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제18편 던전 탈출 (1)
"우앗!"
어두웠던 시야가 다시 밝아지고, 메시지가 내 눈앞을 가리는 순간, 나는 다시 아래로 추락하고 있었다.
죽기 전의 고통이 환상통으로 남아서 정신을 어지럽히고, 메시지가 주변을 살피지 못하게 했지만, 난 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휘이이잉!
빠르게 떨어지는 몸.
귀에 마나를 불어넣으니 수면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다음 해야 할 게 뭐지? 아! 맞다.'
물속에서 검 때문에 고생한 경험이 떠올랐다.
팔 쪽으로 급하게 마나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물에 빠지기 전에 힘껏 팔을 휘둘러 검을 던졌다.
으드득.
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회복력이 좋은 어린 몸을 믿었다.
흐린 빛 위로 검이 날아가는 것이 보이고.
풍덩!
나는 바로 물에 빠졌다.
짧은 충격이 몸을 훑고 지나간 뒤,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저번 삶에서 보았던 것처럼 작은 저수지에 가까운 이 웅덩이는 무척 깊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웅덩이의 깊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라앉는 것이 멈춘 순간, 나는 바로 물 위를 향해 헤엄쳤다.
"푸아!"
역시 무게가 가벼워서인지 그리 깊게 가라앉진 않았다. 나는 금방 물 위로 올라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깜깜한 지하 저수지에 빛 하나가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빛이 수면에 가까워졌고, 이어 불새 사냥꾼이 물 위로 올라왔다.
푸아!
"알렉스?"
물 위로 올라온 그녀는 나부터 찾았다.
"여기예요."
"아, 무사했구나. 다행이다."
내가 무사한 것을 알자, 그녀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먼저 검을 날린 방향으로 헤엄을 치니, 그녀도 뒤를 따랐다.
다행히 검을 반대편으로 날리지 않아 금방 마른땅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런데 검은 어디 있어? 물속에 버린 거야?"
"아뇨. 저기 있어요."
다행히 검은 물에서 얼마 벗어나지 않은 땅에 꽂혀 있었다.
나는 검을 향해 걸어갔다.
"검이 왜 거기 있어?"
불새 사냥꾼은 내 뒤를 따라오며 물었다.
"물에 빠지기 전에 공중에서 던졌어요. 물에 빠지면 검 때문에 수영하기 어렵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맙소사,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을 했단 말이야?"
음. 솔직히 전부 다 그 시간에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검을 챙기자, 그녀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허리에 찬 등 덕분에 천장에 난 검은 구멍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미안. 제단이 무너질지는 몰랐어.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열린다고 했었는데……."
저번 삶에서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도 무척이나 미안해하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구멍들처럼 위에도 구멍이 난 게 맞죠?"
내가 공터 벽에 숭숭 뚫려 있는 동굴들을 가리키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봤어? 맞아. 우리가 떨어지던 구멍에 동굴들이 많이 뚫려 있었어."
자, 여기까지는 저번 삶과 비슷한 진행이었다. 어차피 마물을 처음 만났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으니, 나는 그때와 같이 움직였다.
나는 물에 젖은 겉옷을 벗은 뒤, 불새 사냥꾼에게 부탁했다.
"망토를 말린 뒤에 제 옷도 부탁드릴게요."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근데 내가 그 기술을 알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럴 것 같았어요."
신기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녀는 망토를 벗은 뒤, 마나를 밀어 넣어 옷을 말렸다.
이어 내 겉옷도 말려 주었고, 나는 감사를 표한 뒤 옷을 다시 입었다.
"저 동굴들이 천장 구멍에 난 동굴들과 이어져 있을 거야. 동굴 하나를 정해서 위로 올라가는 길을 찾으면 될 것 같아."
그녀의 말에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럼 저 동굴들을 만든 장본인도 죽지 않았다면 아직 이 지하에 있지 않을까요? 우리가 물에 떨어지는 소리가 상당했으니, 만약 살아 있다면 우리를 찾으러 올 테고요."
