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화
제8편 정의란 무엇인가 (1)
도시 나들이를 한 다음 날.
후작가의 영주 성은 파티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도시 나들이를 끝으로 시몬의 일정이 모두 끝났고, 시몬과 아드리아의 약혼에 관한 이야기도 마무리되어 우리 일행은 내일 영주 성을 떠나게 되었다.
오늘 저녁 파티는 공작가 일행이 떠나기 전에 거행되는 마지막 작별 파티였다.
이 동네는 왜 이리 파티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이번 파티에 준비를 더욱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이번 파티는 아드리아의 남편감을 떠나보내는 파티라기보다 그레시아 공작가와 이에로 후작가의 결혼 동맹을 축하하는 파티 같았다.
영주 성이 파티 준비로 떠들썩했고, 시몬이나 다른 사람들도 분주하게 움직였지만, 나는 한가하게 손님방에 앉아 찾아올 사람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고.
똑. 똑.
"후안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되는 사람이었다.
들어간 돈은 많았지만, 저렇게 열심히 일해 주니 좀 더 신경을 써 줘야 할 것 같았다.
방에 들어온 후안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용병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붉은 곰 용병단과 몇몇 용병단이 밖에 나가 있는 용병단원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비밀 통로라는 큰 떡밥이 던져졌는데, 무시할 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영주 성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
누가 알기 전에 써먹어야 했다.
거기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은 사람이 있었으니 잘못되기 전에 일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아마 저번 삶에서도 아드리아가 공작가로 오기 전에 마르틴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 주었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떠난 뒤, 용병들과 마르틴은 비밀 통로를 통해 영주 성에 잠입해 불을 질렀고, 다른 용병들은 아드리아를 제거하기 위해 공작가로 달려왔던 것일 터였다.
지금 보면 일 처리가 상당히 과격했지만 결국 성공했으니, 어설픈 계획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이번에도 예상대로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번 삶에서 보았기에 충분히 예상했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뭘 믿고 저렇게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따로 위에 알리지 않아도 될까요?"
"네. 제가 보고할게요."
"알겠습니다."
후안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보냈을 때와 다른 모습이었다.
귀족 꼬맹이의 재롱을 받아 주는 어른에서 상관의 지시를 받는 부하로 모습이 바뀌었다고 할까.
제대로 일을 알아보게 하려고 어느 정도 사정을 알려 주었더니 나를 보는 표정이 달라졌다.
뭐, 무시 받는 것보다야 백번 나으니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기분이 좋았다. 이래서 사람은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걸까.
하지만, 곧 내 위치를 떠올리고는 정신을 차렸다. 실패했던 삶을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후안을 내보낸 뒤, 나도 방을 나섰다.
이제부터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나 대신 일을 해 줄 사람에게 말을 전하면 될 뿐이었다.
나는 조금 떨어진 손님방의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저, 알렉스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알렉스?"
"네. 들어오십시오."
운이 좋게도 총집사, 기사단장 둘 다 있었다. 두 번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미소를 짓고 있는 총집사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기사단장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기사단장의 무뚝뚝한 물음에 나는 입을 열었다.
"후작의 서자 마르틴과 그와 함께 있는 용병들에 대해 말할 게 있습니다."
관심을 보이는 두 사람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마르틴이 후작가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아드리아에게 들었던 비사, 그리고 아드리아와 비밀 통로를 빠져나가 용병 거리를 들렀다가 우. 연. 히 들었던 비밀 이야기.
마지막으로 조금 전에 후안에게 들은 용병들의 소집까지.
단지 사소한 관심을 보이던 두 사람은 내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표정이 심각하게 바뀌었다.
"상상으로 만든 이야기 같은 것은 아니겠죠?"
이야기가 끝나자 기사단장이 물었다. 역시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확인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이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죠."
"이건 간단한 문제가 아닌데……."
기사단장이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고민스러울 거다. 어린아이가 한 말이라고 무시하기는 힘들 테니.
