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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55화 (55/563)

제55화

제5편 수도행

"마음에 안 들지만, 대련으로 네가 충분한 실력을 가지고 있고, 무시해도 될 만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다시 따라 놓은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다른 때라면 바로 멀리 산골 마을의 기사로 보내 버렸을 테지만……."

아니, 스톱. 얼음장 같은 음성 속에 뭔가 좋아 보이는 말이 들린 것 같은데?

"하지만, 비전하의 초청장을 받아 내 아들과 같이 수도로 가게 되었으니 그렇게 보내 버릴 수 없게 되었구나."

나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 능력을 얻었을 때라면 그녀의 말을 막고 그냥 산골 마을의 기사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떠나기에는 너무 많은 일을 겪었다.

그녀가 이어서 꺼낸 이야기는 내 예상과 전혀 다른 말이었다.

"수도에 있을 동안, 네가 인맥을 쌓든 실력을 키우든 유명해지든 아무 상관을 하지 않으마."

쥐 죽은 듯이 지내라는 말일 줄 알았는데 맘껏 지내도 된다니,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그녀의 표정을 보니 전혀 기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내 실력을 우습게 보는 것 같지는 않은데…… 역시 수도의 환경 때문인가?

어쨌거나, 그녀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뭔가 요구 사항이 있다는 건데.

"네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지만 마누엘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도록 도왔으면 한다."

하, 이리저리 포장했지만, 결국 자기 자식을 지켜 달라는 이야기인가.

"네가 마누엘을 사고 없이 잘 지켜 주면 나도 네 어미인 아만다를 지금보다 훨씬 잘 대우해 주도록 하지."

거기다 은연중에 협박까지. 그것도 꽤나 잘 먹히는 협박이었다.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어머니를 가만 안 두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잖아.

뭐, 공작부인의 성격상 문제가 생긴다고 어머니를 죽이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책에서 본 정통 귀족의 괴롭힘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고용인 모두의 왕따와 이간질 등.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할 수 있겠지?"

솔직히 형제끼리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대련 뒤에는 마누엘에 대한 감정도 나쁘지 않아 도울 수 있으면 도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입맛이 썼다.

나는 고개를 다시 숙이며 그녀에게 물었다.

"마누엘 형님을 영지로 무. 사. 히 돌아오게 하면 되는 겁니까?"

형님이라는 말에 조금 언짢아진 듯했지만,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된다."

"알겠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올 때 몸만 무사히 오면 되겠지?

포션을 좀 많이 구해 두고 치료술사도 알아 놓아야겠다.

팔다리가 잘려 나간 것도 다시 붙을 수 있을까? 부활술사나 네크로맨서 같은 건 없으려나.

그날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공작부인의 응접실을 나섰다.

아차, 괜히 그때의 일을 떠올렸나 보다. 눈이 마주친 뒤에 공작부인의 눈이 조금 더 날카로워졌다. 조심조심.

그 뒤에 슬픈 눈을 한 어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눈물짓는 하녀들의 배웅을 받으며 나와 마누엘은 마차를 타고 저택을 나섰다.

두 번째 영지 밖으로의 여행.

그리고 홀로서기를 위한 첫걸음이었다.

* * *

후작가로 갈 때와 달리, 공작 영지부터 수도까지는 낮은 구릉과 드넓은 평야가 쭉 이어졌다.

산이 전혀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쭉 이어져 있었고, 비옥해 보이지만 방치되어 있는 벌판이 끝없이 펼쳐졌다.

그래서인지 왕국의 중심인 수도로 향한 여행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다져진 넓은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마차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도 자주 보였다.

물론,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고급스러운 마차의 모습에 사람들은 얼른 길을 비켜섰지만, 그들의 눈에 극심한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공작의 영지를 벗어날 때까지, 그리고 다른 영지를 지나갈 때도 도로 위에 마물이나 도적은 보이지 않았다.

한가로운 여정이 이어지자, 병사들과 고용인들, 그리고 일행을 이끄는 기사 앙헬까지 긴장을 풀고 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앙헬 기사는 다른 기사들과 달리 나와 그리 가깝지 않은 기사였다. 그동안 꽤 많은 기사들과 알고 지냈지만, 공작부인이 잘 골라 놓았는지 이 기사는 잘 알지 못했다.

물론, 영지의 모든 기사를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앙헬 기사는 그동안 나를 일부러 피한 느낌이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한가로운 시간이 이어지자, 마차 안에서 심심했는지 계속 나를 외면했던 마누엘이 입을 열었다.

"너를 부른 후원자가 도대체 누구야? 서자를 수도까지 불러서 교육을 시켜 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가 허락해 준 이유도 모르겠고……."

공작은 물론 공작부인도 후원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거기다 공작은 나에게도 최대한 소문이 나지 않게 하라고 주의를 주었고.

공작가가 괜한 정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공작다운 이유였고, 나로서도 괜한 시비에 휘말리지 않도록 가급적 조용히 있을 참이었다.

뭐, 시몬이나 마누엘이 왕비의 후원을 받게 되었으면 비밀로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게 될 리가 없으니 최대한 입을 닫고 있을 생각이었다.

"너는 알고 있을 거 아냐. 어머니에게 물어봐도 알 필요가 없다고만 하시고……."

아니, 제대로 대답을 들어 놓고 왜 나한테 묻는 건데? 알 필요 없다고 들었으면, 조용히 입 닫고 있을 것이지.

"저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합니다. 거기다 공작님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아……."