내 말에 그녀도 급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저번 삶에서 들었던 발소리가 들려왔다.
촤르르르르르.
수많은 다리가 땅을 끄는 소리.
바로 레드 마우스라는 마물들의 발소리였다.
"레드 마우스가 남아 있었나?"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쥐와 곤충을 섞어 놓은 듯한 회색 마물들.
저번 삶과 마찬가지로 나타난 마물들은 세 마리였다.
아니, 세 마리 맞나?
어쨌거나 눈에 보이고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은 세 마리.
나는 온몸에 마나를 불어넣고, 남은 마나를 검에 밀어 넣었다.
또다시 마나가 몸과 검에서 튀어 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디 처박혀서 이 감각을 계속 되새기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마나를 가득 끌어올리는 내 모습을 보고, 불새 사냥꾼이 입을 열었다.
"역시 땅속에서 레드 마우스를 따돌리는 것은 무리겠지?"
그녀가 든 검날에 새겨진 문양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보다 나이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마나인데? 설마 공작가에 '마나 감응력'이 남아 있었나?"
이어서 저번과 똑같은 말을 하는 그녀. 동시에 아차, 하는 표정과 함께 말을 돌리고.
"어쨌거나 생각보다 함께 싸우기에 좋은 동료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우리가 달려가자, 마주 달려오는 마물들.
똑같은 행동 덕분인지, 저번과 마찬가지로 끝에 있는 마물만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달려오는 마물을 보며 숨을 낮게 들이마셨다. 감각을 일깨우고 마물과 호흡을 일치시켰다.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데, 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모든 감각을 일깨운 상태에서 다가오는 마물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정확한 타이밍에 내지른 검.
하지만, 나는 이 검이 맞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역시 마물은 검이 날아오는 순간, 관성을 무시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위로 튀어 올랐다.
한순간에 수 미터를 솟구친 마물.
이랬으니 저번에는 모습을 놓칠 수밖에.
하지만, 지금은 놓칠 이유가 없었다.
거기다 몸이 떠 있는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휘둘러지고 있는 검의 힘을 이용해서 몸을 한 바퀴 돌렸다. 그리고 계속 회전하며 위로 점프했다!
'용사 카를로스' 검술 외전 4장.
'비룡 날아오르기!'
젠장 저번에도 그렇지만, 얼굴이 붉어질 것 같은 기술명이었다.
앞으로도 절대 기술명을 소리 내서 말하지 말아야지.
마음속으로 기술명을 되뇌며 떨어지는 마물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서걱.
쿵!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공격을 당하니 머리 좋은 마물도 어쩔 수 없었다.
마물은 한쪽 다리 두 개가 잘린 채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잘린 다리들은 팔처럼 사용하는 두 앞발이 아니라 몸을 지탱하는 다리였다.
자, 이제 저 무지막지한 속도는 봉인되었고.
나는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땅에 내려선 뒤에 다시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전생이었으면 어지러워서 제대로 착지도 못 했겠지만, 마나로 귀를 보호하고 있는 지금, 내 평행 감각은 피겨스케이팅 선수 이상이었다!
나는 아직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는 마물에게 달려가 계속 검을 휘둘렀다.
마물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다리 하나가 더 날아가 버렸고, 겨우 발톱으로 내 검을 막았을 때는 반대쪽 앞발이 잘려 나간 뒤였다.
이미 승패는 결정이 났다.
나는 흥분하지 않고, 착실하게 마무리를 했다.
남은 발톱들을 검으로 잘라 버리고, 앞발을 자르고, 등 위로 올라가 검을 등에 꽂아 넣었다.
크르르릉!
하지만, 마물은 등 깊이 검이 꼽힌 채로 마구 날뛰었다.
"심장이 있을 만한 곳이었는데……. 구조가 다른가?"
좀 더 테스트해 볼까 했지만, 어떤 변수가 나올지 몰라 나는 검을 뽑아 마물의 목을 날려 버렸다.
