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제16편 던전 공략 (1)
알렉스와 여자 용병이 떠난 뒤, 후안은 우물 턱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텅 비고 버려져서 숲에 먹혀 버린 마을. 대전쟁과 그 뒤에 남은 마물들 덕분에 이런 마을은 흔하디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전쟁 이후에 더 모여 살게 되었고, 모이는 와중에도 힘없는 평민들은 귀족과 기사들의 힘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뭐, 대전쟁 전의 귀족들은 아무런 힘도 없이 평민들을 지배했다고 하니까. 그때보다는 좋은 거려나."
고생하는 평민과 빈민들이 들으면 멱살을 잡힐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후안은 지금 시스템에 별로 불만이 없었다.
영지를 다스리는 공작님도 훌륭하신 분이시고, 후계자인 시몬 님도 아직 어리지만 나쁜 소문 없이 잘 크시는 중이었다.
영지도 공작님 덕분에 다른 영지들보다 안전하고 평안했고, 병사 수입도 먹고살기에 충분했다.
근래는 갑자기 아프신 어머니 때문에 힘들어지기도 했지만, 알렉스 공자님 덕분에 이제는 걱정할 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주변에서 걱정이 많아졌다.
그가 서자인 알렉스 공자의 지시를 받고 같이 다니게 되자, 동료와 친구들은 그가 잘못된 줄을 잡았다고 걱정을 해 주었다.
실력이 있어도, 사람이 좋아도, 귀족가의 서자는 끝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였다.
건강해지신 어머니도 그를 걱정하셨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의 결정에 반대하지 않으셨다.
"도움을 받았으면 갚는 게 사람이 할 일이다. 충분히 갚았다고 생각되었을 때까지는 도와주거라."
그도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의 걱정처럼 서자에게 줄을 대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물론, 알렉스 공자는 나이답지 않게 똑똑하고 어른스러웠고 곁눈질로 본 실력도 웬만한 기사 이상이었다.
그렇다고, 아직 어린 소년에게 줄을 대서 출세를 노리는 것은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단지 어머니의 말처럼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그를 돕고 있을 뿐이었다.
"몸을 의탁하는 것은 좀 더 큰 다음에 생각해 볼까?"
물론, 그전에 알렉스에게 문제가 생겨 자신도 휘말릴 수 있었지만, 그 정도 위험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도 죽을 수 있겠지만.
'목숨값은 목숨으로였나?'
그는 기사들이 술집에서 호기롭게 떠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렇게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는 도중.
스아아아아.
주변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숲 한쪽을 노려보았다.
요새가 있는 방향에서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철컥. 철컥.
쇠붙이로 만든 발이 바닥을 밟는 소리였다.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숲에서 판금 갑옷을 뒤집어쓴 기사가 나타났다.
온몸 전체를 판금 갑옷으로 두른, 중장비 기사.
그의 등에는 긴 창과 대검이, 허리에는 전투 도끼, 워해머가 매달려 있었다.
이런 숲속으로 저런 갑옷을 입고 들어오다니, 제대로 된 기사가 아니면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후안은 기사를 보고 표정을 굳혔다.
기사가 입고 있는 갑옷은 무척이나 섬세하게 잘 만들어졌지만, 영지 기사들이 입는 갑옷과는 전혀 달랐다.
거기다 갑옷 어디에도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문양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소속을 감추는 기사라니. 그런 자가 좋은 일로 찾아올 리가 없었다!
철컥. 철컥. 척.
기사는 후안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앞에 서자, 후안은 몸이 딱딱하게 굳고 목 뒤에서 식은땀이 마구 쏟아졌다.
'이게 말로만 듣던 기사의 살기인가?'
마나를 내뿜어 사람을 굳게 만든다는 기사와 귀족들의 수법에 후안은 바로 질려 버렸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입은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레시아 공작의 병사인 후안입니다. 공작의 숲에 무슨 볼일이십니까?"
고개는 숙일 수 없었지만, 그는 최대한 정중한 어조로 자신이 공작의 병사고, 이곳이 공작의 땅이라는 것을 주장했다.
"이 영지의 병사는 강단이 있군."
