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화
제10편 그래도 복수는 했습니다 (1)
어두운 방. 달빛만이 방 안을 비추고 있었다.
드드득.
침대가 있던 바닥이 아래로 내려갔다.
구멍 뚫린 바닥에는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고, 계단 아래쪽 멀리 이글거리며 다가오는 불빛이 보였다.
다가오는 불빛을 가로막으며 한 사람이 바닥 아래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몸에는 흙먼지와 그을음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는 방 안에 들어온 뒤에 급하게 바닥을 살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찾았는지, 바닥의 돌 몇 군데를 두드렸다.
드드득.
내려갔던 바닥이 다시 위로 올라왔다.
다가오던 불빛이 올라오는 바닥에 가려지고, 열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덜컥.
바닥이 다시 메워지자,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그에게 달빛이 비쳤다.
옷도 얼굴도 지저분했지만, 누구인지는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다.
후작의 서자인 마르틴이었다.
그는 지친 얼굴로 몸을 일으키더니 고개를 돌렸다.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어제부터 이곳에 있었으니까요."
나는 구석에서 걸어 나오며,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여긴 아드리아의 방일 텐데?"
"후작가의 중요한 비밀을 흘린 사람을 그 자리에 둘 리가 없잖습니까."
"전부 알고 있었군. 아드리아는 괜찮나?"
"어차피 다 죽이려고 한 것 아닙니까? 뭐, 그녀는 안전한 곳에 있습니다. 아드리아는 그레시아 공작가와 후작가의 연합에 중요한 연결 고리니까요. 그쪽과는 다르게 앞으로도 몸 건강하게 잘 지낼 겁니다."
"하……. 결국 버려지는 건 서자뿐이라는 건가."
슬쩍 비꼬았지만, 마르틴은 상관하지 않았다.
"네가 여기 있다는 이야기는 결국 아침에 떠난 것 같았던 너희 일행이 모두 이곳에 남아 있다는 것이겠지. 용병들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한 건가."
그의 말대로였다. 공식적으로 영주 성을 떠난 공작가 일행은 비밀리에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시몬과 기사들은 비밀 통로의 출구인 신전으로 향했고, 나는 일의 결말을 보기 위해 이곳 아드리아의 방으로 온 것이었다.
후작의 방이 있는 쪽은 후작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고, 신전은 공작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으니, 나는 비어 있는 아드리아의 방으로 왔다.
사람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나는 마르틴이 살아난다면 이 방으로 올 거라고 생각했다.
이 방과 가까운 곳에 그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려던 일은 실패했을 텐데요. 다음 기회를 노리지 왜 혼자 찾아온 겁니까?"
내 물음에 그는 피식 웃었다.
"놀리는 건가. 도망치지도 못할 걸 알면서……. 하긴, 그건 지금 알게 된 거였지."
역시, 마르틴은 달아날 생각을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뭐, 내가 하려던 일은 같이 온 자들도 달랐으니까. 저들은 나를 이용해서 후작가를 장악하는 게 목표였겠지만, 나는 복수 그 자체가 목표지."
그는 지친 얼굴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단아한 귀족 여성의 방.
동생을 떠올렸는지,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내 동생이 짐승 같은 후작의 두 아들에게 당하고 임신했다는 이유로 우리 가족이 쫓겨났을 때도 그냥 참고 있으려고 했다."
예상한 대로였다. 평범한 임신이었으면 가문에 보탬이 되는 마르틴을 내보냈을 리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다시 어려워진 삶이었지만, 가족끼리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 능력을 얻은 덕분에 용병으로 먹고살 수도 있었고."
그는 말을 하는 도중에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얼마 뒤 아이를 지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들은 내 동생을 죽이고, 그 장면을 목격한 어머니는 자살했다. 집에 돌아와 가족의 시체를 보게 된 나에게 복수 이외에 더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그는 피를 토하는 듯한 어조로 내게 말했다.
충분히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심정에 동감하지도, 동정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고, 나도 그를 동정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내게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나보고 그냥 물러나라는 건가요?"
내 말에 그는 내가 들고 있는 검을 바라보았다.