쿵.
목이 잘리면 죽는 것은 저번과 다르지 않았다.
'다리를 자르면 고속 이동을 봉쇄할 수 있고, 목을 자르면 확실히 죽고, 예상한 곳에 심장이 없다라…….'
쓰러진 마물에게 생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동료의 싸움을 확인했다.
그녀는 아직 마물 둘과 싸우고 있었다. 저번에는 내가 싸움을 끝냈을 때 마물 하나만 남았었는데.
내가 저번보다 빨리 마물을 처리한 건가?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물 하나는 다리가 몇 개 남아 있지 않았고, 상처투성이라 금방 죽을 것 같았다.
다른 마물도 멀쩡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있었다.
저번처럼 검 끝에 일렁이는 기운이 마물을 베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 관해 신경을 끄고, 쓰러진 마물을 해체하기 시작했다.
죽은 뒤라 마나를 씌우지 않은 검으로도 잘 잘려 나갔다.
배를 갈라 내부를 확인하고, 잘려 나간 다리도 갈라 근육도 살펴보았다.
"젠장, 내부가 뭐 이래?"
마물의 몸속을 확인하고는 나는 질린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물은 식용으로 거의 못 쓰는 거잖아. 연금술사나 대장장이 같은 사람들에게 주면 여러 가지 재료로 사용하지만, 아무튼 먹는 건 무리야."
내가 해체를 하는 사이에 싸움을 끝낸 모양이었다.
내 옆으로 다가온 그녀가 해체된 마물의 사체를 보고 말을 꺼냈다.
물론 언데드형 마물은 썩어 들어가는 몸 때문에 먹는 게 불가능했지만, 이 마물들은 분명 멀쩡하게 살아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내부 구조는 살아 있는 생명체의 내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전생에 생물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소화기관은 큰 위장 하나밖에 없고 심장처럼 보이는 것도 없었다.
위장을 감싼 핏줄이 온몸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고, 근육도 처음 보는 형태로 꼬여 있었다.
곤충 형태도 아니고, 동물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 세계에 온 뒤에도 생명체들은 전생과 그리 다르지 않았는데. 눈앞의 마물은 판타지, 아니 호러, SF영화에나 나올 만한 내부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쩝, 마물들 대부분은 마족과 함께 다른 세상에서 넘어왔다더니. 겉보기와는 다르게 에일리언 같은 거였나."
결국, 미천한 내 생물학 지식으로는 마물을 해체한다고 해도 약점을 찾는 건 무리였다.
"그보다 정말 잘 싸우던데? 웬만한 기사는 순식간에 때려눕히겠어!"
저번보다 나를 보는 시선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더 빨리 잡았기 때문이겠지.
물론 한 번 경험해 봤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칭찬은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움직여도 되지? 이런 놈들이 더 있을 수도 있어. 빨리 탈출하자고."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인지, 그녀는 저번과 다르게 내 의견을 물었다.
'자, 어떻게 할까?'
저번 삶에서는 아무 동굴이나 들어갔다가 앞뒤로 포위를 당해 죽고 말았다.
그때 보았던 마물들의 숫자는 족히 10여 마리 이상.
한꺼번에 싸워서는 절대 이기기 어려운 숫자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가 있는 곳은 벽에 구멍이 숭숭 나 있는 커다란 지하 광장.
중앙에 작지 않은 저수지가 있고, 나머지는 평평한 바닥이었다.
'동굴에 들어가 각개격파를 하는 게 좋을지 아니면 물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치는 게 나을까?'
하지만, 동굴 구조는 마물들이 우리보다 수백 배는 더 잘 알 게 분명했다. 지금 당장 각개격파를 하는 건 무리였다.
나는 저수지를 보았다가, 해체된 마물을 다시 살폈다.
물갈퀴도 보이지 않았고, 무게도 적게 나가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불새 사냥꾼에게 물었다.
"이 마물, 수영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