묵직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갑옷 안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만 들어도 제대로 된 기사였다. 그것도 경력이 오래된 기사.
다행히 검부터 쓸 것 같지 않아 후안은 살짝 안도했다.
"여기로 내가 찾는 용병이 온 것 같은데,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아나?"
하지만, 그 안도는 그가 다음 말을 꺼낸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용병이요? 제가 왔을 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긴 저 혼자입니다."
기사는 후안의 대답을 듣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살피더니 바로 우물을 쳐다보았다.
"흠. 우물 안으로 들어간 거군. 아쉽지만 여러 번 놓치는 바람에 자네의 거짓말에 놀아 줄 시간이 없어."
기사의 말에 후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목숨을 걸 일이 이렇게 빨리 올 줄 예상치 못했다.
이건 나뭇가지로 쇠몽둥이를 상대하는 꼴인데.
그렇다고, 이대로 목숨을 구걸할 수는 없었다.
'이 정도면 목숨값으로 충분하려나?'
아쉽게도 그리 도움이 안 되는 발악이라 아쉬울 뿐이었다.
"흐웁!"
후안은 그게 숨을 들이켠 뒤에 기합을 내질렀다.
기사들에게 주워들은 살기를 푸는 방법이었다.
다행히 강하게 걸린 게 아닌지 몸이 움직였다.
후안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기사도 허리에 찬 망치를 잡았다.
"그냥 굳어 있었으면 편했을 텐데……."
아쉬워하는 기사의 말을 들으며 후안은 앞으로 달려갔다.
부웅.
그가 기사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그 검은 갑옷에 감싸인 기사의 손에 막혔다.
다음 순간, 그의 눈에 망치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부우우우웅!
후안은 눈을 감았다.
* * *
첨벙. 첨벙.
짧은 충격이 몸을 훑고 지나간 뒤, 나는 물속 깊이 잠긴 것을 알게 되었다.
먼저 떨어진 바위 조각들로 아래에 물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떨어졌지만, 예상보다 물이 깊은 것 같았다.
우물 밑 무덤 아래에 물웅덩이라니.
직접 경험하고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이놈의 검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열심히 손발을 저었지만, 몸은 도무지 위로 올라갈 생각을 안 했다.
검을 버리고 올라가면 되겠지만, 이런 곳에서 검을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크지 않은 손이 내 뒷덜미를 잡아챘다.
여자 용병, 불새 사냥꾼이었다.
그녀는 내 뒷덜미를 잡고 위로 헤엄을 쳤다. 그녀가 힘을 쓰자, 그녀와 나는 쑥쑥 위로 올라갔다.
푸악.
물 위로 올라온 나는 그녀의 도움으로 웅덩이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지쳐서 헐떡이는 내 눈에 밝은 빛이 보였다.
그녀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등에서 나는 빛이었다.
그녀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등을 챙긴 것이다.
등은 물속에 들어갔다 왔는데도 아직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물속에서 나를 찾은 것도 저 등 덕분이었다.
"헉, 헉, 신기한 등이네요. 방수되는 등이라니."
내 말에 그녀는 허리에 찬 등을 툭툭 두드렸다.
"휴, 용병 일을 하려면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니까 연금술사에게 큰돈을 주고 구했어."
벌써 10년을 살았는데도 이 세상의 기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중세에서 빌빌대는 세상인데 방수가 되는 등이라니.
완전 오버테크놀로지잖아!
거기다 용병 일 때문에 구했다는 그녀 말은 믿기가 어려웠다.
그게 아니라 조상의 유적을 찾기 위해서겠지.
어쨌거나 멀쩡한 등의 빛으로 보게 된 웅덩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적어도 작은 저수지 정도의 크기.
외곽에 떨어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헤엄치다가 지쳐 검을 버렸을지도 몰랐다.
"아니, 제단이 무너지는 거였으면 미리 알려 주셨어야죠."
내 말에 그녀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나도 몰랐어. 그냥 아래로 향하는 통로가 열린다고 들었었어."
