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화
제9편 정의란 무엇인가 (2)
책이 가득 찬 방.
중앙의 커다란 책상 뒤에 한 남자가 앉아서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책상 앞에 있는 손님용 소파에는 나이를 종잡을 수 없는 여성이 앉아 홀로 와인을 마시는 중이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반쯤 열린 창으로 살랑이는 바람까지 들어와 방 안의 광경은 마치 그림처럼 보일 정도였다.
푸드덕.
그렇게 그림 같은 방 안으로 하얀 새가 날아들어 왔다.
새는 소리 없이 방 안을 선회한 뒤에 수북이 쌓여 있는 서류 위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갑자기 등장한 새에 남자도, 여성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남자는 살짝 눈썹을 찡그리고는 새의 다리에 묶인 종이를 풀었다.
그는 종이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그는 혀를 차며 종이를 손에 쥐었다.
화르르.
그의 손안에서 종이가 불타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당신의 예언대로 되었군."
"……너무 늦었어요. 실패를 막지도 못하는 예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요."
"뭐, 아무리 강대한 능력이라도 모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전에 전해 준 제 예언을 믿고 움직였는걸요. 저를 믿고 움직였을 텐데……."
"계획이 매번 성공할 수는 없어. 그동안 우리는 당신 때문에 너무 쉽게 성공해 왔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제 선조는 거의 모든 미래에 대처해서 다른 용사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셨어요. 그러고 저도 예전에는……."
10년 전, 아니 5년 전만 해도 눈앞에서 와인을 들이켜는 여성은 그 옛날 용사들의 앞날을 예지했던 선지자의 재림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력한 예지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10년 전부터 자잘한 곳에서 조금씩 어긋나더니 5년 전부터는 예언이 계속 바뀌고 심지어 틀리기까지 했다.
물론 아직도 그녀의 선조를 제외하고는 그녀가 가장 위대한 예언자였고, 대부분의 예언은 그다지 틀리지 않고 있었다.
남자는 불타 버린 종이에 적힌 글을 떠올렸다.
이에로 후작 영지에 파견되어 있던 요원에게서 온 쪽지였다.
비밀 통로를 알게 되어 계획했던 작전을 진행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소식을 빠르게 전하는 능력을 이용하면서까지 보내온 글이었지만, 그곳까지의 거리 때문에 이미 작전은 진행 중일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작전이 실패한다는 것을 글을 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언가가 바뀐 미래를 너무 늦게 알게 되어 작전이 진행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실패하고 남은 조직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려 했지만.
"남은 자들을 수습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면 더 위험하다니……."
"정확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람들을 보내게 되면 붉은 기운이 파견된 사람들을 타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다른 때처럼 또렷하게 미래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결국 꼬리를 밟힌다는 거겠지."
그녀의 예언을 듣고, 그는 이에로 후작 영지에 남아 있는 조직을 포기했다.
조직에서 오랫동안 키워 왔고 작지 않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지만, 그는 깔끔하게 라인을 잘라 내 버렸다.
"……정말 죄송해요."
"네가 잘못한 건 없어. 아무리 봐도 네 능력의 문제가 아닌 것 같으니까."
예언 모두가 안 맞는 것도 아니고, 특정 지역과 특정 이벤트들만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니 뭔가 외부의 요인이 있는 게 분명했다.
"뭐, 그건 따로 알아보도록 하고."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지만, 금방 알아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이미 5년 전부터 조직이 계속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보다 작전이 실패하고 추적을 당할 수도 있다니. 후작가에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건가? 내가 너무 이에로 후작을 얕보았어."
쓰레기 같은 자식들을 보고 후작가를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하기야 마르틴도 후작의 자식이었지."
마르틴을 떠올리니 마르틴과 함께 버려지게 될 부하들이 생각나 속이 안 좋아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의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그가 빈 잔을 들자, 여자가 잔에 와인을 가득 따라 주었다.
"고통을 잊는 데는 술이 최고예요."
하지만, 술로 고통을 잊을 수는 없다는 것을 술을 따르는 그녀도, 잔을 든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거북한 배 속을 가라앉히는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그는 와인을 들이켠 뒤, 입을 열었다.
