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제25편 선물이 뭔가 이상하다 (3)
"쿨럭, 쿨럭."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고, 나는 겨우 눈을 뜰 수가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불새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여자 용병.
'죽지 않은 건가?'
나는 겨우 돌아온 정신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한쪽 구석에 머리를 긁적이는 중년 기사가 보였다.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본 모습이 환상이 아닌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내 물음에 그녀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기사는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미안하군. 불새 문양이 그려진 검을 들고 있어서 착각했네. 영애……. 아, 아니, 아가씨의 물건을 빼앗고 뒤를 쫓는 건 줄 알았는데……."
무척이나 낮은 듣기 좋은 목소리.
하지만, 그의 말에 그녀는 얼굴을 감쌌고, 나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로 바꾸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기사에게 아가씨로 불리는 용병이 있을 리가 없으니, 그의 말대로 어디 높은 가문의 영애일 테지.
아니, 나를 보고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가?
"네? 이런 꼬맹이가 가능할 거로 생각했어요?"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내 몸을 가리켰다.
그런 내 모습을 그녀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기사는 미안한 얼굴로 다시 사과했다.
"아니, 전에 어린 모습으로 달려든 암살자가 있었기도 했고……. 아무튼 미안하네. 다시 한번 기사로서 정식으로 사과하지."
"기사로서 사과요?"
내가 기절하는 동안에 불새 사냥꾼에게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찌 되었건 귀족이라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기사가 사과할 리 없었다.
하지만, 기사로서의 사과라니. 뜻밖의 행운인데?
기사로서의 사과는 거의 사라진 기사도의 예절이었다.
어느 정도 되는 기사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만큼 고지식했다.
쌍으로 고지식한 두 사람을 보다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어지러웠지만, 마나를 한 번 돌리자 바로 어지러운 것이 사라졌다. 마나 만세.
"그런데, 아는 분이신……. 아니, 이럴 때가 아니군요."
나는 허물어진 묘지의 석실에 누워 있었는데, 중앙에 생겨난 구멍에서 물이 넘쳐나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물이 솟아나는 건지…….
"우선 빨리 빠져나가죠."
나 때문에 계속 남아 있었는지, 내가 말하자마자 바로 움직였다.
그녀는 부서진 묘실을 떠나며 아쉬운 얼굴로 몇 번이나 돌아보았지만, 결국 방패를 쓰다듬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기사도 육중한 갑옷을 다 갖춰 입고서 잘도 달렸다.
나도 잠깐 기절한 덕분에 마나가 충분했고, 우리는 빠르게 지하 동굴을 달려 나갈 수 있었다.
도망치는 지하 동물들과 함께 동굴을 달려 우리는 처음 내려왔던 버려진 우물 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말라붙었던 우물 바닥이 젖어 들기 시작했고, 우리는 열심히 우물 벽을 올라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우리를 쫓아오던 물길은 다행히 우물을 반쯤 채우고 멈추었다.
지상에 나온 나는 후안을 찾았다.
다행히 후안은 무사했다.
눈에 커다란 멍을 달고, 입에는 천이 물린 채로 밧줄에 칭칭 감겨 있었지만, 그래도 다른 곳은 멀쩡한 채로 우물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는 우물에서 나온 기사를 보고 몸을 흔들어 댔지만, 곧이어 우물에서 나온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기사는 먼저 후안에게 가서 그를 묶은 밧줄을 풀어 주었다.
후안은 입에 물려 있던 천을 빼내고, 먼저 내 안부를 물었다.
"괜찮습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그의 말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해가 있었어. 둘이 같은 동료였던 모양이야."
내 말에 기사는 사과 대신 나를 보고, 후안을 칭찬해 주었다.
"좋은 병사를 두셨군요."
제대로 된 사과는 아니었지만, 나름 기사로서 성의 표시를 한 것이었다.
나는 어쨌거나 귀족이었으니까 사과한 거지, 기사가 평민에게 사과할 리가 없었다.
후안도 그 정도로 만족한 듯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평등했던 전생을 경험한 나는 불만이었다.
이쪽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은 생각이었지만, 후안이 사과를 받지 못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그렇다고 이쪽 세상의 신분제를 철폐하겠다고 설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신분제 덕분에 죽기도 많이 죽었고 피해도 많이 보았지만, 이득도 적지 않게 보았다.
나는 신분제를 바꾸는 대신, 나나 내 주위의 사람들은 신분제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게 아니라 이득을 보게 만들고 싶었다.
음, 뭔가 처음 생각하고 달라지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일이 생겨서 바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
예상했던 말이었다.
기사가 괜히 찾아올 리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데리고 가기 위한 전령이었다.
이곳까지 찾아온 것이 신기했지만, 숙소에 메모를 남겼으면 못 찾아올 것도 없었다.
그것보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그녀 말대로 무척이나 다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적어도 웬만한 기사단의 상급 기사로 보이는 기사를 전령으로 쓸 정도로 급한 일일 터이니.
그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기절한 사이에 나누었던 모양이었고, 당연하게도 내게는 들려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그녀는 다른 문제를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고……."
뭐, 보물만 찾아 계약대로 나누었으면 전혀 문제가 안 되었겠지만, 지금의 상황은 계약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은 이제 용병 느낌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 전에도 용병답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높은 지위에 있는 귀족 티가 여실히 났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답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고민하던 그녀가 손뼉을 쳤다. 뭔가 방법을 찾은 것 같았다.
그녀가 내게 물었다.
"네 나이라면, 몇 년 뒤에는 제대로 된 교육기관에 가야겠지?"
