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화
제1편 추천서 (1)
여러 번 반복된 시간으로 말미암아 무척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느껴졌지만, 따지고 보면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일 뿐이었다.
거기다 땅속에서 그 난리가 벌어졌지만, 영지는 숲속에 버려진 우물에 물이 다시 찼을 뿐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느지막이 돌아온 저택은 아침과 달라진 게 없었고, 사람들도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고용인들은 나에게 인사를 하면서도 거리를 두려고 했고, 병사들도 나를 보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여행을 가기 전처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도 나는 이곳에서 외인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모습은 아침과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는 전과 달라져 있었다.
아직 어린 몸이었지만, 새로운 무기에 새로운 능력까지.
그것도 전례가 없었던 두 가지 상속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방에 돌아온 나는 단검을 꺼내 보았다.
아마도 그녀가 가지고 간 방패와 검, 그리고 이 단검은 한 세트였을 터.
지금은 단검을 들고 있어도 환청이나 불새의 환상은커녕 병아리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잉.
단검의 끝에는 내 눈에만 보이는 마나가 길게 늘어났다.
마음속에서 스위치를 올리는 것처럼 마나를 바꾸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잔잔하던 마나가 불타오르고, 마나로 이루어진 검이 만들어졌다.
물론 이 단검을 들었을 때만 가능했고 어떻게 이렇게 되는지 그 이유도 몰랐지만, 내게 도움이 되는 능력이란 것만은 확실했다.
그리고.
생각도 조금 달라진 걸까?
카트리네 영애가 말한 추천장.
전 같았으면, 왠지 사건에 휘말릴 것 같아서 피했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처음부터 아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은 받아들여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었다.
그녀의 말대로 내 능력이 중요한 것이라면 분명 초청장을 보낼 터.
초청장을 거절하고 이곳에 남아 있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초청장을 받아들이고 수도로 향하는 것이 옳을지.
수도에 가면 이곳 이상으로 반쪽 귀족인 내 처지가 문제가 될 가능성이 컸다.
괜히 고생만 하다가 정쟁에 잘못 휘말려 버릴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죽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갇혀 한평생을 보낼 수도 있었다.
"윽, 생각해 보니 정말 위험한데……."
대충 듣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 왕국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해 둬야 할 것 같았다.
"뭐, 초청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내 의사와 상관없을 테지만……."
공작이 마음대로 결정할 게 분명했지만, 이대로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 * *
"흠, 공자님께 그리 필요한 교육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며칠 뒤, 왕국 정치에 대해 자세히 알려 달라고 했을 때, 서기관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나를 가르치는 교사였건만, 제대로 이야기를 듣기도 쉽지 않았다.
"저에게도 공작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공작님과 영지를 위해 꼭 필요한 공부입니다!"
"……뭐 그러시다면."
영지의 미래를 걱정하는 공작의 아들 연기를 필사적으로 펼친 덕분에 겨우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에 나라가 두 왕자의 파벌로 나뉘어 있다고 말씀드렸었죠. 지금은……."
전에도 느꼈지만, 그는 서기관치고 무척이나 왕국 사정에 밝았다.
"귀족파도 있긴 하지만, 왕께서 건강이 안 좋으신 탓에 근래는 각각의 왕자를 지지하는 두 파벌 간의 다툼도 치열해졌습니다. 영지 간의 분쟁도 심해졌고요."
나는 그 분쟁을 저번의 삶에서 직접 경험했었다. 덕분에 몇 년을 다시 살아야 했고, 이에로 후작령까지 다녀와야 했다.
물론, 우리 영지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도 없었던 일이 되었고,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도 후계자의 병사로 덮여 버렸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파벌 싸움이 극심한 상황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두 왕자 진영의 분쟁을 막기 위해 시몬 공자님이 후작가 영애와 결혼을 하게 된 것이지만, 지금의 상황으로 봐선 수습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 제1 왕자께서 왕세자이시고, 왕께서 다음 대 왕으로 제1 왕자를 세우고 돌아가신다고 해도, 제2 왕자 쪽이 이를 쉽게 수긍하기는 어렵겠죠."
후작가를 다녀오는 사이에 몇몇 영지가 이미 피를 본 모양이었다.
'설마, 후작가 일을 뒤에서 조종하던 자들이 다른 곳도 손을 본 걸까?'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아직 다른 정보가 없으니 그냥 머릿속에 담아 둘 수밖에 없었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서기관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귀족파가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주느냐에 따라 저울추가 확 기울어지겠지만, 귀족파의 수장이 왕의 동생인 훌리안 공국왕이라 일이 무척 복잡해진 상황입니다. 공국왕이 되었으면 왕국 정계에는 나서지 않는 것이 모양새가 좋은데, 사정이 영 우스워진 꼴이죠."
그 말을 하면서 서기관은 나지막이 혀를 찼다.
서기관도 무척이나 반골이었다.
왕가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혀를 차다니.
내가 아직 어렸기 때문이겠지만, 공작이나 다른 귀족 앞에서는 절대 해서 안 될 행동이었다.
아무튼 서기관의 말대로라면, 우리 왕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거기다 후계자를 결정하는 내전이라는 게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닌 것 같았다.
"국력 낭비에,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는 일을 왜 이렇게 자주 벌이는 건지. 차라리 둘 중 하나가 미리 암살이라도 당한다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위험해. 정말 위험해.
나를 가르치는 서기관은 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인간이었다.
농담처럼 말하고 있지만, 지금 꺼낸 말은 잘못하다간 목 날아가기 딱 좋은 이야기였다.
