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화
제11편 그래도 복수는 했습니다 (2)
마르틴이 묵었던 여관에서 조금 떨어진 골목 안에 있는 여관.
나는 여관을 이리저리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산뜻하게 칠해진 간판과 깨끗한 건물 벽. 여관 안에서는 부드러운 빵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관이 맞긴 한데…….'
전생의 호텔과도 다른, 마치 판타지 소설에서 막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의 여관이었다.
여태껏 보았던 여관은 용병들이 날아다니고 음식물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여관들이라 이런 여관은 무척이나 낯설게 느껴졌다.
여관에 들어선 뒤에도 낯선 느낌은 계속되었다.
1층 식당도 깨끗했고, 음식을 나르는 종업원의 옷도 깔끔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여관에 투숙객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데 왜 사람이 적지?'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다가, 지나가는 여종업원에게 물었다.
"여기 투숙하고 있는 손님 중에 '불새 사냥꾼'이라는 분이 있나요?"
불새 사냥꾼이라니. 별명이 왜 이리 유치한지.
말을 하면서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숨길 수 없었다.
내 말에 종업원은 나를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그냥 꼬맹이가 아니셨네. 지금 계세요. 불러 드릴까요?"
다행히 여관에 있었다.
"네."
"아버지! 손님 왔어요! 불새 님 좀 불러 줘요!"
종업원은 안쪽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고는 나를 빈자리로 안내했다.
내 생각보다 그 별명은 이상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나를 안내한 종업원, 아니 여관집 딸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보여 주었다.
"그럼 불새 님 손님이면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주문 받을게요."
앞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었지만, 나는 그 뜻을 고민하기도 전에 메뉴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왜 이렇게 비싸!'
메뉴판에 적혀 있는 가격들은 부족함이 없이 지내던 나도 깜짝 놀랄 정도였다.
손님이 없을 만했다. 숙박료까지 이렇게 비싸다면 귀족이 아닌 평범한 용병은 냉큼 도망갈 게 분명했다.
'이건 5성급 호텔이 시장 통 한가운데 있는 꼴인데.'
하지만, 내가 고민할 일은 아니었다.
"불새 사냥꾼 님이 드시던 음식 있으면 그걸로 두 명분 부탁할게요."
"좋은 선택이세요. 불새 님도 부담스럽지 않으실 거예요."
아, 설마 이 음식값들을 내가 내지 않고 그녀가 낼 거로 생각한 건가.
쩝,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머리에 쓴 두건은 벗었지만, 몸은 망토를 두르고 있으니 망토 아래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있어도 알 리가 없었다.
후작에게 새로 받은 검도 다른 사람이 알까 봐 천에 칭칭 감아 질질 끌고 왔으니, 짐을 나르는 일꾼 꼬마 정도로 보일 터였다.
그제야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종업원이 이해되었다.
'쫓아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한 여성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붉은색 단발머리를 한, 조금은 중성적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꽤나 잘생긴.
그녀는 나를 향해 똑바로 걸어왔다.
'망토 용병이 저렇게 생겼었나.'
허스키한 목소리와 잘 어울릴 것 같았지만, 처음 생각한 단단한 이미지와는 달랐다.
터프한 용병이 아니라 늘씬한 기사, 아니면 잘생긴 서기관 같은 느낌이었다.
하긴 여자니까 당연한지도 몰랐다.
"조금 늦었네. 그래도 때맞춰서 잘 왔어. 영지가 시끄러워서 다른 곳으로 뜰까 생각 중이었거든."
그녀는 내 앞에 앉아 종업원에게 손을 흔들었다.
"불새…… 사냥꾼 님이 드시는 음식으로 2인분 시켰습니다."
"잘했어. 하하, 별명이 좀 그렇지? 하지만 내 별명보다 이상한 별명도 많아."
"불새 님이 어때서요. 우리 아빠는 젊었을 때 대검 왕발이라고 불렸다는데요."