교육 기관이라. 수도원이나 수도에 있는 왕립 학원 같은 걸 말하는 건가?
둘째 형이…… 슬슬 수도로 유학을 할 때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 제대로 된 귀족이라면 십 대 초중반에 유학을 떠나거나 학원 같은 교육 기관으로 가는 것 같기는 한데.
뭐, 아예 어릴 때 수도원으로 간 누나도 있고…….
하지만, 내 경우는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다.
상속 능력은 얻었지만 반쪽짜리 귀족이니 밖으로 내돌릴 것 같지도 않고, 공작부인이 멀쩡하게 잘 계시니 난 이대로 저택 내에서 지내게 되겠지.
나는 그런 뜻으로 고개를 저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가문 이름으로 초청장을 보내면 공작께서도 마냥 거절하시지는 않으시겠지. 더구나, 너 같은 천재를 그냥 버려둘 리도 없고."
그녀의 말에 중년 기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시국에 정식 초청장은 조금 고민하시는 게 좋지 않을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별수 없습니다. 그는 외인이 아니게 돼 버렸으니까요. 확인해 봐야 할 것도 많고. 다들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말에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기절하였던 동안에 벌어진 일을 그에게 말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비밀이라는 걸까?
그런데 설마 초청이라는 게 생체 실험실로 오라는 것은 아니겠지? 실험실 모르모트가 떠올라 등골이 잠깐 오싹했다.
나는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버렸다.
그보다 공작도 고민해 봐야 할 초청장이라니.
그녀는 도대체 어떤 귀족인 걸까.
"저기,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아니, 그보다 '불새 사냥꾼'으로 초청장을 보내는 건 아니겠죠?"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그냥 불새 사냥꾼이라는 용병으로 헤어지려고 했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제대로 된 이름을 알려 줘야겠지."
드디어 이름을 듣게 되는군.
기사가 눈짓을 주자, 후안은 멀찍이 자리를 피했다.
그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카트리네 드 라텐하마르. 라텐하마르 백작가의 둘째 딸이지."
이어서 카트린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그녀가 말했다.
백작가라니. 역시나 고위 귀족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둘째라니. 여자에다 둘째면 후계자가 아닐 가능성이 컸다.
지금까지 하는 행동이나 말을 보면 가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거기다.
우리 공작 각하께서 백작가의 초청장에 휘둘린다고? 뭔가 정치적인 고려가 아니면 쉽지 않을 텐데.
나는 앞뒤가 잘 안 맞는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그때 머릿속에서 백작가의 이름이 맴돌았다.
어라, 잠깐. 라텐하마르 백작가? 분명 어디서 많이 들은 이름인데.
곧이어 한 사람이 떠올랐다.
설, 설마?
나는 급하게 물었다.
"잠깐만, 분명 세 번째 왕비님 성이 라텐하마르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내 말에 그녀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맞아. 내 언니야."
그 말에 나는 입을 딱 벌렸다.
우리 왕국의 세 번째 왕비이자 왕국의 하나밖에 없는 공주의 어머니가 그녀의 언니라니.
그렇다면, 공작가에 보내는 초청장은 왕비 가문에서 보낸다는 거였다.
당연히 공작도 거절하기가 쉽지 않겠지. 확실히 이해했어.
아니, 아니, 정신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세 번째 왕비의 가문이라니. 말도 안 돼. 그냥 잘나가는 가문이 아니잖아. 왜 하필 외척인데.
이거 잘못하다가는 왕국 정치에 휘말리게 될 수도 있잖아!
거기다 공작에게 어떻게 설명할 건데!
이어 그녀는 나에게 주의를 주었다.
"안에서 있었던 일은 다른 사람에게 비밀로 했으면 해. 계약에 있던 내용이고, 우리 가문에는 중요한 일이니까."
충분히 이해되는 말이지만, 이렇게 되면 더 설명하기 어려워지잖아!
하지만, 그녀는 내 생각과 상관없이 이야기를 이어 갔고,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한 뒤에 두 사람은 먼저 폐허가 된 마을을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자, 바짝 긴장하고 있던 후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지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도대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기사가 들이닥치지를 않나, 세 분 다 온통 젖은 채 나오고."
전에는 이런 질문을 안 하던 후안이었지만, 이번에는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정체를 알았으면 아예 묻지도 못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말을 하지는 못할 것 같고.
그래도 나를 위해 기사를 막아선 후안이었으니 돌아가는 길에 몇 가지 비밀을 빼고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돌아가기 전, 나는 숲에 먹혀 버린 마을을 돌아보았다. 우물이 마른 뒤, 사람들이 떠나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이제 말랐던 우물에 물이 채워졌으니, 이 마을도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내 말에 후안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무리일 겁니다. 전에 마을이었을 때는 숲이 이곳까지 밀고 오지 않았으니까요. 마을이 숲속에 묻혀 버렸으니 사람들이 돌아오긴 힘들 겁니다. 뭐, 땅속에 물길이 만들어졌으니 오히려 숲이 더 커질지도 모르고요."
그럴듯해 보이는 후안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잘못된 일을 되돌린다고 해도, 이미 지난 일들이 무조건 원래대로 돌아갈 리는 없었다.
그런 것이 가능한 것은 진짜 과거로 돌아가 제대로 된 선택을 할 때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선택이라…….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일들이 반복되었다. 여러 가지 남은 것들이 있었고, 앞으로 또 다른 많은 일들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숲을 떠나 도시로 돌아오며, 과연 나는 지금 제대로 된 선택을 하는 중인지 계속 고민을 했다.
그 와중에도 허리에 찬 단검과 주머니에 가득 담긴 금화들은 큰 위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