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제17편 던전 공략 (2)
나타난 것은 쥐를 닮은 커다란 마물이었다.
붉은 눈에 긴 수염, 날카로운 이빨까지. 얼굴을 보면 거대화한 쥐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지만, 머리 아래는 전혀 뜻밖의 모습이었다.
긴 털이 덥수룩한 마물의 몸에는 네 쌍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마치 곤충의 다리처럼 보이는 세 쌍의 다리와 제일 위에 달린 다른 다리보다 배는 크고 길쭉한 한 쌍의 다리.
털로 뒤덮인 머리와 몸통, 그리고 다리를 보면 마물은 쥐를 곤충의 형태로 변형시켜서 거대화한 것처럼 보였다.
"레드 마우스가 왜 여기에……."
옆에서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니, 레드 마우스라고 불리는 마물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드 마우스라는 이름치고 피부색이 붉지 않았다.
오히려 피부색은 회색에 가까웠다.
레드 마우스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검을 치켜들고, 불새 사냥꾼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죠?"
그녀는 나를 보고 다시 다가오는 마물들의 수를 세었다.
다가오는 마물은 총 세 마리.
"땅속에서 레드 마우스를 따돌리는 것은 무리이니까 싸워야지."
숫자를 확인한 그녀는 허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검날에 새겨진 날아오르는 새가 환하게 빛을 발했다.
"약점 같은 건 없나요?"
"대전쟁 이후에 거의 보이지 않던 마물이라서. 움직임이 빨라서 상대하기 귀찮다는 말만 들었어."
저택에 있는 책에도 레드 마우스라는 이름의 마물은 나와 있지 않았다.
결국, 몸으로 부딪쳐 봐야 했다.
다가오는 마물은 우리를 보더니 낮게 으르렁거렸다.
크르르르.
그 으르렁거림은 지옥에서부터 올라오는 더러운 바람 소리 같았다.
조금 떨어진 채로 마물들은 우리를 보고 으르렁거렸고, 나와 용병은 검을 치켜 든 채로 마물들을 노려보았다.
나도 숨겨 왔던 모든 마나를 풀어내고 있었다.
마나를 끌어올리자, 끌고 다녔던 검은 이제 양손으로 충분히 움직일 수 있었고, 커다란 검날에는 희미한 빛이 어려 있었다.
빛나는 내 검을 보고 그녀는 놀란 얼굴이 되었다.
"생각보다 강할 것 같기는 했지만, 이건 나이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마나인데? 설마 공작가에 '마나 감응력'이 남아 있었나?"
마나 감응력? 그거 왕가에서 내려오는 상속 능력일 텐데? 내 마나하고 왕실의 능력하고 무슨 관계가 있다고? 그리고 댁은 그걸 어떻게 아는 건데?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내 눈을 외면했다.
"어쨌거나 생각보다 함께 싸우기에 좋은 동료네."
그 말과 함께 그녀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뭔가 말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따질 상황은 아니었기에 나도 달려오는 마물과 싸울 준비를 했다.
다행히 셋 중 둘은 달려드는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나머지 한 놈만이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달려오는 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부우웅.
각도도 맞았고, 타이밍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손에 걸리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설마 피했어?'
젠장 빠르다더니, 그냥 빠르기만 한 것만이 아니었다!
놈이 어디로 피했는지 보지도 못했지만, 급하게 검을 몸에 붙이고 뒤로 뛰었다.
텅!
검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지며 몸이 뒤로 확 밀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몸을 땅에 붙이고 있었다.
땅에 박아 넣은 마나 덕분에 얼마 밀리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제야 나는 검에 부딪힌 것을 보게 되었다.
마물 앞발에서 솟아 나온 네 개의 발톱이 검을 밀치고 있었다.
끼기기긱.
검과 발톱이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무언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검은 멀쩡했다.
그렇다면.
뚜둑.
검과 힘겨루기를 하던 발톱 두 개가 부러지고, 쥐를 닮은 얼굴이 인상을 쓰며 뒤로 물러섰다.
물러선 마물의 맨 앞 두 다리는 위로 들린 채로 각각 네 개의 발톱이 길게 자라나 있었다.
전생 어디에서 본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제쳐 두고 마물을 노려보았다.
다행히 첫 공격이 실패해서인지 놈도 바로 달려들지는 않았다.
움직임을 놓칠 정도의 속도. 그리고 그 속도를 이용한 예상보다 강한 공격.
거기다 공격했다가 바로 빠지는 것을 보니, 생각보다 지능도 높아 보였다.
마치 속도가 빠른 기사를 상대하는 느낌.
아무래도 마물을 너무 얕잡아 보았던 것 같았다.