저번에 부러진 뒤에 새로 구한 검이었다. 저번처럼 양산형 검이었지만, 새것이니 어느 정도는 버텨 주겠지.
"다른 기사였으면 후딱 해치우고 가겠지만, 너는 나와 입장이 같으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마요. 아드리아도 죽일 결심을 한 사람인데, 같은 처지랍시고 생판 남인 저에게 그런 신경을 쓰실 리가 없을 텐데요."
내 말에 그는 쓰게 웃었다.
"그런가……. 뭐, 사실대로 말하자면 쉽게 뚫고 나가기 어려워 보여서야. 대련할 때도 느꼈지만, 지금은 더 가늠이 안 되는군. 도대체 네 나이에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가?"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마나를 가득 품은 검은 어두운 방 안에서도 은은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대련 때와 달리, 나는 지금 가지고 있는 마나를 모두 드러내고 있었다.
몸 밖으로 넘실거리는 마나. 내 마나는 몸 밖에서 마르틴의 마나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설마 이번 일을 망친 것도, 난쟁이 첩자도 전부 네가 한 일은 아니겠지."
"글쎄요."
무덤덤하게 대답하니 그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정도니 공작이 너에게 일을 맡기는 거겠지. 하지만, 공작이 아무리 잘 대해 준다고 해도 그를 믿지 마라. 그는 귀족이고, 너는 반쪽일 뿐이다. 우리는 귀족도 자식도 아닌 도구일 뿐이니까. 가치가 없어지면 버려지고, 지워 버릴 물건이지."
그는 자신의 상황을 빗대어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나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공작이 나에게 잘 대해 준 적도 없었고, 몇 번이나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다.
공작을 믿지도 않았고, 그의 인정을 받을 생각도 없었다. 단지 나는 나를 죽이려는 자들을 쓰러뜨리고, 계속 살고 싶을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내 표정이 달라지지 않자, 그는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결국 싸울 생각인가? 그런가? 여기서 싸운다면 널 이기더라도 목적은 이루지 못할 테지."
그의 말대로 이기지 못하더라도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달려올 시간은 충분히 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막을 생각으로 여기서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아뇨. 몇 가지 질문에 답을 해 준다면 비켜 드리겠습니다."
"답을 해 주면 비켜 준다고?"
막 움직이려던 마르틴은 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제 목적은 다 이루었으니까요. 후작의 아들들이 죽든, 당신이 죽든 제겐 별 상관이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아드리아에게 슬픈 것은 매한가지겠죠."
후작가를 위해 뭔가 더 해 줄 마음은 없었다. 아드리아와 비앙카를 살리는 것으로 저번 삶의 빚은 다 갚았다.
내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어려 보이는데……. 이번 일은 전부 아드리아를 위해서였나."
뭔가 오해를 산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오해를 푸는 대신 질문을 했다.
"당신들, 아니 당신을 도와준 용병들의 배후 세력이 어디죠?"
"그 나이에 그 실력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벌써 다 이긴 싸움의 뒤를 파 볼 생각인 거냐? 정말, 너는 뭐 하는 녀석이냐?"
그는 별 이상한 물건을 다 보겠다는 것처럼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런 표정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벌써 여러 번 보았었다.
"뭐, 이런 게 된 이상 비밀로 할 필요도 없겠지. 라팔마 백작이 뒤를 봐주고 있다."
라팔마 백작?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라팔마 백작도 당신처럼 이용당하는 처지입니다."
내 말에 마르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하긴 벤하민도, 노아도 백작에 대해 너무 편하게 말하기는 했지."
그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더 알아볼 생각은 없었어. 복수하게 해 준다면 마왕과도 손을 잡을 생각이었거든. 아마 노아와 벤하민 빼고는 누가 사주한 건지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신전 쪽으로 갈 걸 그랬나? 이래서야 시몬이 잘해 주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다만, 노아와 벤하민은 이곳에 오기 전에 북쪽, 아마도 제국에서 지낸 것 같아. 둘이 이야기할 때 불쑥 나오는 말이나 말투에서 그쪽 지방 특유의 분위기가 났었지."
"차르 제국인가요?"
