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제12편 귀환
"역시, 망토를 뒤집어쓴 년을 감시한 게 정답이었어."
불새 사냥꾼의 말대로 그녀를 금방 찾아낸 모양이었다.
나는 사이코 여자 용병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망치지 않았네?"
반쯤 미쳐 보이긴 했어도 살 곳을 찾는 능력은 엄청나게 뛰어나 보였는데, 영지에 아직도 남아 있었다니.
"일을 망가뜨린 것은 역시 꼬맹이 너였어."
그녀는 나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골목은 어느 사이엔가 텅 비어 있었다.
싸우는 것을 알고 도망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용병들이 사람들을 물린 것일까?
엉뚱한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꽤 그럴듯했다.
"일을 망친 것은 내가 아니라 네 입이지."
이번 일도 그렇고, 저번 삶에서도 네가 알려 주어서 이 정도 할 수 있었는걸.
으득.
그녀 입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놈 때문에 일이 실패하고, 벤하민도 죽었어. 네놈을 잡으려고 돌아다니지만 않았어도 같이 갈 수 있었는데……. 다 네놈 때문이야."
아쉽게도 시몬은 벤하민 용병 단장에게서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
기사단장이 나서 준 덕분에 싸움은 어렵지 않게 이겼지만, 벤하민은 고문하기도 전에 자살해 버렸다.
그 자리에 이 여자가 없어서 의아해했는데, 그 이유가 나를 잡기 위해서였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일의 경중이 완전히 제 마음대로였다.
용병단 단장이 죽었으니 이제 정보를 얻을 곳은 이 여자밖에 없었다.
나는 여자를 살펴보았다.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 수시로 튀어나와 입술을 핥는 붉은 혀,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
딱 봐도 뭔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여자는 아니었다.
"네놈을 죽여서 영혼은 벤하민에게 주고, 껍질은 잘 벗겨서 내 침대에 걸어 놓을게."
벌건 대낮에 공포 영화에 나올 법한 여자와 대치하다니.
전생이었으면 바로 경찰을 불렀을 터였지만, 지금은 내가 해결해야 했다.
그녀는 검을 치켜들고, 검날을 혀로 핥는 시늉을 했다.
녹색으로 빛나는 검날. 그냥 핥았으면 좋았을 텐데.
"다행히도 내 취향이야. 정말 맛있어 보여."
도대체 어떤 취향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여태 찾고 있었으니 어리다고 놓아줄 것 같지도 않았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드르륵.
검 손잡이를 다시 잡자, 천에 싸여 있던 검이 땅을 끌며 거친 소리를 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 검은 방에 두고 양산형 검을 들고 오는 거였나.'
좋은 검이라고 이렇게 가지고 다닌 것이 일을 귀찮게 만들었다.
후우욱.
숨을 크게 들이쉬고,
"자, 망토 속에 숨기고 있는 검을 뽑아 봐. 나를 즐겁게 해 주렴."
하지만, 망토 속에 검은 없었다.
나는 들이켠 숨과 함께 마나를 몸 전체에 퍼트렸다.
세포 하나하나에 힘이 느껴졌다.
나는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바닥을 끌던 검이 땅에서 떠올랐다.
마나가 다시 팔로 몰려들었다. 이어서 손을 타고 밖으로 흘러나갔다.
파파파팡!
몸 뒤에서 천이 터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검을 감싸던 천이었다.
찢어진 흰 천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뭐야! 그거 검이었어?"
흩날리는 천 사이로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빠르게 다가왔고, 나는 검을 힘껏 치켜들었다.
쾅!
검을 든 손에 묵직한 충격이 느껴졌다.
마나로 몸을 땅에 묶어 두지 않았다면 뒤로 밀려났을 정도의 큰 충격이었다.
"큭!"
하지만, 난 전혀 물러서지 않았고 충격으로 천들이 날아가 버려 훤해진 시야에 뒤로 튕겨 나가는 여자 용병이 보였다.
콰당!
벽에 부딪혀서야 겨우 멈춘 그녀는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말도 안 돼! 그 체구로 나를 튕겨 낸다고?"