후작가로 여행하는 도중에 만났던 마물들은 처음 마물 말고는 전부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었고, 처음 만났던 놈도 이 검의 전 주인이 한 방에 날려 버렸다.
그래서인지 마음 깊숙한 곳에 마물들을 과소평가하는 마음에 생겨 버린 것이다.
"미안. 내가 너무 자만심에 빠졌던 모양이야."
나는 검을 늘어뜨리며 앞에 있는 마물에게 사과를 했다.
그르르릉.
아쉽게도 마물은 내 사과를 안 받아 주었다.
말로 하는 사과는 진정성이 부족한 모양이었다. 역시 사과는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하는 법.
나는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고, 점점 속도를 늦추었다.
검이 몸 앞을 지나 왼쪽 아래로 내려갔다.
검으로 가렸던 몸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마물은 몸을 움찔거렸다.
넘어오지 않네. 역시 상당한 지능이 있는 마물이었다.
하지만, 넘어오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지금 행동은 이어지는 검술의 기수식일 뿐이었다.
그동안 실전 중에는 배웠던 검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단검술에 가까운 근접 전투를 벌이고, 일격으로 승부를 가린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이 검을 쓴 뒤로는 몸에 맞지 않게 힘으로 밀어붙인 일도 있었고.
모두 제대로 된 검술을 쓰기는 어려웠다.
그런 전투에서도 과거에 배웠던 검술이 묻어나와 큰 도움이 되었고, 원래 실전은 그런 법이라는 이야기도 들었기에 아쉽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 계속되니 적이 나타날 때마다 반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번 적은 그렇게 싸울 수 없었다. 실력 차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니고, 편법을 사용하는 적도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배운 검술은 대전쟁 때부터 내려오던 검술이었다.
인간과 싸우기 위한 검술이기도 했지만, 처음 만들 때는 마물과의 싸움을 위해 만들어진 검술.
숨을 가다듬고 정신을 모으자, 눈에 마물의 모습이 가득 들어왔다.
조금씩 떨리는 눈과 움찔거리는 손톱, 입김에 흔들리는 털들.
마물의 호흡과 내 호흡을 맞추고, 내 움직임에 내 마나를 일치시켰다.
우우우웅.
마나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실전에서 마나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제대로 느껴 보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마나는 내 몸속을 크게 휘돌았다. 그리고 검으로 뻗어 나간 마나는 검을 뚫고 마물을 향해 나가려 했다.
몸 밖을 빠져나가려는 마나라니.
아,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건가?
전날 암살자가 마나로 공간을 장악하던 수법의 실마리를 본 것 같았다.
아쉽게도 지금 마나는 검에 묶여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크르르르르.
그렇지만, 마물은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마나의 기세에 눌려 덤빌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덤벼 줄 차례였다.
몸을 땅에 묶어 주던 마나를 반대로 돌려 반발력을 만들었다.
쿵.
동시에 땅을 박찼다.
빠르게 다가오는 마물의 모습.
움찔하던 마물이 어느 순간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조금 전이었으면 모습을 놓쳤을 뻔한 빠른 속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흐린 모습이나마 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었다!
도망친다면 따라가기 벅찬 속도. 하지만 놈은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쿵!
나아가던 발을 땅에 박아 넣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관성은 마나로 풀어 버렸다.
마치 달리던 말이 중간에 딱 멈춘 것 같은 모습.
그리고 남은 관성으로 팔을 움직였다.
부우우웅.
측면으로 붙어 덤벼드는 마물을 향해 크게 휘도는 검. 내 힘과 관성이 더해서 검은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다.
왕실과 공작가 기사들의 기본 검술 중 하나인 '용사 카를로스' 검술 제3장.
'크게 휘젓기!'
너무 싼 티 나는 이름이라 왕실에서도 몇 번이나 이름을 바꾸려 했지만, 차마 왕실의 선조가 지은 이름을 함부로 바꿀 수 없었다나.
어쨌거나 옆에서 날아오는 검에 놀란 마물이 앞발을 들어 올렸지만.
콰직!
검은 마물의 손톱을 모두 부수고, 앞발도 날려 버렸다.
크르르르릉!
쥐를 닮은 입에서 이상한 괴성이 흘러나왔지만, 나는 이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한 걸음 더 다가가, 이번에는 검을 계속 휘둘렀다.
마나의 힘을 이용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검을 마음대로 움직이기는 어려웠다.
나는 배운 검술에 따라 검의 방향만 제어할 뿐이었다.
강한 폭발력이나 의외의 공격은 불가능했지만,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검은 마물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작은 상처만 입으며 검을 피한 마물이었지만, 이어지는 공격에 다리 두세 개가 날아간 뒤, 마물의 폭발적인 움직임도 멈추고 말았다.