대전쟁 이후 멸망한 옛 제국을 잇는다고 외치던 나라들 중 제국이라는 이름을 다른 나라에 인정받은 북쪽의 강대국.
중간에 왕국 하나가 끼어 있어 조금 거리가 있는 나라였지만, 무시무시한 곳이라는 소문이 자주 들려오는 곳이었다.
뜻밖의 정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문 내의 일도 벅찬데, 왕국이 아니라 먼 제국이라니. 아무래도 이건 내가 알아볼 일이 아니었다.
내가 시큰둥한 얼굴이 되자, 그는 머리를 긁적였다.
"더는 아는 것도 없고, 그럼 결국 싸워야 하는 건가?"
둘이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마나는 허공에서 격렬하게 부딪히는 중이었다.
그의 말과 함께 마나가 더 날카롭게 피어올랐고.
나는 밖으로 풀어내던 마나를 다시 갈무리했다.
"아뇨. 길을 비켜 드리죠."
나는 검을 물리고, 뒤로 물러섰다.
마르틴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그냥 보내 주면 너한테도 문제가 될 텐데……."
"문제가 될 일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온 것을 아는 사람도 없고요."
내 말에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내 말의 뜻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그렇지. 나만 말하지 않으면 알 사람이 없겠지."
말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으면 비밀은 지켜질 터였다.
그도 마나를 갈무리한 뒤에 내 옆을 지나갔다. 그가 방을 나서기 전에 나를 돌아보았다.
"내일 떠나기 전에 후작이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내가 이곳에 있을 때 쓰던 검을 달라고 해. 내 힘을 견딜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튼튼한 검이니까."
그는 나에게 손을 흔들고는 방을 나섰다.
아마도 여자 용병에게서 내 검이 망가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나름 무사히 보내 준 데 대한 보답일까?
하지만, 후작이 그런 선물을 줄 정신이 있을지 모르겠다.
마르틴이 목적을 이룬다면 선물은커녕 장례식으로 바쁘게 될 텐데.
역시 지금이라도 나가서 막아야 하려나.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사이, 멀리서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이 들려왔다.
"침입자다!"
"자객이다! 공자님들을 피신시켜!"
고함들 사이로 마르틴이 외쳤다.
"하하하! 뭘 믿고 도망치지도 않은 거냐! 더러운 내 동생들아!"
"모두 막아!"
"함께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함께하자고!"
"가까이 오지 마!"
탁한 비명과 고함이 계속 이어졌지만, 나는 아드리아의 방에서 나와 손님방으로 향했다.
* * *
한참의 소란이 지난 뒤, 나는 복도를 뛰어다니는 병사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마르틴의 복수는 반 이상 성공한 모양이었다.
후작의 첫째 아들은 그의 검에 목숨을 잃었고, 둘째 아들도 목숨이 위험했지만 신관의 도움으로 팔 하나가 잘려 나가는 것으로 생명을 구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후작의 후계자는 살아남은 둘째 아들이 되는 걸까?
뭐, 누가 되든 상관은 없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마르틴은 그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후작의 첫째 아들을 죽인 그는 형제들을 지키던 기사들 중 넷을 베어 버린 뒤, 마지막으로 후작의 둘째 아들의 목을 베기 전 다른 기사들의 손에 죽고 말았다.
후작가에서 쫓겨난 반쪽짜리 귀족치고는 대단한 활약이었지만, 그날 이후 그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후작이 직접 사람들의 입을 봉한 것이다.
얼마 뒤 후작의 첫째 아들은 병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고, 둘째 아들은 훈련하다가 다친 것이 되었다.
그리고 시몬과 공작가에서 온 사람들은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공식적으로 이미 떠난 사람들이 다시 돌아와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은 이상한 소문이 돌기에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후작에게서 검을 선물 받았다.
후작은 나의 입을 봉하기 위해 선물을 주겠다고 했고, 나는 마르틴의 검을 요구한 것이다.
내 몸에 맞지 않게 무척이나 큰 검이었다.
쓰지도 못하는 검을 달라고 했다고 시몬은 투덜거렸지만, 나에게는 기념이 되는 물건이었다.
그렇게 다시 일행이 출발하기 전, 나는 마지막으로 용병 거리를 방문했다.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