"후작님께 말씀드리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저희가 고민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고민하는 기사단장에게 총집사가 이야기했다. 확실히 총집사의 말대로였다.
어차피 이곳은 공작가가 아니었다. 내가 기사단장과 총집사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둘은 후작에게 알려 주면 그만이었다.
노인의 관록인가.
"그게 맞겠습니다. 후작님께 말씀드려야겠군요."
기사단장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총집사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모든 일은 비밀로 해 주십시오. 아마 후작님이 따로 부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총집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장이 방을 나선 뒤, 총집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같이 가서 말씀드려야겠군요."
그는 방을 나서기 전에 나를 보며 말했다.
"도련님이 가져오신 정보가 맞는다면 저희 그레시아 공작가는 후작에게 작지 않은 빚을 지우는 셈입니다. 알렉스 공자님 덕분이니 공작님이 기뻐하실 겁니다."
노인은 언제나처럼 내게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고개를 저어 총집사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벌써 뒷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자, 내 할 몫은 끝났다. 이제 일이 어떻게 굴러 가는지 지켜볼 차례였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왔다.
겉으로 보기에 성 분위기는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한 파티도 성황리에 거행되었다.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시몬과 아드리아는 파티에 참석해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고, 두 사람을 축하하러 온 하객들도 그레시아 공작가와 다리를 놓기 위해 열심이었다.
시몬은 물론이고, 기사단장과 총집사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느라 바빴다.
물론, 서자인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없었다.
한가한 시간 동안, 나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주위를 살필 수 있었다.
역시 자세히 살펴보니 전과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총집사는 여느 때와 같은 표정이었지만, 기사단장이나 다른 기사들은 조금 어색한 얼굴들이었고, 후작가의 기사들과 병사들도 긴장한 표정이 조금씩 드러나 있었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과 다른 후작 기사와 병사들의 군기를 칭찬했지만, 대답하는 후작의 표정도 조금 어색했다.
그렇게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잠자리로 돌아갈 무렵, 후작이 나를 불렀다.
늦은 밤이라도 자신의 집무실로 나를 불렀던 공작과 달리, 후작이 부른 곳은 개인적인 응접실이었다.
나를 안내한 집사는 응접실 밖에서 대기했고, 응접실에 혼자 있던 후작은 피곤이 역력한 늙은 얼굴로 방 안에 들어온 나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를 보고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직 애 아닌가. 이런 애가 그런 정보를 물어 왔다고?"
충분히 예상했던 말이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알렉스입니다."
"흥, 그래도 자기 위치를 아는 곁가지군."
그는 기분 나쁜 표정으로 내 인사를 받았다.
"왜 공작가에서 온 이들이 이 일을 너 같은 어린 서자의 공로로 돌렸는지 모르겠군. 비밀 통로는 아드리아에게 물어봐야 하나……."
공작가에서 계속 나를 보아 온 기사단장이나 총집사도 반신반의했는데, 후작이 어린 나를 인정해 줄 리가 없었다.
나는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응접실 구석으로 걸어갔다.
아드리아에게 비밀 통로의 출입구를 찾는 법을 들어 놓았다.
다행히 이 방 아래에도 비밀 통로가 지나가고 있었고, 비밀 문의 표식도 쉽게 눈에 띄었다.
응접실 구석. 규칙적으로 금이 간 벽돌들을 위에서부터 하나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일반인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귀족이라면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드드드득.
전부 밀어 넣자, 구석 쪽 바닥이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눈에 들어왔다.
비밀 통로가 열린 것을 확인한 뒤, 나는 후작을 돌아보았다.
"아드리아 님에게는 알리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마르틴과 가까운 사이였고, 곧 저희 그레시아 공작가로 떠나실 텐데 처가에 회한을 남겨 두면 두 가문의 관계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합니다."
내가 돌아보았을 때부터 후작의 표정은 바뀌어 있었다.
지루해 보이는 표정을 버리고, 노회한 족제비 같은 눈이 나를 훑고 있었다.
