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제23편 선물이 뭔가 이상하다 (1)
마물들은 몰려오는 와중에 들려오는 환상과 환청이라니.
거기다 허세가 가득한 환청은 할 말을 잃게 할 정도였다.
'힘을 원하는가'라니.
이래서야 대답은커녕, 전투도 벌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마나를 끊어도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고, 단검을 허리에 꽂아 놓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저주인지, 아니면 반복되는 죽음 때문에 일어난 후유증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필 이런 때에 일어나다니.
어쩔 줄 몰라 헤매는 나에게 불새 사냥꾼의 외침이 들려왔다.
"붉은 놈들을 잡을 테니까 나머지 놈들을 부탁해! 시간만 벌어 주면 돼! 후딱 잡고 도와줄게."
그녀의 지시는 무척이나 이치에 맞았다.
달려오는 회색 놈들은 하나, 둘, 세 마리.
처음 만났을 때라면 도망도 어려웠을 거고, 여러 차례 반복한 지금도 겨우 도망을 치며 시간을 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의 지시는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내가 멀쩡하다면…….
하지만, 환상이 시야를 가리고 환청이 귀를 때리는 상황에서 도망을 치기도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고 넋을 놓고 당할 수는 없었다.
저주이건 후유증이건 상관이 없었다.
나는 목이 터져라 외쳤다.
뭐가 되었건 눈에서 안 보이면 그만이었다.
"좋아!"
카랑카랑한 어린 목소리가 석실 통로에 울려 퍼졌다.
달려오던 마물들이 움찔거릴 정도였고, 불새 사냥꾼도 놀란 눈치였다.
"오, 시원시원한데, 그럼 부탁해!"
문제는 그녀가 오해해 버리고 말았다.
댁에게 한 말이 아닌데…….
화끈하게 오해를 한 불새 사냥꾼이 붉은 마물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회색 마물들이 나에게 덮쳤다.
마물들이 나를 향해 두 발톱을 휘두르는데도 난 도망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불타는 새의 환영이 온몸을 뒤덮었기 때문이었다.
온몸에 불이 붙고, 살이 타들어 갔다. 뼈가 익고 피가 끓어올랐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뒤덮었다.
하지만, 나는 고통 속에서도 주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일종의 환상통인가? 거기다 덤벼들던 마물들은 왜 멈춰 있는 거지?'
정말 대단한 고통이었지만, 그렇다고 죽을 고통은 아니었다.
이미 죽음을 여러 번 겪은 나로서는 이 정도 고통은 충분히 감내할 만한 것이었다.
일종의 적응인가, 아니면 포기일지도…….
그런 생각이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그런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몸이 불타고 고통이 느껴졌지만, 불길 아래의 피부는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역시 이건 환상과 환청에 이은 환상통이었다.
환상통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더 통증이 견디기 쉬워졌다.
거기다 내 몸과 주변 사물이 움직임을 멈춘 것도 아니었다.
마물들이 휘두른 발톱이 아주 느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슬로우 카메라를 극도로 느리게 돌린 것 같은 움직임.
느리게 움직이는 것은 마물만이 아니었다.
마물에게 달려가는 용병도, 바람도,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도 모두 느리게 아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니, 모두 느려진 게 아니었다. 이건 내 정신이 수십 배, 수백 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통을 이겨 내며 낯선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조금씩 변화가 느껴졌다.
몸 밖에서가 아닌, 내 몸속에서 생기는 변화였다.
꿈틀.
나를 태우던 불길이 내 몸속으로 스며들었고, 그 불길은 내 몸속에 있는 마나를 불태웠다.
잔잔하던 마나가 마구 끓어올랐고, 점점 변해 갔다.
특별한 색이 없이 반투명하던 마나가 붉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피부 아래에서 몸 깊은 곳까지. 팔다리에서 가슴과 머리까지. 모든 마나가 끓어오르고 변해 갔다.
모든 마나가 끓어오르는 순간.
파악!