어느새 식사가 나왔는지 음식을 내려놓으며 여종업원이 말했다.
음, 대검 왕발이라. 무척이나 직관적인 별명이었다. 이름만 듣고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그럼 불새 사냥꾼도……."
나는 앞에 앉은 여성의 붉은 머리를 바라보았다.
"정말 잘 지었죠? 저 붉은 머리카락을 보면 다른 별명이 안 떠오른다니까요."
음식을 내려놓은 종업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별명을 지은 사람이 눈앞의 종업원인 듯했다.
'이 영지에 온 뒤에 여관 종업원이 정한 별명을 쓰고 있다고?'
그렇다는 것은 원래 별명을 쓰지 않았거나, 원래의 별명을 숨겼다는 말이었다.
'이 여자도 뭔가 비밀이 있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매번 만나는 사람마다 어째 평범한 사람이 없었다.
차려진 음식은 상당히 먹음직했다. 따뜻한 스튜도, 빵과 고기도 영주 성이나 저택에서 먹었던 것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음식을 앞에 두고, 불새…… 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 내 소개를 안 했군.
난 별명도 없었고, 별명을 말할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내 이름을 말했다.
"알렉스 데 그레시아입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족님이셨어?"
"반쪽 귀족이죠. 서자입니다."
"아하, 그래서 그랬군. 이제 이해가 되네."
귀족이란 것에도 그리 놀라지 않고, 서자라는 말을 들어도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적어도 용병이라면 깜짝 놀라거나 존댓말이라도 썼을 텐데.
전에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남을 속이는 것을 못 하는 사람이었다.
귀족을 보고도 놀라지 않고, 서자라는 것을 알아도 색안경을 끼지 않는 사람.
'깨어 있는 귀족일까? 아니면 귀족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거나 실력이 있는 사람일까?'
노아라는 여자 용병을 쉽게 다루는 것만 봐도 실력은 나무랄 데 없었다.
내 이름을 들은 뒤, 그녀는 빵을 집어 들어 스튜에 담갔다.
그러고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 잠깐만. 이번에 방문한 귀족 나리들이 그레시아 공작가 아니었어?"
역시 전생과 달리 소문이 느렸다. 아니면 그녀가 늦게 알아차렸거나.
"맞습니다. 그들과 같이 왔죠."
내가 인정을 하자, 그녀는 스튜에 담근 빵을 드는 대신에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아니, 일이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멀리서 지켜보던 일이 발등 앞에 떨어진 거지.
"지금 용병들이 후작가에 덤벼들다가 떼죽음을 당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고, 밖에는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거리를 휘젓고 다니고 있고."
그녀는 나를 가리켰다.
"그날 밤에 용병에게서 도망치던 꼬맹이가 후작가 손님이었고. 소문이 사실이라면, 난 꼬맹이를 구하려고 후작가를 쳐들어갔다는 그 용병들과 드잡이를 한 거야?"
그녀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설마 그때 같이 있던 소녀도 귀족이었어?"
"후작 따님이셨죠. 이번에 약혼하기로 한."
그녀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를 보는 사이, 빵은 스튜에 잠겨 들었다.
저건 다 먹었군. 아까운 마음에 나도 빵을 집어 들었다.
그녀처럼 빵을 스튜에 담갔다가 먹어 보았다.
오, 무척 맛있었다.
내가 빵을 먹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도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의 빵이 스튜에 잠겨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망했네. 여유 부릴 때가 아니잖아.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나도 이번 일에 보통 휘말린 게 아니었잖아."
제대로 휘말렸지. 누군가 아는 사람이 나온다면 살아남은 용병들과 병사들이 그녀를 찾아올 게 분명했다.
부탁한 것도 아니었고, 그녀의 오지랖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도움 받은 보답으로 이 식사비는 제가 낼게요."
"아, 그러지 않아도 돼. 별로 비싼……. 아니, 고마워."
