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39화 (39/563)

제39화

제14편 비상하는 불새 (2)

몇 시간 뒤, 불새 사냥꾼과 나는 후안과 함께 도시 동쪽에 있는 신전으로 향했다.

공작 영지의 신전은 후작의 도시에 있던 신전과 달리 아름답지만 평범한 신전이었다.

신전 안에는 여느 때처럼 신도들과 신관이 있었고, 나는 공작의 아들이라는 위치로 인해 신관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어렸을 때 내 병을 치유하기 위해 달려온 신관과 다른 사람이었지만, 신전에 있는 신관도 나름 실력이 있는 신관처럼 보였다.

그는 반갑게 나를 맞이했다. 다행히 신을 믿는 사람이어서인지, 서자에 대한 멸시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후안을 예배당에 둔 채로 용병과 나는 신관과 함께 내실로 향했다.

"공자님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나는 그에게 종이 뭉치를 건네주었다.

불새 사냥꾼과 내가 여태껏 작성했던 계약서였다.

"공증을 받기 위해서 왔습니다."

계약서들을 받아 든 신관은 질린 표정으로 종이 뭉치를 살펴보았다.

"이게 다 계약서인가요?"

"네."

내 말에 불새 사냥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시간 동안 나와 함께 계약서 내용을 채웠던 것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전생의 경험을 떠올리며 최대한 꼼꼼하게 적은 계약서였다.

"공증을 서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적은 계약서는 거의 없는데……."

신관의 말과 달리, 그렇게 특별한 계약서는 아니었다.

계약 기간 동안 위해 금지, 이익 발생 시 분배, 정보의 유출 방지 같은 꼭 필요한 내용만을 담았을 뿐이었다.

더구나 계약을 위반했을 때의 대응이나 보상 같은 내용은 들어 있지 않았다.

전생과 달리 이곳에서는 계약 위반을 해결해 줄 법원이나 검찰이 없었다.

뭐, 영지 내에서라면 영주가 비슷한 일을 하긴 하지만, 영주민과 달리 용병은 영지만 벗어나면 그만이었다.

더구나 나는 어찌 되었건 영주의 아들이자 귀족이니 내가 계약을 어겼을 때 그녀가 항의하기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세상도 나름의 방법으로 계약을 지키게 만들 수 있었다.

바로 신관의 공증이었다.

신관의 말로는 공증은 신이 계약의 이행을 지켜본다는 뜻이라는데, 내가 보기에는 일종의 마나 활용이나 상속 능력 같았다(물론 신관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이 세상의 계약은 신관의 공증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계약이 제대로 이행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계약을 어기게 되면 신의 저주가 내리게 되었다.

뭐, 신의 저주라는 게 그렇게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추적 기능이 붙고, 다음 계약 시 신관이 알아차리는 것이었죠?"

"잘 아시네요."

신관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게도 추적 기능은 나침판 형식의 단순한 방향 추적이었고, 다음 계약 때 신관이 알게 되는 것도 전 계약의 이행 여부뿐이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뭐, 남들 모르게 계약 상대를 죽이고, 다시는 계약 공증을 받지 않으면 들키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전생에도 그런 범죄자는 잡기 꽤 어려웠었다.

공증 말고도 몇 가지 안전장치를 해 놓으면, 그래도 배반당할 확률은 최소한으로 할 수 있었다.

"그럼 두 분, 이 계약서에 손을 올리세요."

공작 영지의 신관은 제단 위에 올려놓은 계약서를 가리켰다.

나와 그녀는 쌓여 있는 계약서에 손을 올렸고, 젊은 신관은 작은 단도로 손바닥을 베어 계약서에 피를 떨어뜨렸다.

피가 계약서에 흘러들었고, 그녀와 내 손에도 피가 묻었다.

이어서 그가 기도를 시작했다.

"이 약속은 신의 이름으로 맺은 약속. 어기는 자는 피가 강같이 흐를지니……."

