었다. 너를 죽이고 공작을 파멸시키는 것이 지금 내 삶의 목표다! 그리고……."

방 안에 흐르는 야릇한 향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망상 때문일까? 그는 횡설수설 끊임없이 말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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