몸속의 마나가 단검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불타는 듯한 마나가 팔과 손을 지나 단검에 밀려들었고, 단검은 맛있는 먹이를 먹는 것처럼 마나를 받아들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쭈욱.
마나가 밀려들수록 검의 길이가 점점 길어졌다.
아니, 검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밀어 넣은 마나가 검 끝에서 검의 형태로 계속 길어졌다.
유명한 SF영화의 광선 검 같은 모습. 하지만, 길어진 마나 검은 눈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내 마나가 늘어났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눈으로는 조금 공간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환상이 사라졌다. 환청도 느껴지지 않았다.
들끓던 열기도 느껴지지 않고, 고통이 사라졌다.
달라진 마나만이 내 몸과 단검으로 흐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캬아아악.
눈앞에서 굼벵이처럼 움직이던 마물의 발톱이 다시 움직였다.
바람이 피부를 가르고, 마물의 입김이 얼굴을 달궜다.
동시에 나도 검을 휘둘렀다.
짧은 단검이라 발톱들을 전부 막지 못하겠지만, 전혀 걱정이 들지 않았다.
서걱, 서걱. 서걱.
예상대로였다.
마물이 휘두른 발톱은 다음 순간 잘려 나간 앞다리와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무엇을 잘라 낸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았고, 단검에는 피도 묻지 않았다.
당연했다. 마물의 앞다리를 자른 것은 단검이 아니라 단검에 덧씌워진 마나 검이었다.
단검 길이의 세 배 정도 되는 마나로 이루어진 날이 단단한 마물의 앞다리를 순식간에 잘라 낸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힘이 생겼는데, 도망치면서 시간을 벌 필요는 없었다.
이유나 여타 문제는 닥친 일을 해결하고 난 뒤에 생각할 문제였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검날로 앞다리가 잘려 나간 마물의 목을 잘라 버린 뒤.
뒤이어 달려드는 회색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검날이 보이지 않는 검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대단한 무기였다.
허공에 단검을 휘두른다고 생각한 마물은 달려드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바로 마나로 이루어진 검에 쓸려 나갔다.
순식간에 마물 두 마리를 쓰러뜨렸다.
마지막 마물은 뭔가 이상하다고 깨달았는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상황을 살폈다.
하지만, 덤비지 않으면 내가 가면 그만이었다.
역시 머리가 좋은 마물이었다.
단검이 다른 검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다른 마물들과 다르게 열심히 몸을 피했지만, 보이지 않는 검을 모두 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물은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처음 불새 사냥꾼과 싸우던 마물과 같은 모습이었다.
'이런, 벌써 마나가 딸리는데…….'
마나가 달라져서인지, 잠깐 싸웠다고 마나가 부족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역시, 마냥 좋을 리가 없었다.
나는 바로 마물에게 달라붙었고, 쏟아지는 피를 뒤집어쓰면서 마물에게 검을 휘둘렀다.
크으으으응!
다행히 마나가 떨어지기 전에 마물을 쓰러뜨렸다.
아직도 몸속을 질주하는 붉은 마나.
나는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단검을 바라보았다.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단검 위로 거친 마나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설마, 이대로 마나가 전부 변해 버린 건가?
좋은 무기를 얻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내 본래 마나가 바뀌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상속 능력까지 바뀌어 버린다면 큰일이었다.
나는 단검을 허리춤에 꽂아 넣었다.
스스스스스스.
아, 다행스럽게도 마나가 다시 바뀌기 시작했다.
붉은 마나가 물러나고, 다시 투명한 내 마나가 점점 돌아왔다.
빠르게 원래의 마나로 돌아왔고, 다시 마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한번 단검을 잡아 보았다.
다시 붉게 변하는 마나. 그리고 차오르던 마나는 멈춰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단검에서 손을 떼고, 다시 쥐어 보는 것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몸속의 마나가 바뀌었다.