눈을 감고 내뱉는 기도문은 의외로 무시무시한 내용이었다.

'계약 공증이 아니라 저주 같은 거 아니야?'

그의 말은 계속 이어졌고, 그의 피가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로써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계약을 증명합니다. 카라트 브리트."

양손을 펼치고 선언을 했다.

"이 약속을 어기면 신의 이름으로 네 몸이 갈라지리니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계약을 증명합니다. 카라트 브리트."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계약서와 계약서 위에 올려놓은 그녀와 내 손이 옅게 빛났다.

손으로 낯선 마나가 흘러들어 오는 게 느껴졌다.

'밀어내 볼까?'

약한 마나라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이 마나가 계약을 지켜 준다는 생각에 몸속으로 스며들게 놔두었다.

마나는 내 몸을 훑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계약서에 고여 있던 피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고, 상처가 났던 신관의 손도 멀쩡해져 있었다.

"다 된 건가요?"

"네. 신의 이름으로 계약이 증명되었습니다."

"설마 기도하셨던 것처럼 피가 쫙쫙 흘러 죽거나 하지는 않는 거죠?"

그의 기도가 들었던 이야기와 달라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하하, 그렇지 않습니다. 대전쟁 때 현자님의 기도가 이어져 내려온 것뿐입니다. 현자님의 계약 증명은 기도의 내용과 비슷한 효력을 발휘했다는 전설도 있긴 하지만, 실제 효력은 알려진 그대로입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 세상은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마구 벌어지는 곳이라 걱정이 계속 느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자그마한 금액이지만 은혜를 내려 주신 신께 감사 봉헌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정해진 가격의 공증료일 뿐이지만, 신전이라서 그런지 전해 주는 방식이 꽤 번거로웠다.

돈주머니를 받아 든 그는 표정이 밝아졌다.

내가 인사를 멋지게 한 건가?

"오, 직접 가져오셨군요. 다행입니다. 따로 저택에 이야기해서 예물을 받으려면 일이 상당히 귀찮아지거든요."

그가 좋아한 이유는 내 인사 때문이 아니라 현찰 박치기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내가 계약서를 챙기고 신전 밖으로 나가는 동안, 직접 돈을 안 가져오는 귀족들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 영지는 그래도 덜한 편입니다. 다른 곳들은 어음으로 끊어 주는 곳도 있는 판이니까요. 예물을 어음으로 끊어 주다니……. 자애로운 신이시니 망정이지, 신벌을 받을 사람이 넘쳐났을 겁니다."

신관의 위치가 낮지 않아서인지, 헤어지기 전까지 평민들은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귀족들의 흉을 계속 보았다.

예배당에서 후안과 만나 신전을 나선 뒤, 용병이 입을 열었다.

신전에 들어선 뒤로 처음 열리는 입이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남문 앞에서 만나자."

그녀는 눌러쓴 망토 그대로 자신의 말만 남기고 먼저 자리를 떴다.

"끙, 내가 계약서를 너무 심하게 썼나?"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후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내일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보다 내일이 문제였다.

"내일은 또 무슨 변명을 하고 나와야 하나……."

제대로 준비하고 나와야 하니 제대로 된 핑계를 대야 할 것 같았다.

* * *

다음 날.

다행히 특별한 핑계를 대지 않고도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며칠 남지 않은 시몬의 약혼녀, 아드리아의 방문으로 사람들이 무척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시몬이 후작가를 방문한 것에 대한 답례이자 약혼을 확정 짓기 위한 방문이었다.

'저번 삶 때보다 며칠 더 늦어진 건가?'

그런 것치고는 방문 일자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많은 일을 벌여 놓아서 많이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비효과가 크지 않았다.

잠깐, 아드리아가 왔었다고?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었나?"

"오늘이 무슨 날이었습니까?"

갑자기 말을 꺼내자, 같이 걷고 있던 후안이 물었다.

"아, 아니야."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에게 말할 이야기는 아니었다.

