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제7편 남작가 (2)
콰앙!
쉽게 창문이 깨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폭음과 함께 나는 다시 튕겨 나왔다.
이건 환상이 아니었다.
출렁이고 움직이는 바닥과 달리, 창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창 위로 마나의 향기와 함께 강력한 힘과 반발력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솟구친 바닥도, 벽도, 일그러진 복도에도 같은 마나가 느껴졌다.
그리고 그 마나는 벽 뒤에서 웃고 있는 소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나와 같은 향을 품고 있었다.
"와, 잘못하다가는 빠져나갈 뻔했네. 기사급이라더니 그 이상이잖아!"
벽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이나 기쁜 듯한 목소리였다.
"와, 대단하잖아. 이런 먹이는 본 적이 없는데, 내 수집품으로 삼으면 안 될까요?"
남작에게 말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장난감을 사 달라는 소녀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남작의 대답은 단호했다.
"안 돼. 죽여라."
"아까운데……."
쾅! 쾅!
그녀가 말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최대한 창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다.
들킬 것을 각오하고 검에 마나를 밀어 넣어 창문을 가르려고도 해 보고, 벽을 뚫어 보려고도 해 보고, 그녀 앞을 막은 바닥을 부수려고 노력도 해 봤다.
하지만, 전부 소용이 없었다.
창문은 잘려 나가지 않았고, 뚫린 벽은 다시 메워졌다.
그리고 부서진 바닥 뒤로 계속 바닥이 솟구쳐서 한 걸음도 그녀에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하네. 하지만, 발버둥쳐도 소용없어. 이 집은 내 영역으로 선포된 나의 왕국이야.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이길 수 없어!"
역시, 이 황당한 일들은 모두 그녀의 능력이었다.
일종의 '영역 선포' 같은 능력일까? 정말 황당할 정도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잡기도, 이곳을 빠져나가기도 어려워 보였다.
멀쩡하던 바닥이 다시 출렁이고 벽과 천장,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나를 공격했다.
그것도 마나를 씌운 내 검을 막아서면서.
그녀 말대로 이 방, 아니 이 저택은 그녀의 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삼켜진 뒤였고, 그녀의 몸속에서 발버둥치는 먹이일 뿐이었다.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광경에 말을 잃었지만, 나는 끝까지 저항했다.
솔직히 이기기도 어려워 보였고, 당장 이길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지금 이기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다음번 삶에 제대로 된 정보를 주는 게 더 중요했다.
어느 정도 위력인지, 혹시 약점은 없는지, 그런 것을 알아내야만 했다.
"잘 싸우고, 잘 버티네. 하지만, 아버지 말을 들어야 해서 이제 끝내야 할 것 같아."
그녀의 말과 함께 주변을 감싸는 마나가 점점 짙어졌다.
공기가 무거워지며 몸을 움직이기 힘들어졌다.
젠장, 영역 안에서는 공기나 중력도 조절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이어서 억지로 버티는 내 귀로 그녀의 선언이 들려왔다.
"지금 이 집은 나의 왕국. 나는 이 왕국의 지배자다!"
쿠쿵!
동시에 나는 바닥으로 무너졌다. 팔다리가 부러지고,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내장이 다 터져 나간 것 같았다.
치명적인 일격.
'아, 어떤 방식인지 알겠다.'
하지만, 그 덕분에 그녀의 능력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궁금증이 남아 있었다.
"쿨럭, 왜,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죠? 설마, 공작부인께서 나를 죽이라고 시킨 건가요? 하, 하지만, 여기서 죽으면 공작이 다…… 다 알 텐데요?"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피를 토하며 물어보았다.
원래대로 돌아온 방 안에서 딸은 어깨를 으쓱였다.
"내 말이 그거라니까요. 이렇게 사고를 치면 어떻게 할 생각인지, 항상 치밀하던 아빠답지가 않다니까."
그녀의 말에도 남작은 지그시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다가왔다.
"귀를 막아라."
"네, 네."
그리고 자신의 딸을 물러서게 한 뒤에 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내 귀에 나를 죽인 이유를 속삭여 주었다.
"이런 어이없는 경우가……."
나는 남작을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동시에 눈앞이 점점 어두워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눈을 뜨니, 전날 저녁 로비에서 여행자들과 마주친 뒤였다.
우리는 모두 방을 안내하는 하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어디가 안 좋으세요?"
내 옆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닙니다."
몸이 아픈 것은 아니지만, 죽기 전 당했던 통증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기는 했다.
환상통이라고 할까.
하지만, 지금 표정이 안 좋은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내게 말을 건넨 소녀 때문이었다.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넨 소녀가 조금 전에 나를 죽였던 바로 그 남작 영애였다.
아니, 조금 뒤에 죽였다고 해야 할지도.
아무래도 그동안의 내 연기는 어린아이의 장난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분명 지금도 날 죽이라는 말을 들은 뒤였을 텐데, 저런 표정이라니.
본성을 몰랐다면 나는 물론이고,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일정 영역 - 어느 정도 영역인지는 아직 정확히 모르겠지만 - 안에서는 무적에 가깝게 되는 능력도 무섭지만, 나는 지금 저 연기가 더 무섭게 느껴졌다.
나도 최대한 멀쩡한 척 연기를 했지만, 역시 프로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과 헤어진 뒤, 내게 배정된 방 앞에서 나는 떠나려는 하녀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밤에 내가 방에 없어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끔 잠자리가 불편하면 밖을 산책하는 일이 자주 있으니까요."