그 뒤는 쉬웠다. 마물의 발톱은 내 검을 막지 못했다.
반대편 앞발도 발톱들과 함께 날아가 버렸고, 이어서 쥐를 닮은 목이 내 검에 잘려 나갔다.
쿵.
목이 잘려 나간 마물이 바닥에 쓰러졌다.
약점은 알 수 없었지만, 목이 잘리면 죽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마물의 몸에 검을 찔러 넣어 죽은 것을 확인하자, 겨우 같이 싸우던 동료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만큼 집중했다는 이야기였지만, 또 그만큼 주위를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나는 많이 부족했다.
다행히도, 불새 사냥꾼은 잘 싸우고 있었다.
마물 하나는 다리가 대부분 잘린 채로 죽어 가고 있었고, 남은 마물도 다리 두 개가 잘려 나간 채로 싸우고 있었다.
불새 사냥꾼은 땀범벅이었지만, 상처는 보이지 않았고.
저 정도 실력이면 말을 걸어도 방해는 안 될 듯했다.
"도와줄까요?"
역시 내 말에 반응하는 것은 마물뿐이었다.
마물은 내 목소리에 몸을 움찔거렸고, 몸에 큰 상처가 하나 더 늘어났다.
"와! 벌써 끝냈어? 안 도와줘도 돼!"
보는 것보다 그녀의 목소리는 훨씬 여유로웠다.
전력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찰나, 그녀의 검이 더 빨라졌다.
그리고 마물의 몸에서 솟구치는 핏줄기.
어라? 검이 닿은 건가? 검 길이하고 안 맞는데?
그녀의 검은 무척이나 빨리 움직였지만, 내 눈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분명, 저 검은 마물의 몸에 닿지 않고 있었다.
놀란 눈으로 그녀의 검을 지켜보는 사이에 마물이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 가득한 상처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마물.
저건 분명 과다출혈로 죽어가는 것이었다.
"흠, 약점이랄 부분이 없네. 다리를 잘라서 움직임을 봉쇄하는 게 최선이려나."
역시 전력이 아니었다. 약점을 찾기 위해 시간을 끌었던 것이다.
"와, 실전도 대단하네. 왕국 검술도 제대로 배웠는걸. 일대일이면 웬만한 기사는 이길 수 있겠어."
아니, 댁이 더 대단한 것 같은데. 싸우는 와중에도 내가 싸우는 것을 다 봤다는 말이잖아.
거기다 용병이 내 검술을 어떻게 아는지.
따로 정체를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이대로 같이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체를 알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자, 그럼 가 볼까? 이런 놈들이 더 있을지 모르니까 빨리 탈출하자고."
그녀는 마물들이 나온 동굴을 제외하고 제일 큰 동굴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격렬한 전투를 했지만, 그동안의 훈련 덕분인지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가 들어간 동굴은 위로 뚫려 있었다.
그렇게 열심히 걸음을 옮기던 우리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불새 사냥꾼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게 무슨 말이야?"
쩝, 이 속담은 이쪽 세계에서는 안 통하나.
아무튼 그녀의 말 때문이었는지, 우리는 마물들에게 포위당하고 말았다.
동굴 중간에 나타난 공터에는 열 마리가 넘는 쥐새끼 마물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가 걸어온 동굴은 다른 마물들이 어느새 동굴을 몸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앞뒤가 다 막힌 상황.
옆에서 불새 사냥꾼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력을 숨기는 건 바보짓이겠지?"
그녀의 검이 환하게 빛나고, 검의 끝이 일렁거리는 것이 보였다.
'저게 그녀의 상속 능력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검에 마나를 집어넣었다.
아쉽게도 이번 마물들은 간을 보지 않았다.
크르르릉!
수많은 마물이 우리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고, 우리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일렁거리는 검에 사방으로 날아가는 마물들의 다리와 몸통이 보였지만, 그 모습은 금방 다른 마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마물이 가득했다.
검을 휘둘러 마물을 베어도, 마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리를 잘라 움직이지 못하게 해도 손톱으로 나를 공격했고, 다른 마물은 내 뒤에서 양발을 휘둘렀다.
열심히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 냈지만, 수십 개의 발톱을 검 하나로 막기는 어려웠다.
발톱이 하나둘 몸에 박히고, 손이 잘려 나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제길!"
고통에 비명을 질렀지만, 마물들은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손톱들이 더 밀고 들어왔고, 이어 쥐를 닮은 마물의 입이 크게 벌어져 내 머리를 물었다.
냄새가 지독하잖아.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순간.
콰직.
세상이 어두워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