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제4편 실력 확인 (2)
뭐, 접근하기 힘들면 멀리서 공격하면 되는 거니까.
얍!
마나를 검에 가득 주입한 뒤에 마누엘을 향해 힘껏 던졌다.
"으악!"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본 마누엘이 급하게 손을 뻗었다.
파자자작!
마누엘의 손에서 전기가 뿜어져 나와 날아오는 검을 휘감았다.
황당하게도 전기에 휘감긴 검은 점점 느려지더니 마누엘 코앞에서 멈추었다.
그걸 막았어? 마나를 가득 담은 검이었는데? 거기다 기사 이상의 힘으로 던진 거고.
"이익! 내 능력이 그냥 번개를 만들어 내는 것뿐인 줄 알았냐! 나는 금속으로 만든 물건을 멈출 수도, 움직일 수도 있어!"
오, 그 능력은 전기로 전자석을 만들 수도 있는 거였나? 의외로 다재다능한 능력인걸.
내심 감탄했지만, 아쉽게도 내 감탄은 그걸로 끝이었다.
날아오는 검을 막기 위해 그는 몸을 감싸던 전기를 모두 검을 향해 쏘아 냈기 때문이었다.
나는 검을 던지고, 바로 그의 옆으로 접근한 뒤였고.
이미 검을 던져서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공격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힘껏 후려쳤다.
퍽!
"크악!"
만약을 위해 주먹으로 후려친 곳은 그의 턱이었고, 그는 멋지게 공중을 빙글 돌아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다행히도 바로 기절하지는 않았다.
"으윽, 뭐, 뭐야!"
하지만, 손으로 내뿜던 전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다시 전기를 일으키기는커녕 일어서기에도 벅차 보였다.
"으윽! 비겁한!"
아니, 댁이 그렇게 말하면 쓰나.
거기다 기사는 검을 잃을 때를 대비해서 체술도 배운다고. 다른 세상에서 온 나보다 모르면 어떻게 해.
나는 일어나기 어려워하는 마누엘을 일으켜 주며 그에게 말했다.
"항복하시죠."
부드러운 목소리로, 형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생의 모습으로.
"악! 내가 항복할 것 같아?"
역시, 내 예상대로 내 말이 귀족으로서의 그의 자존심을 건드린 모양이었다.
"항복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나는 겨우 일어난 그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이번에는 살짝 비꼬듯이.
"절대 안 해! 이익! 내게 항복을 받아 낼 수는 없을 거야!"
그는 말과 함께 다시 전기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손 위에는 스파크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능력이라는 것은 머리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턱을 맞아 반쯤 뇌진탕을 일으킨 머리가 바로 능력을 구현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래도 쉽게 항복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야 항복할 때까지 때리면 그만이었다.
최선을 다한 힘 조절로 큰 부상을 입지 않도록 하고 있으니, 항복이 나올 때까지 기사단장도 막지 않을 터였고.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바였다.
퍽!
"항복해요!"
퍽!
"그냥 쓰러져서 기절해도 봐드릴게요."
퍽!
"아니면 손을 들어 올리셔도 돼요."
나는 그 뒤로 흥겹게 내 둘째 형을 두들겨 팼다.
다행히 마누엘 형은 꽤나 인내심이 강했다.
덕분에 나는 이번 생에 느끼지 못했던 손맛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수도에 가서도 나를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그에게 물리적인 권유를 해 줄 수 있었다.
역시 주먹은 좋은 대화 수단이었다.
* * *
대련이 끝난 뒤 시간이 흘렀다.
해가 바뀌고, 내 나이 15살. 드디어 수도로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그사이에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몇 가지밖에 없었다.
대련 뒤에 공작부인이 나를 따로 불러낸 일이나 시몬 형의 약혼자인 아드리아 영애가 찾아온 일 정도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었다.
플로라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전날부터 계속 눈물을 훔치며 내 짐을 싸 주었다.
"도련님이 수도로 유학을 가시다니요. 수도는 정말 위험한 곳이라는데, 아직 어린 도련님이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시려고요."
뭔가 듣기에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은 말을 이어 가며 그녀는 열심히 내 짐을 쌌다.
뭐, 그녀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각성은 했지만, 반쪽인 나를 사람들이 인정해 줄 리도 없었고, 그 공작 각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실 리도 없었다.
솔직히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암담한 결과만 나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도 평범한 서자라면 겁에 질려 안 간다고 떼를 썼을지도 몰랐다.
"너는 내가 낳은 자식이지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구나."
옆에서 짐을 싸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변함없는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 기대 이상으로 스스로 잘 자라 주어서 감사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쉬울 따름이고."
내가 유학을 떠난다니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아지신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가 떠나게 되면 어머니 혼자 남게 되실 터이니 외로우실지도 몰랐다.
하지만, 솔직히 어머니는 공작과 잘 지내고 있었고, 시빗거리가 될 둘째 부인은 내가 저 멀리 보내 버린 뒤였으니 그리 걱정할 점은 없어 보였다.
아직 첫째 공작부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문제될 것이 없었고.
나는 걱정하는 어머니를 꼭 안아 주었다. 아직 어머니의 키에 닿지는 않았지만, 안아 주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내 뜻밖의 행동에 어머니는 놀란 듯했지만, 곧 두 손으로 나를 안으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넌 어디 가서도 잘해 나갈 아이니까. 내가 노심초사해도 아무 소용이 없겠지. 난 너를 믿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역시 어머니였다. 자신의 걱정보다는 내 걱정이 우선이었다.
저 얼음 같은 공작 아. 버. 지와는 전혀 달랐다.