그녀와 나는 위를 올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한 천장 가운데 난 큰 구멍. 폭이 10m는 넘어 보이는 구멍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끝에 우리가 떨어져 내린 무덤이 있겠지만, 등의 빛은 그곳까지 닿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구멍은 원래 막혀 있었을 터였다.
'너무 오래된 건가.'
벽에 사람이 지나갈 정도의 틈이 생긴 것처럼 제단 아래의 통로도 시간의 흐름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저길 다시 올라가야 하는 건가요?"
말을 하면서도 내심 고개를 저었다.
올라가야 할 곳은 저수지 위. 천장에 난 구멍이었다.
저수지가 있는 이 공간은 저수지 외에는 그리 큰 공간은 아니었지만, 벽을 타고 올라가 천장에 매달려 구멍까지 가기는 어려워 보였다.
거기다 구멍 속으로 한참을 올라가야 하는 상황.
등산 도구도 없이 올라가기는 무리였다.
어이없는 상황에 자살을 떠올렸지만.
"젠장, 그럼 또 떨어질 뿐이잖아!"
눈앞에는 아직도 메시지가 보이는 중이었다.
맙소사. 이젠 죽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잘못하다가는 이 지하에서 영원히 시간을 반복할지도 몰랐다.
그럴 수는 없었다. 죽기 전에 빠져나가야 했다.
그때, 갑자기 소리를 지른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동안, 벽에 동굴이 여러 군데 뚫려 있는 것을 봤어. 우리가 떨어진 구멍도 그 동굴들이 원인이겠지."
그녀는 등 덕분에 떨어지면서도 주변을 볼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기 보이는 동굴들과 똑같은 모양이었어. 아마 저 동굴들이 천장에 난 구멍 속 동굴들과 이어지지 않았을까?"
그녀는 주변의 벽을 가리켰다.
저수지가 있는 이 지하 광장의 벽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작은 동굴에서 두 사람이 양팔을 벌리고 지나갈 큰 동굴까지.
그녀의 말을 들으니, 겨우 안심이 되었다.
역시, 그냥 죽으란 법은 없었다.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목표가 정해졌으니 움직여야 했다.
나는 우선 겉옷을 벗어 물기를 털었다. 움직이려면 몸이 가벼워야 했다.
내 모습을 보고, 그녀도 망토를 벗었다.
망토 안에는 몸에 딱 맞는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죽 갑옷을 입은 그녀의 몸매는 중성적인 얼굴과 달랐다. 거친 용병들이 보면 휘파람을 불며 쫓아다녔을 것 같았다.
그제야 그녀가 망토를 고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마나를 흘려 넣으며 망토를 털자, 망토에 있던 물기가 금방 말라 버렸다.
저런 방법이 있었다니.
나도 그녀를 따라 겉옷에 마나를 흘려 넣어 보았다.
역시, 쉽지 않았다.
"이리 줘. 그게 쉬운 기술이 아니야."
내가 삽질을 하는 것을 보고 그녀가 직접 내 겉옷도 말려 주었다.
꽤나 유용한 마나 활용법이었다. 헤어지기 전에 꼭 배워야 할 것 같았다.
그녀 덕분에 뽀송뽀송해진 겉옷을 다시 걸치고 검을 들었다.
"그럼 어느 동굴로 갈까요?"
"글쎄."
내 말에 그녀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움직이기 편해야 할 테니 제일 큰 곳으로 가자."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내 검을 보고 동굴을 결정했다.
검이 없었으면 작은 몸 덕분에 아무리 작은 동굴도 지나다닐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이 지날수록 검을 잘못 가져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제일 큰 동굴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였다.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저 동굴들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겠죠? 여기가 석회암 지대나 화산 지대도 아닌 것 같고……."
"아……. 설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이 아니라면 무언가 동굴을 만든 놈이 있을 게 분명했다.
운이 좋다면 이미 오래전에 다 죽었을지도 모르지만.
촤르르르르르.
동굴들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보니 운이 좋지는 않은 것 같았다.
소리가 점점 커지고, 동굴의 어둠 속에서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보다 커 보이는 붉은 눈을 한 처음 보는 생명체였다.
옆에서 그녀의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깊은 곳에 마물들이 남아 있다니……."
혹시나 했지만, 역시 마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