"이쪽은 우선 보류하도록 하지. 매번 성공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아직 작전을 벌일 곳은 많으니까."
"괜찮으시겠어요?"
안 좋아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보고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더 미안하지. 네가 보는 미래는 온통 핏빛으로 가득 찼을 텐데."
"괜찮아요. 저는 볼 뿐이잖아요. 당신은 그 피의 길을 직접 걸어가고 있는데요."
그녀의 말에 남자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지금에서야 서로 의미 없는 위로일 뿐이었다.
"괜한 이야기를 했군. 어차피 서로 각오한 길이니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네. 제게 이런 힘이 내려진 이상 이것은 내 사명이에요."
"내 사명이기도 하고."
두 사람은 술이 든 잔을 입속으로 털어 넣으며, 버려진 자들의 기억을 머리 한구석으로 밀어 두었다.
* * *
신전의 비밀 문을 통해 비밀 통로로 들어선 뒤, 용병들은 무사히 영주 성 지하까지 이동할 수 있었다.
비밀을 지켜야 했기에 많은 인원들이 오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십 명이 완전 무장을 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비밀 통로가 아니었으면 영주 성에 몰래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다 일행은 조심해서 움직여야 했다.
"앗! 조심해!"
소리 없이 나아가던 일행의 중앙에서 낮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용병 중 일부가 지고 가던 나무통 하나가 넘어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술을 담기 위한 오크 통처럼 보였는데, 나무통을 보는 용병들은 술을 보는 표정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용병들이 급하게 도와주어 오크 통은 멀쩡했지만, 오크 통을 지고 가던 용병은 여러 용병에게 정강이를 차였다.
"무슨 짓이야! 다 죽이려고 작정했어?"
"설마 술이 안 깬 거야? 이건 평범한 기름이 아니란 말이야! 못 들겠으면 다른 사람에게 맡겨!"
오크 통을 들고 가던 용병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른 용병의 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이 지고 가는 오크 통은 오늘 작전의 주인공이었다.
이들이 이렇게 몰래 가는 이유는 후작과 그 일가를 모두 불태워 죽여 마르틴이 정당한 후계자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의혹이 남지 않게 모두 태워야 하는 만큼, 준비가 필요했다.
그 준비가 바로 이들이 들고 가는 오크 통이었다.
이 오크 통에 들어 있는 것은 위쪽에서 준비해 준 물건으로 대전쟁 이후 봉인되었다는 지옥의 불이었다.
다들 진땀을 빼고 있을 때, 앞장을 섰던 벤하민 단장이 나지막이 외쳤다.
"다들 준비해! 후작 일가는 하나도 남김없이 참살하고, 증인이 생기지 않게 목격자는 모두 제거하도록."
이제 목적지인 후작의 서재로 통하는 비밀 문이 바로 앞이었다.
여러 번 해 왔던 이야기였지만, 단장은 용병들에게 다시 한번 주의를 주었다.
"계획한 대로 각자 나누어 움직이고, 지옥의 불도 위치에 도착하면 바로 터뜨려."
그는 용병들이 준비된 것을 확인했고, 마르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벤하민의 신호에 마르틴은 아드리아에게 들은 대로 벽을 두드렸다.
기기기긱.
벽 한쪽이 아래로 내려가면서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이 늦어서인지 계단 위 서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통로가 열리자, 계획했던 대로 날렵한 용병 두 명이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은 계단 위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용병들은 아래에서 그들이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렸다.
하나, 둘, 셋…….
시간이 계속 흐르자, 벤하민 단장이 눈썹을 씰룩였다.
신호가 너무 늦었다.
거기다 불길한 냄새가 위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쇠와 피의 냄새.
온몸의 마나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벤하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함정인가."
위에서 적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패 앞으로! 나머지는 천천히 뒤로 물러선다."
그의 말에 용병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방패를 든 용병들이 앞으로 움직이려는 순간.
슈슈슉!
어둠 속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억!"
"크악!"
"맞았어!"
비명과 고함이 통로 안에 가득 찼다.
"모두 죽여! 감히 영주님을 시해하려는 놈들이다!"
화살이 쏘아진 곳에서 마나를 담은 고함이 터져 나왔고, 이어 화살과 함께 갑옷을 두른 기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작전은 실패다! 모두 도망쳐!"