에고, 끝에 가서야 자기가 용병이라는 게 떠올랐나 보다.
여하튼, 이 정도 식사도 비싼 게 아니라는 거네. 한 가지 정보를 더 얻었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니, 아냐. 안 듣는 게 좋겠어. 귀족님들 일일 테니, 여기서 더 들어 봤자 귀찮은 일만 늘 테지."
그녀의 말대로였다. 귀찮은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그보다 어디로 가야 하나."
"가실 곳이 없습니까?"
"이렇게 급하게 움직일지는 몰랐으니까."
어라, 일이 쉽게 될 것 같은데?
"그럼, 그레시아 공작의 영지로 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엥? 공작가로 초대하는 거야?"
"아뇨. 서자 따위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죠. 단지 다음 있을 영지로 추천하는 겁니다."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역시 쉽게 되는 일은 없었다.
"너무 멀어. 거기다 특별히 갈 곳을 정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 다니는 것도 아니라서. 다니면서 찾아야 할 것이 있거든."
말을 하면서 그녀는 식탁에 세워 둔 검을 쓰다듬었다.
찾아야 할 것과 검이라……. 흠, 한번 찔러 보자.
"혹시 찾아야 할 것이 그 검에 관련된 겁니까?"
내 말에 그녀는 움찔 놀랐다. 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딱 봐도 정답이었다.
"그럼 제가 도움이 될 듯합니다.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영지에서 그 검에 새겨진 문양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날아오르는 새였죠?"
내 말에 그녀는 흥분한 얼굴로 검을 반쯤 뽑아 올렸다.
검날에 새겨진 날아오르는 새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문양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요."
그녀는 내 말에 무척이나 흥분했다.
"빨리 정리해서 따라갈게. 도착해서 어떻게 연락하면 되지? 대충 어디인지 미리 알 수 없을까? 물건이었어? 아니면 벽 같은데? 책은 아니지?"
너무 효과가 좋아 무서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녀는 금방 이성을 찾았다.
그녀는 바로 종업원을 불렀다.
"나 방 뺄게! 내일 나갈 거야!"
"네? 금액이 커서 내일 방값 환불은 어려워요."
아니, 환불도 되는 여관이었어? 거기다 며칠이나 계약했는데 환불이 어려울 정도야?
"안 받아도 돼."
"네? 정말요?"
그녀의 대답에 종업원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도대체 얼마나 큰돈이길래.
하지만, 종업원의 얼굴은 금방 어두워졌다.
"자네에게 받을 수는 없지. 달아 놓을게. 나중에 올 때 받든가 그 기간만큼 무료로 지내게."
"아빠!"
안쪽에서 나온 남자의 말에 종업원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건장한 몸을 가진 중년 남자였다. 과거에 잘나가던 용병이 나이가 들어 여관을 하는 소설에 딱 어울리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의 손과 몸의 근육은 용병이 아니라 기사의 그것처럼 보였다.
아무래도 불새 사냥꾼과 그는 전부터 잘 아는 사이 같았다.
나는 여관 주인과 이야기하는 불새 사냥꾼을 쳐다보았다.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20대를 넘지 않았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나이가 많으려나?
그녀가 식사를 거르고 짐을 싸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나는 차분히 식사를 마쳤다.
충분히 돈값을 하는 식사였다.
나는 불새 사냥꾼과 약속을 정한 뒤에 여관을 나섰다.
여관 입구 위쪽에 팻말이 흔들리고 있었다.
<용병 쉼터>
여관 이름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평범한 여관은 아니었다.
아냐. 아냐. 신경 쓰면 지는 거야. 여긴 그냥 비싸고 좋은 여관일 뿐이야.
또 올 일이 없는 곳이었다. 괜히 신경을 써서 일을 늘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여관을 나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끝마치지 못한 일과 마주치게 되었다.
"정말 애일 줄을 몰랐다니까."
노아라는 여자 용병이 또다시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