솔직히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알리바이는 확실히 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아, 밤에는 웬만하면 안 돌아다니시는 게 좋아요. 그…… 마물들이 밤에 사람들을 데려가는 일들이 있었던 적이 있어서……."
내 말에 하녀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 마물이요? 이 저택은 남작 영지의 한가운데잖아요. 마을과도 붙어 있고."
공작가처럼 도시급은 아니었지만, 남작의 저택은 작지 않은 마을의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아뇨. 아뇨. 전에 있었던 일이에요. 남작님이 병사들과 처리하셔서 지금은 그런 일이 거의 없어요."
"어떤 마물이었는데요?"
내 질문에 하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남작님이 처리하셨다고만 하셔서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마물 때문에 실종되는 사람이 더 이상 없었어요."
"다른 이유로 실종되는 사람은 있었고요?"
내 말에 하녀는 입을 꾹 닫았다.
그녀의 표정이 대답이 되었다.
"걱정 마세요. 이야기는 들으셨잖아요. 아직 어려도 기사급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마물이 나타나면 제가 잡겠습니다."
호기롭게 내뱉은 말에 하녀는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아직 어린 소년의 말을 믿기도 어려웠고, 서자지만 능력을 가진 귀족 아이의 말을 부인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하녀는 내 말에 수긍하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방 안에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
끼이익.
죽기 전과 달리 창문은 잘 열렸다.
"자, 그럼 해가 지기를 기다려 볼까?"
창문턱에 기댄 채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낮은 산맥 위로 붉은 노을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것을 보며 나는 좀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밤에 사람을 납치하는 마물이라.
"그, 마물이라는 건 남작 딸을 말하는 거겠지?"
죽기 전에 남작과 그의 딸에게서 들은 말을 생각하면 그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능력을 얻은 뒤 남작 딸은 능력을 마구 남용했고, 사람들이 연이어 실종되자, 남작이 나서서 일을 무마했다라……."
그녀는 왜 사람들을 납치하고 죽인 걸까? 그냥 살인광인 걸까?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잠깐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이내 난 고개를 저었다.
이제 무슨 이유든 상관없었다.
남작도 그녀의 딸도 나의 적이었고, 적인 이상 확실하게 상대하면 그만이었다.
밖이 어두워졌다.
구름도 적지 않아 일반인은 등불 없이는 주변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아 보였다.
나는 마나로 눈을 강화한 뒤 허리춤에 찬 단검을 두드리고, 창밖으로 뛰어내렸다.
저번에는 저택을 수색한답시고 설치다가 죽었으니, 이번에는 아예 저택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탁.
2층에서 뛰어내렸지만, 아주 작은 소리만 들렸다.
나는 저택 앞 정원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미로식으로 되어 있는 정원이었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창문에서 확인했기에 제대로 된 길로 빠르게 나아갈 수 있었다.
순식간에 정원을 빠져나간 뒤, 앞을 막아선 낮지 않은 담을 타고 올랐다.
전생이었으면, CCTV나 전기가 흐르는 담장이 있거나 했겠지만, 이곳은 담벼락 위에 뾰족한 창살이 전부였다.
저택을 나온 뒤, 나는 저택을 크게 돌아 뒤쪽의 언덕으로 향했다.
남작 딸의 능력은 저 저택만 적용될 것 같았지만, 예상보다 넓어 마을까지 영역에 포함되면 곤란했기 때문이었다.
풀만 가득한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었다.
하지만, 언덕에 올라서자 남작 저택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구름도 물러가고, 별빛이 가득한 밤.
귀족 저택과 마을이 밤하늘 아래 그림같이 펼쳐져 있었다.
전생의 야경과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조금 씁쓸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이제 시간이 지나길 기다릴 뿐이다.
나는 낮은 돌 위에 앉아 단검을 무릎에 올려놓고, 저택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지나갔다.
창문의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저택은 물론 마을 전체가 깊은 어둠에 잠겼다.
이제 내가 죽었던 시간이었다.
저택 전체에 잠깐 마나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어제 경험한 것이 없었으면 느끼지 못했을 변화였다.
마나는 안채, 그러니까 내가 죽었던 남작 딸 방에서 시작해 저택 전체를 훑고, 마지막으로 내 방이 있는 곳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확인한 건가?"
혹시나 했지만, 저택 전체를 자신의 영역 안에 넣었을 줄이야.
미리 빠져나온 게 정말 잘한 일이었다.
그 뒤에 저택에 작은 소란이 일어난 것 같았지만, 그 소란은 금방 사라졌다.
하녀에게 미리 말해 둔 덕분이었다.
그 소란을 끝으로, 저택은 아침까지 고요했다.
나는 아침 이슬을 맞으며 저택으로 돌아갔다.
저택 담을 지키는 병사를 피해 담을 다시 넘고, 미로 정원을 지나 저택 현관으로 걸어갔다.
방에 내가 없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현관으로 들어가도 상관이 없었다.
"밤새 어디를 다녀온 거죠?"
문 앞에는 남작의 딸이 피곤한 얼굴로 서 있었다.
밤새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잠자리가 낯설어서 밤새 검술 훈련을 했습니다."
나는 허리춤에 매달려 있는 단검을 두들겼다.
"정문에 있는 병사들은 나간 사람이 없다던데요."
"아, 병사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아서 몰래 나갔습니다. 걱정하셨군요. 죄송합니다."
"하아……. 아뇨. 어쩔 수 없죠."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쉬우면서도 안도가 섞인 한숨이었다.
그녀는 이마에 손을 짚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귀족가와 마찬가지로 남작 저택의 아침도 꽤나 늦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