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제15편 비상하는 불새 (3)
지하에서는 오래 걸었던 길이었는데, 이렇게 땅 위로 걸으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길에서 벗어나 숲으로 들어온 지 1시간이 지나기 전에 우리는 버려진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은 저번 삶에서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무너지고, 숲과 동화되어 가는 집들과 흔적도 남지 않은 텃밭들.
우물도 마찬가지였다.
저번 삶에서 아드리아와 내가 탈출했던 우물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반쯤 무너진 채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오랜 시간 사람이 들어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준비한 줄을 우물 옆 나무에 묶은 뒤 후안에게 말했다.
"오기 전에도 말했지만, 후안은 여기 남아서 지켜 주었으면 좋겠어."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비밀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았다.
역시 후안은 자신의 위치를 잘 알았다.
"네. 알겠습니다."
짧은 그의 대답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오늘도 이곳에 왜 온 것인지, 내가 불새 사냥꾼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묻지 않았다.
나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아니면 어머니의 치료비를 준 은인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입이 무거운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묻고 싶은 것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할까요?"
자신이 기다려야 할 마지노선을 알려 달라는 이야기였다.
"해가 질 때까지."
"알겠습니다. 해가 진 뒤에도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저택에 알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요새의 지하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출구로 들어가는 것이니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후안과 나는 묶어 놓았던 줄에 내 검을 묶어서 우물 아래로 내려보냈다.
철썩.
잠시 뒤, 마른 우물 바닥에 검이 닿는 소리가 들려왔고.
휙.
내가 먼저 우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 줄을 안 잡고 가시면……."
위에서 후안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계속 벽을 박차며 아래로 떨어졌다.
어차피 저번 삶에도 아드리아와 나는 아무런 보조 장비 없이 이 우물을 올라왔었다.
그때보다 실력이 더 좋아지고 몸 상태도 좋은데 내려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예상대로 내 뒤를 따라 불새 사냥꾼이 뛰어내렸다.
그녀는 벽에 발을 대고 속도를 줄인 나와 달리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슈우욱!
그녀는 내 옆을 지나 먼지 바닥에 내려섰다.
쾅! 츄악!
큰 소리와 함께 바닥에 깔려 있던 물이 높이 치솟아 올랐다.
턱!
뒤이어 나도 바닥에 내려섰다.
물이 튀어 엉망이 되어 버렸지만, 우물과 연결된 동굴은 저번 삶과 다르지 않은 곳에 그대로 있었다.
"저리로 가면 되는 거지?"
"네."
그녀는 품에서 꺼낸 등에 불을 붙인 뒤, 한 손에 들고 동굴로 들어섰다.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그녀가 흥분한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말수가 줄고, 지금처럼 서둘러 움직였다.
거기다 내가 어떻게 이곳을 찾았는지 궁금할 텐데, 그녀는 묻지 않았다.
나는 흠뻑 젖은 검을 줄에서 푼 뒤에 검을 끌고 그녀를 쫓았다.
동굴을 지나가면서 저번 삶과 같이 동굴의 생명체를 여럿 만났다.
마물은 아니었지만, 지상의 생명체와는 꽤나 모습이 다른 생명체들이었다.
곤충이나 눈이 퇴화한 동물 중 많은 수가 그녀가 들고 있는 등의 불빛을 보고 몸을 피했지만, 일부는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도 늦추지 못하게 했다.
앞장선 그녀가 열심히 검을 휘둘러 준 덕분에 나는 품속에 넣어 둔 단검을 뺄 필요도 없이 큰 검을 질질 끌고 그녀의 뒤를 따르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은 뒤, 우리는 동굴을 가로막고 있는 철문 앞에 도착했다.
철문에도 커다란 문양, 비상하는 새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아, 저번에는 반대로 나와 못 본 거였구나.'
불새 사냥꾼은 철문에 그려진 문양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나는 오히려 뒤로 물러섰다.
저번에는 반대로 왔기에 쉽게 문을 열었지만, 이쪽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같은 문양의 검을 가지고 있으니 들어가는 법도 알고 있겠지.'
못 들어갈 수도 있지만, 나 혼자 요새 지하 쪽 샛길로 들어가 문을 열어 주면 되니, 그리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다행히 다시 고생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철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문에 마나를 흘리는 건가?'
그녀는 그냥 문양을 쓰다듬는 것이 아니었다.
마나가 흘러나오는 손이 일정한 형식으로 문양을 따라 그리고 있었다.
발로 시작해서 활짝 펼쳐진 날개에 이어 머리와 두 눈으로.
양손으로 두 눈을 누르는 순간, 문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그녀가 힘을 주어 문을 밀자.
끼이익.
철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나도 다가가 그녀의 옆에서 같이 문을 밀었다.
문이 활짝 열리고, 퀴퀴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정말 있었어……."
내 옆의 여성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오래된 묘실을 바라보았다.
묘실은 예상대로 저번 삶에서 본 것과 다르지 않았다.
사각형으로 이어 붙인 석벽과 텅 빈 묘실 중앙 제단 위에 놓인 커다란 관.
불새 사냥꾼이 관으로 다가가는 동안, 나는 벽 한쪽 구석에 보이는 갈라진 틈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 정도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틈.
하지만, 저 틈이 이어진 동굴은 갈수록 좁아져 나나 아드리아같이 어리고 몸이 작은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번 삶 때의 일을 떠올리고 있을 때, 묘실 중앙에서 탄식이 들려왔다.
"아……."
어느새 불새 사냥꾼이 관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텅 빈 관을 보고 신음을 흘린 것이다.