아, 그런가. 몰래 이야기 듣다가 남자 용병에게 날려지고, 뒤에 만났을 때는 검이 부서지고, 다쳐서 도망쳤고.
그러고 보니 이번 삶에서는 그녀와 제대로 붙어 본 적이 없었군.
그래서 겁도 없이 날 잡으려고 설친 건가?
부웅, 부웅.
나는 검을 양손으로 잡고, 허공에 이리저리 휘두르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역시 검이 아니라 거대한 노를 휘두르는 것 같았다. 내 체격으로는 이 큰 검을 제대로 휘두르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검을 가지고 꼭 검술을 써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다리로 땅을 박찼다.
쾅!
마나가 가득 찬 발이 땅을 뒤로 밀어내고, 난 앞으로 쏘아졌다.
놀란 여자의 모습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녀는 나를 향해 힘껏 검을 휘둘렀지만, 난 커다란 검을 내 앞에 세웠을 뿐이었다.
캉!
검이 부딪쳤다.
상대는 날렵한 검을 쓰는 기사급 용병. 내 몸에 맞는 검을 쓰던 저번 삶에서는 승부를 가리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큰 검에 빛이 어리고, 여자 용병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검은 내 새로운 검을 버티지 못했다.
은은한 녹색을 뿌리던 그녀의 검은 검날이 뭉개지며 옆으로 튕겨 나갔다.
검과 함께 그녀의 팔이 크게 벌어지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더 이상 없었다.
나는 검을 세운 채로 한 걸음 더 앞으로 걸었다.
쿵.
커다란 검이 벽 속으로 깊게 박혔다.
"컥!"
여자 용병이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녀는 벽과 함께 자신의 배를 뚫어 버린 검을 잡고 나를 노려보았다.
"역시 애새끼가 아니었잖아. 애처럼 속이는 능력도 있었나? 넌 어디에서 온 거지?"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나에게 향했다. 힘없는 손이 내 얼굴로 다가왔다.
나는 미련 없이 검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알았지?"
"검을 쓰는 용병이 손톱을 길렀는데 의심하지 않을 리가 없지."
내 말에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점점 내려가는 손톱 아래로 언뜻언뜻 초록빛이 엿보였다.
마지막까지 그녀는 나를 죽이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정말 맛있어 보이는데 아쉬워……."
마지막까지 소름 돋는 말을 남긴 뒤,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잠깐 고개를 떨군 그녀를 바라보았다.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끝난 건가.'
드디어 저번 삶의 은원이 마무리되었다.
멀리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는 검을 뽑은 뒤, 빠르게 자리를 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가로웠다.
용병단장과의 실전을 경험한 시몬도 뭔가 깨달은 게 있는지 조용했고.
기사나 병사들도 처음보다 여유로웠다.
영지들을 넘으며 간간이 마물들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이번에는 병사들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한 약한 돌연변이들이었다.
그렇게 꽤나 정신없었던 여행을 끝내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몇 개월이 지났지만, 영지와 저택은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공작의 짧은 환영 인사 뒤 기다리던 사람들은 다들 시몬에게 몰려갔고, 기사와 병사들은 기다리던 동료들과 술집으로 향했다.
그래도 전과 달리 나에게 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병사 후안은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나에게 감사를 표했고, 우고 기사도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미겔과 술을 마시러 갔다.
총집사도 눈인사를 하고 공작을 따라갔지만, 기사단장은 본 척도 안 하고 돌아가 버렸다.
출발 때와 달라져서인지, 나를 훔쳐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묘하게 달라졌다.
하지만, 그런 시선보다 내 앞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있는 어머니가 더 중요했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별일 없었지?"
별일이야 무척이나 많았지만, 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 * *
시몬 일행이 돌아온 다음 날, 공작의 집무실에 세 사람이 모였다.
공작과 기사단장, 총집사. 오랜만에 모인 세 사람이었다.
"……이렇게 해서 반란은 마무리되었고, 남은 잔당은 후작가에서 처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는 영주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기사단장의 설명이 끝나자,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 날아온 전서를 보니, 남은 잔당 정리도 끝났다는군. 아쉽게도 누구의 사주였는지는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야."