계산해 보니 저번 삶에서 죽었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아드리아와 요새를 보러 나가서 용병들에게 쫓기다 목숨을 잃었던 그날.

이제 몇 시간 뒤면 내가 죽는 시간이 될 터였다.

이미 나를 죽였던 이들은 모두 죽어 버렸고, 이제 갑자기 죽을 이유도 없으니 오랜만에 메시지를 볼 수 있을 듯했다.

4년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았다. 목표가 있지 않았으면 무척 힘든 시간이었을 게 분명했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그 긴 시간을 다시 반복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후안과 나는 열심히 걸어 얼마 뒤 남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문 앞에는 그녀가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망토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어서 와……. 그거 정말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야?"

그녀는 손을 흔들다 말고, 내 손을 가리켰다.

내 손에는 천으로 둘둘 말린 검이 들려 있었다.

크기가 너무 커서 오늘도 질질 끌고 온 검이었다.

후안이 들고 가겠다고 했지만, 손에 익어야 해서 거절했다.

"무슨 검인지 모르지만, 몸에 맞는 검을 쓰는 편이 좋지 않아? 그런 검을 쓰다가 이상한 습관만 들 텐데."

그녀의 말이 옳긴 하지만, 차마 내 몸에 맞는 검을 들고 죽었던 장소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내 몸에 맞는 검이 검술을 펼치기에는 제일 좋지만, 내 몸에 맞는 검이라 함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어린아이가 쓰는 작은 칼일 뿐이었다.

거리도 짧고, 무게도 가볍고, 장난감 같은 작은 칼.

더구나 흔해 빠진 양산 훈련 검이라, 잘 제련된 검과 부딪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댕강 부러질 뿐이었다.

이미 그런 경험을 해 봤기에 적어도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검이 필요했다.

'뭐, 돈만 있었으면 제대로 된 검을 주문할 수도 있겠지만…….'

어제도 그렇고, 근래 그동안 모아 놓은 돈이 신나게 새어 나가는 바람에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검 말고는 제대로 준비한 것 같은데 하필 그런 검을 가져오다니……. 정말 똑똑한 것 같았는데, 이상한 데서 아이 티를 내네."

그녀 말대로 확실히 준비해 왔다.

가죽 갑옷도 차려입었고, 후안도 제대로 장비를 하고 있었다.

"뭐, 이곳에서 싸울 일은 없을 테니 그런 검이라도 상관없겠지."

거기까지 말한 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이곳 용병은 뭐 먹고사는 거야? 마물도 없고, 치안도 좋고, 결국 상행이나 따라다녀야 할 판인데 생활이 유지가 되나?"

"확실히 상행하고 귀족 경호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보다 안전한 영지이긴 하지만, 영지 경계의 산과 숲에서 마물이 나타나기도 하고요. 다른 영지보다 보상금이 많아서 횟수는 적지만 나쁘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후안의 대답에 불새 사냥꾼은 입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오, 영지에서 주는 보상금이 크다는 이야기지? 공작님은 좋은 영주님이신가 보네."

그녀는 나를 보며 공작을 칭찬했지만, 나는 그런 칭찬에 관심이 없었다.

"빨리 가죠. 이러다가 오늘 안에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아, 그래."

내가 앞장서서 걸어가자, 그녀는 민망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경비병들은 후안을 알아보고 우리를 내보내 주었다.

몇 년 전, 저번 삶에서 마차를 타고 지나갔던 길을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차 때보다 시간이 두 배는 걸렸지만, 우리는 멀리 유적이 보이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과 같은 유적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유적에서 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펼쳐진 커다란 숲. 온스 숲이 눈에 들어왔다.

저번 삶과 똑같은 길을 갈 이유가 없었다.

목적지는 버려진 무덤. 출구로 들어가는 편이 훨씬 빨랐다.

여자 용병과 나, 후안은 무덤의 출구, 즉 빈 우물이 있는 버려진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