텅 빈 관을 보던 그녀가 고개를 번쩍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이 무덤을 찾았을 때 아무것도 없었어? 아니, 어떻게 이 무덤에 대해 안 거지? 누구한테 들은 거야?"
무덤이 비었다는 것을 알게 되니, 그제야 미뤄 두었던 의문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거기다 무덤이 비어 있을 거라고 어느 정도 확신한 모양이었고.
역시 그녀는 오래전 이 무덤을 털었던 도굴꾼의 후예였다.
그래서 무덤으로 들어가는 법도 알고 있었고, 문양이 새겨진 검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딴생각을 너무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에 의심이 떠올랐다.
나는 그녀가 계약을 깨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아무한테도 듣지 않았어요. 단지 마요르카 요새 지하를 구경하다가 이곳과 이어진 좁은 통로를 발견했을 뿐입니다."
나는 손을 들어 갈라진 벽을 가리켰다.
"아……. 틈이 있었어? 저런 건 듣지 못했는데……."
전승이 제대로 안 되었던가 아니면 일부러 숨겼을지도.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지금과 똑같았었어요. 그냥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갔고, 후작가 영지에서 이곳에 새겨진 문양과 같은 당신의 칼을 봤을 뿐이에요."
물론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저번 삶 때였으니, 우리가 지나온 길이나 요새와 이어진 동굴에는 내가 지나온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자세히 살핀다면 내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겠지만, 그렇게까지 확인할 리 없었다.
"그럼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가……."
저것 보라고. 지금도 내 말만 믿고 바로 시무룩해지잖아.
그녀는 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릴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정말 용병이 맞는 걸까? 실력은 확실했지만, 저런 모습을 보면 때가 묻은 용병답지 않았다.
재미있는 모습이긴 했지만, 일을 진행하려면 저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제가 전에는 제대로 못 봤는데, 관 안에 정말 아무것도 없나요?"
"없어. 옷가지 일부하고 뼛조각, 뼛가루. 전부 묘 주인의 흔적뿐이야."
"그래요?"
나도 관 앞으로 다가갔다.
관 내부는 그녀 말대로, 그리고 저번 삶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았다.
'그때는 아드리아가 먼저 찾았는데…….'
아드리아와 달리 불새 사냥꾼은 함부로 관 내부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뼛가루가 덮인 관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쓱쓱.
"아, 그렇게 함부로 만지면……."
내가 뼛가루를 쓸자, 그녀는 급하게 소리를 쳤지만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벌리고 말았다.
쓸어 낸 관 바닥에 비상하는 새의 문양과 열쇠 구멍이 드러난 것이다.
"어라? 이게 뭐지?"
나는 처음 본 것처럼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음, 조금 어색했나?'
아쉬운 연기였지만, 놀란 그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문양과 구멍을 보고, 자신의 검을 보았다.
아드리아의 예상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니 내가 따로 유도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스르르릉.
그녀는 검을 뽑아 들었다.
반대쪽 손에 들린 등의 불빛 덕분에 검날에 새겨진 새 문양이 환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검을 들고 구멍을 노려보았다.
그냥 놔두면 바로 구멍에 검을 밀어 넣을 것 같았다.
그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도 알고 있는 것을 전부 말했는데, 그 검을 밀어 넣기 전에 적어도 이 무덤에 얽힌 이야기는 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
내 말에 그녀는 놀란 신음을 흘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아, 미안. 내가 정신이 없었어."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찾을 줄 꿈에도 몰랐으니까. 원래 이곳은 우리 가문의 선조가 힘을 얻은 곳이었어. 용사분들 중 한 분이었는데, 아쉽게도 대전쟁 중에 돌아가셔서 전승된 것이 얼마 남지 않았지. 이 무덤에 관한 이야기도 구전으로 일부만 내려오고 있었고, 다른 것들도 온전히 전해지지 않았어."
그녀는 애잔한 눈으로 검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전해 내려온 것은 이 검뿐이려나."
그녀는 다시 검을 꽉 쥐었다.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포기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가 없었어. 내게도 맡겨진 일들이 있었지만, 소실된 전승을 찾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지. 남은 시간도 얼마 없었는데 이렇게 찾게 되다니……."
역시 평범한 용병이 아니었다. 용사의 후계 가문이라니……. 아무리 전승이 소실되었다고 하지만, 용사의 후계라면 귀족일 게 분명했다.
그녀는 말을 하는 동안, 다시 흥분한 모양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슬쩍 초를 쳐 봤다.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 뭔가 남아 있을 거야. 전승에는 검으로 여는 문에 대한 것도 있었어."
그렇다면 꽝은 아니라는 이야기였고, 나에게도 무척 좋은 소식이었다.
"그럼, 열어 봐도 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나는 비밀 문이 나와도 바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아직 메시지가 들려오지 않고 있었다. 적어도 메시지를 듣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검을 치켜들었고.
구멍 속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쑤욱. 철컥.
무언가 기계가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제단이 통째로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콰과과광!
제단 중앙에 있던 그녀도, 한 걸음 물러섰던 나도, 무너지는 제단과 함께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기껏 물러섰는데 다시 휘말려 버리다니.
문이 열리는 것하고 제단이 무너지는 것은 천지 차이잖아!
제대로 전승이 이어져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왜 지금 들어맞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머피의 법칙은 이쪽 세상에 와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아래로 떨어지는 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던 것이다.
[위기 상황이 종료되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젠장! 예비 형수 아드리아와 같이 죽었던 그 시점이 지금인 모양이었다.
이쪽 세계의 신은 나를 미워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