"후작가도 피해가 커 보였습니다."
"기사가 꽤 많이 죽은 모양이더군. 용병들 정리 건으로 영지도 소란스러워졌고. 하지만, 제일 큰 문제는 후작의 후계자가 죽은 거겠지. 병사로 처리했지만, 냄새를 맡은 귀족들도 나올 테고, 이래저래 후작가의 입지가 상당히 흔들릴 거야."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과 총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 사이에서의 악소문은 다른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귀족들에게 큰 피해를 안겨 준다. 이에로 후작은 상당 기간 근거 없는(?) 소문에 시달릴 게 분명했다.
"그래도 약혼은 미루지 않을 생각이야. 이럴 때일수록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지."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용병들과 서자만으로는 후작가를 집어삼키기 어려웠을 텐데, 사주한 사람은 누구일지……."
"글쎄, 우리와 후작가의 연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으니까. 귀족파 쪽은 당연하고, 제1 왕자파나 제2 왕자파에도 없는 게 아니니……."
공작은 엉망으로 엉켜 버린 왕국의 정치 정세가 떠올라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도 실제로 나설 만한 곳은 많지 않을 텐데요."
"계속 알아보고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꼬리를 잘라 놓은 것을 보니, 쉽게 찾기는 어렵겠군."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조금은 어설펐던 반란이었습니다. 거사 일도 즉흥적이었고, 들키는 과정도 그렇고……."
역사적으로 많은 반란이 즉흥적으로 벌어지긴 했지만, 그런 반란이 성공한 사례는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이번 반란도 그런 흔한 반란일지도 몰랐다.
기사단장의 말에 총집사가 반론을 꺼냈다.
"어린아이에게 들켜서 그렇게 느껴진 게 아닐까요? 알렉스 님이 아니었으면 반란이 성공했을지도 모를 텐데요."
총집사의 말에 공작이 눈을 빛냈다.
"설마, 그 정도인가? 우연히 이야기를 엿들은 것일 뿐일 텐데?"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본인 입으로 우연히 엿들었다고 했지만…….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에는 좀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습니다."
난감해하는 기사단장의 말을 총집사가 이어 이야기했다.
"여행 중에 후작가 서자와 친해진 것도 그렇고, 시내 답사를 강하게 주장하고 답사 중에 서자와 다시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드리아 님이 비밀 통로를 알려 주어 같이 나가게 된 것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거기다 그 아이는 비밀 통로를 서자에게 알려 주었지."
공작은 전서에 적혀 있던 아드리아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기 방에 거의 반쯤 감금되었다고 했나.'
언제 어디서나, 잘 때도 호위라는 명목으로 감시자를 붙여 둔다고 했으니 그 아이의 삶도 편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일을 벌였는데 당연한 벌이자 감시였다.
솔직히 공작으로서도 그리 마음에 드는 며느릿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몬도 좋아하고 정략적으로 후작가를 버릴 수도 없으니, 차라리 빨리 데려오는 편이 좋을 듯했다.
그렇게 결정하니, 다시 원래의 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운이 말도 안 되게 좋든가 아니면 전부 계획하에 벌인 일인지도 모른다는 건가."
"천재라고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우연 쪽이 더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머리는 좋으시지만, 이중간첩 같은 일을 하기에는 아직 어리십니다. 수많은 우연이 겹쳐진 거겠죠."
기사단장도, 총집사도, 자신들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으면서 공작이 의심하자, 바로 반대의 말을 꺼냈다.
그들의 말에 공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녀석이 마음에 든 모양이군."
공작의 말에 기사단장은 뭐라 대답하려고 했지만, 공작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우연이라면 상관없겠지만, 우연이 아니라면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공작가에는 후계자인 시몬이, 동생인 마누엘도 있었다.
나무랄 데 없는 두 아들이 있는데, 더 뛰어난 서자라니.
조금 전까지 후작가에서 벌어진 일을 이야기했던 기사단장과 총집사는 공작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