역시, 마누엘도 공작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공작이라는 말 한마디에 마누엘은 바로 질문을 멈추었다.

"아니, 내가 그걸 물어본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게 아냐. 후원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생활비까지 다 지원해 주는 것은 아닐 거 아냐. 집이야 수도에 있는 우리 집이나 기숙사에서 지내면 될 테지만, 다른 생활비는 어떻게 할 건데? 설마 아버지가 따로 지원해 주신 거야?"

하지만 우리 형님은 질문을 멈추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변명을 거기에 끼워 넣었다.

"아뇨. 그동안 모은 돈과 어머니께서 지원해 주신 돈이 조금 있습니다. 정 돈이 모자라면 학원에 다니면서 일할 곳을 찾아봐야죠."

사실은 출발하기 전에 어머니가 내어주신 돈이 있었지만, 그 돈을 받을 수는 없었다. 딱 봐도 그동안 모은 비상금 전부였는데, 그 돈을 전생처럼 날름 가져갈 수가 없었다.

거기다 내가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은 꽤 많았다.

특히 무덤 탐험 때 주섬주섬 가지고 나온 금화와 보석들은 아직 환전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돈이 될 게 분명했다.

수도에서 내 돈만 가지고도 충분히 잘 지낼 수 있을 터였다.

아, 맞다. 출발하기 전 공작이 총집사를 통해 품위 유지비랍시고 준 돈이 있었다.

얼마 되지 않은 데다 본인이 직접 주지도 않은 돈이었지만, 나는 감사한 표정으로 그 돈을 챙겼다.

공돈인데, 받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돈들은 내 품과 짐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었다.

그렇게 며칠간 야영을 하거나 마을의 빈집을 빌려 숙식을 해결하던 우리는 한 작은 영지를 지나게 되었고, 그 영지의 주인인 남작의 저택에 하루를 머물게 되었다.

이 영지의 주인은 공작부인의 먼 친척이기도 했고, 남작의 자식들이 같은 시기에 수도로 올라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서 오게. 어렸을 때 보고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군."

화려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자가 1층 로비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공작부인 처가 쪽 사람이니 꽤나 무시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나에게까지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마누엘과 인사를 나눈 뒤, 그는 나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검사라고 들었네. 시몬과 마누엘에 자네까지. 공작가에 복이 내린 모양이야."

그는 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로비에는 그 외에도 성격이 반대로 보이는 두 여성. 아마 그의 아내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1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소년, 소녀가 서 있었다.

이들은 우리와 함께 수도로 가게 된 남작의 자식들인 것 같았다.

주변을 살피다 눈을 마주치게 되니, 남자애와 여자애의 반응이 각각 달랐다.

여자아이 쪽은 눈이 마주치자 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렸고, 굳은 표정의 남자아이 쪽은 나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헐, 여자 쪽이 훨씬 빨리 어른이 된다더니.'

하지만, 나이 때문일까. 열심히 여우 흉내를 내는 중이지만, 딱 봐도 어색하기만 보였다.

하긴 내가 평범한 어린아이였으면 반했으려나? 꽤 예쁜 얼굴이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나였기에 그녀의 모습이 그저 안쓰럽게 여겨질 뿐이었다.

대신, 소년 쪽의 반응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래, 저게 제 나이대 소년의 모습이지.'

남작의 친절이 껄끄러웠는데, 소년의 표정을 보니 역시 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아내, 딸까지는 표정을 감추고 연기할 수 있었지만, 아들까지는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왜 이런 연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

귀족답게 행동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공작부인이 시켰다고 보기에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어쨌거나 나태해진 마음을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다시금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 뒤, 나는 나를 노려보는 소년을 향해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미소를 지어 주었다.

움찔!

내 미소에 소년은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그는 얼굴이 벌겋게 변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오옷! 역시 아이들은 이래야지. 순진하니 좋네.'

옆에서 여우 짓을 하는 여자애는 물론이고, 애늙은이인 시몬, 철부지 귀족인 마누엘만 보다가 제 나이대로 행동하는 소년을 보니 그저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왔다.

허둥거리는 소년 덕분에 지루한 인사가 금방 지나갔다.

인사가 끝난 뒤, 남작은 우리 형제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손님으로 온 기사도 같이 식당으로 안내하는 귀족도 있었지만, 남작은 그런 귀족은 아닌 듯했다.

여행으로 꽤나 피곤했지만, 역시 귀족가여서일까. 식사는 길게 이어졌다.

남작과 그 부인들의 알맹이 없는 말들. 그리고 아들의 투덜거림과 딸의 묘한 치근거림.

"아시겠지만, 우리 아이들도 같이 올라가게 되었으니 잘 부탁하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작의 말에 마누엘이 제 가슴을 두들기며 대답했다.

도착하기도 전에 파벌이 만들어지는 걸까? 뭐, 후계자는 아니지만 공작 아들과 같이 다닌다면 나쁘진 않겠지. 마누엘도 시몬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을 테니, 무리한 짓은 하지 않을 거고.

그런데 정말 안 하려나? 음, 이건 조금 걱정이 되었다.

"정말 대단한 검사라고 들었어요. 어른 기사들과도 대련이 가능하다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거죠? 정말 대단해요."

남작 아들 쪽은 말할 것도 없고, 꽤나 친절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남작이나 그 아내들도 나와 대화하기가 어려운 듯한데, 그 딸은 전혀 달랐다.

그녀는 완전히 성인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말과 행동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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