짐은 하녀들 손에 먼저 나갔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정문으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가니 고용인들은 옆으로 비켜서며 우리 모자에게 인사를 했다.
아직도 쭈뼛거리며 인사를 하거나 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인간도 보였지만, 내가 어렸을 때와는 천지 차이였다.
정문 앞을 나서자, 아침 햇살이 눈이 부셨다.
마치 내 출발을 축복하는 듯 날이 무척이나 맑았다.
정문 앞에는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가문 마차와 고용인들이 탈 마차, 그리고 짐마차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있는 병사들.
병사들 중에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후안이 보였다.
오늘은 아들 마누엘의 유학 때문인지 공작 일가가 모두 나와 있었다.
공작과 공작부인, 첫째 아들인 시몬과 그녀의 약혼자인 이에로 영애.
그녀는 나를 보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지만, 주변 상황 덕분에 더 아는 척을 하지는 못했다.
저번 삶에서 죽기 전에 꽤나 친해졌던 것을 떠올리면 꽤나 아쉬웠지만, 그녀가 무사히 살아난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나도 그녀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짐을 모두 싣고, 마지막 인사를 할 시간.
언제나처럼 나는 마차 옆으로 물러섰고, 마누엘이 앞으로 나서 공작 부부와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수도에서도 그레시아 공작가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마누엘은 또렷한 목소리로 멋들어지게 작별 인사를 했다. 고위 귀족가의 자제라는 느낌이 드는 인사였다.
얼마 전에 있었던 대련 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역시 세뇌하다시피 교육을 받은 귀족 자제다웠다.
그 뒤에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괜히 여기서 잘못 보였다가 어머니에게 피해가 가게 할 수는 없었다.
마누엘의 인사 뒤에 공작이 말했다.
"잘 다녀오도록 해라. 그곳은 경쟁자와 적들이 같이 있는 곳이니 항상 신중하게 행동하도록."
역시, 공작다운 말이었다. 내 앞에서만이 아니라, 정식 아들의 앞에서도 그는 다르지 않았다.
그는 마누엘에게 말한 뒤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슨 말을 하기를 원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 다시 고개나 숙여 볼까.
공작은 마누엘과의 대련 뒤에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관심이 없었던 것인지, 충분히 예상했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부르지 않아 편하기도 하고 살짝 아쉽기도 했다.
"수도에 가서도 연락 잘하고, 힘든 일이 있으면 외가에 부탁을 하도록 해라. 그리고……."
공작의 말이 끝난 뒤, 공작부인은 마누엘에게 다가가 그를 어루만지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아들을 떠나보내는 어머니라면 이해가 되는 모습이었다.
막내라서 그런가? 제대로 귀족으로 큰 첫째 시몬과는 다르게 마누엘이 아직 철이 덜 든 건 그녀 때문인지도 몰랐다.
마누엘에게 말을 하던 공작부인과 언뜻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굳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대련이 끝난 다음 날 그녀의 응접실에서 만났던 공작부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날 보았던 모습은 평상시보다 훨씬 냉랭하고 차가웠다.
대련 뒤에 공작은 따로 부르지 않았지만, 공작부인은 달랐던 것이다.
마누엘의 패배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인지 그녀는 응접실에 들어오는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숙이니 그녀는 손을 휘저었다.
"인사는 되었다. 앞에 앉아라."
꼴도 보기 싫다는 표정이 얼굴 가득 떠올라 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철저하게 귀족적인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그녀는 잠시 눈을 감더니 차갑게 식은 차를 들이켰다.
그렇게 좀 더 시간이 흐르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나이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다. 실제로 그동안 벌인 일들도 확실히 그랬고."
"솔직히 마리아의 성격상 네가 살아남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마리아와 딸인 엘레나가 저택에서 쫓겨났지."
"상속 능력은 그리 대단하지 않는 것을 얻어 놓고는 어린 나이에 기사들이 놀랄 정도의 실력을 보였고."
"어떻게 남편을 설득했는지 모르겠지만, 후작가에도 따라가서 꽤 활약을 벌였다지, 아마?"
"거기다 마누엘과의 대결에서 내 아들을 이겨 버리기까지."
"확실히 천재가 맞을지도 모르겠어. 비능력자인 엄마를 두고도 그런 능력을 보이는 것은 정말 드문 일이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꺼내 놓은 말은 칭찬처럼 혹은 비꼬는 것처럼 이어졌다.
"이런저런 말들이 있었지만, 솔직히 너는 내 관심 밖이었다. 어차피 반쪽인 네가 그레시아 공작가를 승계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다른 가문들의 서자들처럼 조금 쓸모 있는 말 중 하나가 될 뿐일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찻잔을 들어 올리다가 찻물이 다 떨어진 것을 깨달았는지 눈썹을 찡그렸다.
뒤쪽에 서 있던 하녀가 조용히 다가와 찻잔을 채웠고, 그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마누엘과 함께 수도로 떠나게 되고 마누엘을 이겨 버린 탓에 널 더 이상 무시할 수 없게 되었지."
역시, 이런 일이 생길 것 같더라니. 마누엘을 이겨 버린 것은 후회하지 않았지만, 예상대로 귀찮은 일이 생길 모양이었다.
서로 죽이는 일까지 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간 뒤, 난 공작부인이 묘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들은 것 이상으로 넌 이상한 아이구나. 표정은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 네 눈빛은 그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구나. 눈빛만 보면 무척이나 지루해 보일 정도야."
이런, 긴장이 풀어졌나? 아니,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뭐, 신기하기는 하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상황은 아닌 것 같고."
내 걱정이 무색하게 그녀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