벤하민 단장은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그는 말과 동시에 뒤로 몸을 날렸다.
제대로 당했다.
요새 예언이 가끔씩 삐거덕거리는 것 같더니, 재수 없게도 이번 작전에서 예언이 틀린 모양이었다.
'노아가 몸을 빼길 잘했군. 역시 귀신같은 감이야.'
후작의 기사들이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문이 열린 서재뿐만 아니라, 다른 비밀 문으로도 내려온 모양이었다.
'고의적인 함정일까? 아니면 중간에 들킨 걸까?'
잠깐 의문이 스쳐 지나갔지만, 지금은 어느 쪽이었든 상관없었다.
'마르틴은?'
다행히 마르틴은 보이지 않았다. 능력 덕분에 먼저 도망친 듯했다.
크악!
사방에서 비명이 계속 이어졌다.
오랜 시간 단련시켜 온 용병들이었지만, 제대로 준비한 기사에게는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용병들은 채 몇 합도 나누지 못하고 쓰러졌고, 같이 도망치던 용병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이대로라면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기 전에 전멸이었다.
"젠장! 미치도록 무겁네. 이거 버려도 돼?"
"미친놈! 여태 그걸 메고 뛰고 있었어?"
자신에게 검을 휘두르던 기사를 밀어낸 뒤, 벤하민은 용병들이 떠드는 곳을 돌아보았다.
용병 한 명이 오크 통을 등에 짊어진 채로 도망치고 있었다.
오크 통을 보자, 벤하민은 옆에서 달리고 있는 용병의 횃불을 뺏어서 오크 통을 들고 있는 용병을 향해 횃불을 던졌다. 마나를 가득 실어.
슈아아악!
마나가 실린, 불타는 나뭇가지는 마치 화살처럼 오크 통을 향해 날아갔다.
벤하민은 횃불을 던지자마자 마나를 모두 다리에 싣고 미친 듯이 신전 쪽으로 달려 나갔다.
"피해!"
"막아! 단장! 모두를 죽일 셈이……."
벤하민이 횃불을 날리는 모습을 본 용병들이 고함을 질렀지만, 그 고함이 끝나기도 전에 횃불이 오크 통을 뚫고 들어갔다.
다음 순간.
콰아아앙!
오크 통이 있던 자리에서 큰 폭발이 일어났다.
오크 통을 메고 있던 용병은 폭발하는 순간, 온몸이 산산이 부서졌고 화염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화염이다! 마나를 돌려!"
"피해!"
"살려 줘!"
오크 통 주변에 있던 용병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화염에 휘말렸고, 용병들과 싸우던 기사들도 반 이상이 화염에 휩싸였다.
화염은 계속 퍼져 나갔다. 공기가 부족한 비밀 통로가 아니었으면 성을 온통 불태웠을지도 몰랐다.
"불이 안 꺼져!"
"보통 기름이 아냐!"
"신관, 의사를 불러!"
미처 화염을 피하지 못한 용병과 기사들은 모두 죽었다.
용병들은 화염에 먹혀 버렸고, 몇몇 기사들은 다른 기사에게 이끌려 비밀 통로를 빠져나왔지만 그들의 몸에 붙어 있는 불을 끄지 못했다.
결국 추적은 중지되었고, 용병들은 전멸했다. 용병들을 추적하던 기사들도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다른 용병들은 모두 죽었지만, 신전까지 도망친 용병이 있었다.
바로 횃불을 던져 지옥의 불을 터트린 벤하민 단장이었다.
그는 검은 그을음을 가득 묻힌 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신전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영주 성을 떠났다는 사람들. 바로 그레시아 공작가의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네놈이 죄인들의 대장인가?"
시몬이 그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벤하민은 검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는 소년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포위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이야.
자신은 어이없게도 귀족가 도련님의 먹잇감이 될 모양이었다.
저 귀족 소년은 전혀 자신의 상대가 안 되었고, 다른 기사들도 충분히 해 볼 만했지만, 소년의 뒤에 서 있는 중년의 기사와 노인에게는 영 자신이 없었다.
시몬의 뒤에는 알론소 기사단장과 총집사가 손을 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