저릿한 감각이 피부 위를 훑고 지나갔다.
역시, 후작 정도 되는 사람이 평범한 사람일 리가 없었다.
"천재라고 듣긴 했지만, 거짓말이 아니었군. 그 나이에 기사급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니……."
역시 백번 이야기하는 것보다 한 번 실력을 보여 주는 편이 더 나았다.
"그것도 맞아. 자네 말대로 오점을 아는 사람은 적을수록 좋으니까."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그는 달라진 태도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고, 나는 몇 가지 사항을 감추고 전부 대답해 주었다.
"천재라고 하기에는 연륜이 다른데……. 이런 형태의 능력도 있는 건가……."
대답을 들은 후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능력이라면 능력이지만, 그가 생각하는 능력이 아니니 나는 태연하게 그의 시선을 받았다.
그 뒤로도 몇 가지 제안을 하고 대화를 나눈 뒤, 후작은 나를 돌려보냈다.
방을 나서기 전에 뒤쪽에서 후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쉽군. 아쉬워. 일이 꼬이지만 않았어도 마르틴도 후작가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시름이 담겨 있었다.
다음 날 오후.
그레시아 공작가에서 온 손님들은 사람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영주 성을 빠져나갔다.
전날 파티의 뒷정리를 끝낸 고용인들 일부는 휴가를 받아 성을 떠났고, 영주 성은 평상시보다 훨씬 더 조용해졌다.
그날 밤, 후작의 손님이 떠난 덕분인지 영주 성과 도시의 경계는 전날보다 여유로웠고, 그 덕분에 용병들은 병사들의 눈을 피해 신전 앞에 모일 수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수십 명의 용병이 신전 벽에 붙어 주위를 살피는 중이었다.
이들 앞에는 붉은 곰 용병단 단장인 벤하민과 부단장인 노아 그리고 마르틴이 보였다.
"전부 모였지?"
"네. 처음 약속했던 이들은 다 왔어요."
벤하민 용병단장의 물음에 부단장인 노아가 대답했다.
"백작에게도 연락되었고?"
"네. 영지 밖에서 대기 중이에요. 성공했다는 신호를 보내면 바로 달려올 거예요."
벤하민은 또박또박 대답하는 노아를 보며 눈썹을 실룩였다.
"몸이 많이 안 좋은가? 네가 빠지면 놓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어."
"죄송해요. 그때 싸움에 다친 내상이 잘 낫지를 않아서……."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었는데, 저렇게 안 좋다고 하니 강요를 하기가 어려웠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신호를 하면 바로 도울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어."
"네."
벤하민은 고개를 돌려 마르틴을 쳐다보았다. 이쪽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공자님은 백작님과 같이 계시는 편이 어떻겠습니까?"
"아뇨.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마르틴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 마르틴은 일에 참여하지 않고, 뒤에서 기다리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일에 참여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노아가 빠지게 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같이 가게 되었지만, 혹시나 죽게 된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지도 몰라 상당히 걱정되었다.
위쪽과 연락이 되었다면 걱정을 덜 수 있었을 텐데…….
일이 너무 급하게 진행돼서 연락할 시간이 부족했다.
하지만, 문제는 없을 게 분명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계획이었고, 위쪽의 지시는 지금까지 틀리지 않았다. 며칠 전 비밀 통로를 알게 된 것까지.
이번 작전도 당연히 성공할 것이었다.
그는 용병들을 데리고 신전의 열린 문으로 향했다.
용병들도 그의 뒤를 따랐고, 노아는 묘한 표정을 지은 채로 뒤로 물러섰다.
그때, 신전으로 들어가던 용병 하나가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기 신전에 들어가면 고자가 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의 말에 다른 용병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모두 들었던 이야기였다.
영지의 주인인 후작의 성에 불을 지르는 것은 무섭지 않았지만, 고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헛소문이다."
"그렇죠?"
벤하민의 대답에 용병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아직도 불안으로 가득했다.
용병들은 굳은 얼굴을 하고, 신전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