"마나 말고, 몸 상태도 좀 바뀌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 표현은 못 하겠지만, 몸의 근육과 신경 같은 것도 마나의 움직임에 걸맞은 모습으로 바뀌는 것 같았다.
"이 검을 잡으면 능력이 바뀌는 걸까?"
아니면, 전생의 게임 같은 직업 체인지 아이템 같은 걸지도.
나는 조금 전에 보았던 환상을 떠올렸다. 불타는 새와 그가 외친 질문.
-힘을 원하는가!
닭살이 돋는 말이었지만,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내가 보았던 환상을 평범한 환상으로 치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의문이 커질 수밖에 없었지만, 내 옆에는 의문을 풀어 줄 사람이 있었다.
나는 단검을 허리춤에 매달고, 아직도 싸우는 중인 불새 사냥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나에게 외친 말과 달리, 꽤 팽팽한 싸움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전에도 보았지만, 저 붉은 마물들은 회색 마물들과 차원이 달랐다.
살쾡이와 표범의 차이랄까.
더 강한 피부, 덩치에 걸맞지 않은 더 빠른 움직임, 그리고 그녀의 보이지 않는 검을 피해서 움직이는 지능까지.
여행 중에 보았던 마물들과 전혀 달랐다.
여행 중 들었던 나이 든 기사의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이런 곳에 있는 마물들은 대전쟁 때 낙오된 놈들과 그 자식들이야. 제대로 된 놈들은 대전쟁 때 마계로 돌아갔거나 봉인지로 모여들었지. 이런 곳에 남아 있을 리가 없지.'
과연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았을 마물이 동굴을 벗어나지 못해 남아 있게 된 것일까?
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자신보다 훨씬 약해진 자식들을 키우면서?
그래서 저렇게 화가 난 것일까?
크앙!
내 주변의 마물들이 모두 쓰러진 뒤, 붉은 마물들은 더 무섭게 날뛰고 있었다.
뭔가 나름 안타까운 사연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적이 된 이상 그런 사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 불새 사냥꾼을 도와야 할 듯했다.
마물들은 분노한 와중에도 착실하게 그녀를 상대하고 있었다.
피투성이 되면서도 그녀의 보이지 않는 검의 간격을 확인한 것 같았다.
한 마리가 앞에서 그녀를 상대하고, 다른 한 마리는 옆에서 틈을 엿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미 몇 차례 자리를 바뀐 모양. 제대로 된 타격을 입히지 못한 채 그녀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역시 마나가 부족한 것 같았다.
"젠장! 젠장! 잘난 척하다가 이게 뭐야!"
그녀는 검을 휘두르며 내가 들릴 정도로 자책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뒤에서 소리가 멈추자, 내가 도망쳤거나 죽었는지 아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너무 시간을 끌었다고 생각하는 중이려나?
나는 그녀를 향해 걸어가며 다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화아아악!
단번에 바뀌는 마나. 붉게 변한 마나가 들끓기 시작했다.
열심히 싸우는 그녀의 뒤쪽에 서서 나는 입을 열었다.
"도와드려요?"
갑작스러운 음성에 그녀가 급하게 몸을 뺐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엑? 살아 있었어?"
적과 싸우는 도중에 고개를 돌리다니, 내 목소리가 무척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마물들과 멀쩡한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그녀는 나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 때문일까. 그녀는 소리 없이 달려드는 마물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위험해!"
그녀는 내 고함에 겨우 정신을 차렸고, 검을 휘둘러 정면에서 달려오는 마물의 발톱을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기회를 노리던 다른 마물을 놓치고 말았다.
빠르게 들어오는 발톱.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 순간, 그녀는 발톱 옆을 지나가는 일렁거림을 보게 되었다.
까아앙!
발톱이 튕겨 나갔고, 그녀는 겨우 위기에서 벗어났다.
"휴, 늦지 않았네요. 싸우는 중에 뭐 하는 거예요. 정신 차려요!"
내 고함에도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녀와 똑같은 마나가 일렁이는 내 손에 든 단검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