지금 그는 나를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저 미소는 나를 떠보는 것이 분명했다.
어린아이 취급을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가 그를 살피는 동안, 그도 나를 살피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이 세상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얕본 것일까.
"하하, 농담입니다. 공자님이라면 이런 농담을 다른 곳에선 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그의 말대로 어디서도 꺼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더군다나 반쪽인 나는.
그는 그렇게 화제를 돌렸고, 나는 눈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에 내 목 뒤에선 소름이 돋았다.
"뭐, 요즘 들리는 이야기는 다른 왕국으로 시집갈 줄 알았던 공주 쪽까지 사람들이 모여들어서 삼자 구도가 형성되는 느낌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뭐, 그런데 솔직히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세상에 이렇게 되면 초청장을 받는 게 보통 문제가 아니잖아! 어제 본 기사가 걱정하는 게 당연한 거였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도대체 평범하고 좋게좋게 끝나는 적이 없었다.
"……대충 제가 알고 있는 내용은 이 정도입니다. 일개 서기관으로서 이 이상을 알긴 힘들죠. 이런저런 가십들도 있기는 한데, 그런 건 뜬소문에 불과하니까요."
그는 그 뒤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었고,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아니, 이미 일개 서기관이 알 수 있는 내용을 한참 넘어선 것 같은데.
나는 말을 마치고 나를 쳐다보는 서기관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내 스승인 서기관인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름이 '이반'이고, 영지의 실무를 맡은 서기관들 중에서는 젊은 축에 속하는 서기관이라는 사실밖에 아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 스승은 나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처럼 서기관의 수업 시간에도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상황 때문에 수시로 그 가면이 벗겨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내 비밀은 절대 들키지 않았지만, 그가 오늘 꺼낸 이야기들은 그와 나만이 아는 또 다른 비밀이 되어야 할 판이었다.
무척이나 위험한 사람. 과연 그가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인지, 아니면 삶을 반복하게 만드는 걸림돌이 될 사람인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얼마 전이었다면 냉큼 선생을 바꿔서 그와 거리를 두었겠지만, 지금은 좀 더 지켜볼 생각이었다.
몇 개월이 지나, 해가 바뀐 어느 날.
11살이 된 나는 숲으로 둘러싸인 연무장에서 미겔과 대련을 하고 있었다.
본대에 복귀한 덕분에 오랜만에 나와 상대하게 된 미겔은 황당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검이 반으로 뚝 잘려 나가 있었다.
"검이 많이 낡았나 보네요."
내 말에 검을 보던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 조그만 단검에 잘려 나갈 검이 아닙니다. 아니, 그보다 검이 단검과 부딪치지도 않은 것 같았습니다만."
확실히 그의 말대로였다.
새로운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단검에 새로운 마나를 실었고, 그의 검은 내 단검에 닿기도 전에 그만 잘려 나가고 말았다.
그의 검은 마나가 제대로 실려 있지 않았고 제대로 된 승부도 아니었지만, 내 단검에 실린 마나가 미겔의 검을 잘라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순순히 수긍할 수는 없었다.
"제대로 부딪쳤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이번에 구한 검이 좋은 것 같아요."
"하여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그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의 얼굴을 보니, 괜히 물어서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어제 후안과 같이 나가서 구하신 검입니까? 어디서 구하신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봐도 훌륭한 단검이군요. 그래도 좀 아깝습니다. 지금 체형으로는 조금 짧은 검 정도겠지만, 더 크시게 되면 단검으로밖에 못 쓰실 것 같군요."
그의 말대로였지만, 나는 별로 아쉽지 않았다.
나는 연무장 한쪽 나무에 기대어 놓은 대검을 가리켰다.
"어차피 성인이 되어서 쓸 검은 따로 있으니까요."
내 말에 미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 검이 있었죠. 기교를 쓰기는 어려운 검이긴 하지만, 저 정도 튼튼한 검이라면 평생지기에 가깝겠죠."
그는 신기한 눈으로 나무에 기대어 놓은 대검과 내가 들고 있는 단검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정말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어디를 갔다가 오시면 무기를 하나씩 구해 오시고, 알 수 없는 기술에다가 실력도 한 단계 이상 올라 버리시니……."
그는 잘려 나간 검을 검집에 넣은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후에 그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제 훈련은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습니다."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아뇨. 후작가로 가시기 전에도 저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았잖습니까. 그때부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검을 맞대고 알아차렸습니다. 이제 공자님은 저보다 확실히 강해지셨습니다. 더 강해진 제자에게 제가 가르칠 것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도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체적 차이가 컸지만, 내심 실전을 벌여도 그를 충분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누구한테 배워야 하나……. 기사단장님께 부탁해야 할까?"
하지만, 기사단장은 나를 가르칠 리 없었다. 그렇다고 공작에게 직접 부탁할 수도 없었고.
"차라리 몇 년 뒤에 둘째 공자님과 함께 수도로 가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 마누엘…… 형의 유학이 결정되었나요?"
"네. 시몬 도련님이 무사히 돌아오신 것을 보고 공작님이 결정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같이 가는 것을 마누엘이나 공작부인이 허락하실 것 같지 않은데요."
"그건 그렇지만……. 공자님의 실력을 공작님이 아시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글쎄, 공작께서 과연 그런 결정을 할까? 누구보다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인데, 반쪽인 나를 수도로 보낸다고?
아무리 봐도 무리한 이야기였다. 미겔도 어려운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하지만, 가능한 방법이 있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