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제7편 용병들 (2)
황당한 이야기를 들은 여자 용병이 새로 나타난 용병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네놈은 또 뭐야! 한참 재미있는데 방해하지 마!"
"약자가 고통 받는 것을 보았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아니, 약자라니. 이 쥐새끼가 얼마나 우리를 귀찮게 했는데. 그리고 너, 거기 멈춰!"
망토를 뒤집어쓴 용병과 사이코 여자 용병이 떠드는 사이 옆으로 빠져나가려 했는데, 아쉽게도 걸리고 말았다.
사이코 여자가 슬금슬금 움직이는 내게 검을 겨누자, 새로 등장한 망토 용병이 내 앞을 막아섰다.
역시 오지랖이 넓은, 좋은 용병이었다.
"아니, 내가 말로 하니까 장난으로 보이나? 죽어!"
앞을 막아서자, 사이코 여자 용병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왔다.
동시에 망토 용병의 손에 들린 검집에서 검이 빠져나왔다.
번쩍!
그 순간, 눈앞에서 번개가 번쩍였다.
"으엑!"
달려들었던 사이코 여자가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역시 실력이 좋았다. 방금 같은 검은 평범한 용병이라면 피하기 어려웠다.
"내 검을 피할 실력을 갖추고도 겨우 어린아이를 괴롭히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라!"
"젠장, 죽을 뻔했잖아! 그리고 어린애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두 용병이 나를 두고 각기 다른 소리를 했다.
한쪽은 내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어린애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다른 쪽은 내 실력을 보지 못했기에 내 체격을 보고 어린애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니, 그런 것치고는 어린애라고 꽤나 확신하는 어조였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내 눈은 조금 전부터 한곳에 계속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망토 용병이 검집에서 검을 뽑는 순간부터 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은 검집과 달리 매우 고풍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관리는 잘되어 있어 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마치 번개가 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는데, 검은 역사책에서 보았던 옛 제국 때의 검과 비슷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넋을 놓고 검을 쳐다본 것은 역사책에서 보았던 형태의 검이라서가 아니었다.
검날에 새겨져 있는 문양 때문이었다.
태양을 향해 비상하는 새의 문양.
분명 저번 삶에서 보았던 문양이었다.
유적 지하의 동굴 입구에서, 그리고 버려진 묘지에서.
머릿속으로 그날 묘지에서 아드리아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이 구멍에 검을 찔러 넣으면 딱 맞을 것 같은데……. 검을 구멍에 밀어 넣으면 기관이 움직여서 숨겨진 보물 상자가 나타나는 게 아닐까?"
그녀는 관 바닥에 뚫려 있는 구멍을 보고 이렇게 말했었다.
좋지 않은 상황 때문에 초조함을 잊으려 마구 떠들었던 말이었고, 그냥 흘려들은 말이었는데, 눈앞에 같은 문양이 새겨진 검을 보자 아드리아의 말이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게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계속 찾아왔던 문양을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그때, 한참 넋을 놓고 검을 보고 있는 내 귀에 용병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젠장, 왜들 이렇게 늦는 거야. 영 걸쩍지근한 방해꾼이 나타났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회는 지금밖에 없었다. 나는 용병 거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멈추라고 했잖아!"
당연히 날 막기 위해 용병 여자가 달려왔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다시 방해꾼이 막아섰다.
"애를 보내 주시오!"
"이 새끼가!"
캉! 캉! 캉!
다시 번개가 치고, 검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웠다. 좀 더 좋은 검이 있었다면, 이렇게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번에도 저번 삶에서 당한 것을 갚지 못하다니.
만난 게 몇 개월 빨라졌다고 하지만,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서 저번 삶보다 강해졌다고 자신했는데.
자만심과 성급함 그리고 좋지 못한 검 탓에 모르는 사람에게 뒤를 맡긴 채로 이렇게 도망치게 되다니.
상처 때문일까? 달리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제길! 도망가 버렸잖아! 너, 조금만 기다려! 다들 오면 팔다리를 잘라서 박제를 해 줄 테니까."
"정말 몹쓸 사람이군. 도시 안에서 검에 독까지 바르다니. 영지병에게 들키면 벌금형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아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 용병 맞아?"
두 사람은 검을 휘두르는 것 이상으로 말로도 계속 싸워 댔다.
싸움은 이미 한쪽으로 완전히 기운 상태였다.
검 실력도, 검의 위력도, 전부 망토 용병이 압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싸움은 금방 끝나지 않았다. 검에 묻은 독 때문에 망토 용병은 결정타를 날리지 못하고 있었다.
둘이 싸우는 동안, 멀리서 들려오던 휘파람 소리가 점점 다가왔다.
"호호, 다들 오나 봐. 날 화나게 한 난쟁이 대신에 네놈을 가지고 놀아야겠어."
여자 용병의 말에 망토 용병의 움직임이 멈칫거렸다.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내가 고민을 해결해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슈악!
나는 반만 남은 검을 힘껏 던지며 망토 여자에게 외쳤다.
"공격해요!"
내 목소리에 두 사람은 모두 깜짝 놀랐다.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놈이 다시 돌아왔으니 놀랄 수밖에.
하지만, 두 사람도 경험이 풍부했던 모양이었다.
"어디서 감히!"
깡!
여자 용병은 갑자기 날아온 검을 막는 데 성공했다.
"윽! 마나가 담긴 검이라고?"
하지만, 반검에 실린 힘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날아온 검에 밀려 자세가 무너졌고, 그 순간 치고 들어온 망토 용병의 손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큭, 네놈이……."
뭔가 뻔한 말을 남기고 여자 용병은 쓰러졌다.
나는 살짝 다리를 절며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도망친 게 아니었어?"
"그럴 생각이었지만, 그러질 못했네요."
용병의 거슬리는 음성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용병 거리로 달려가다가 무거워지는 다리에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골목의 어둠 속을 절뚝이며 달렸다.
특별한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그냥 도망치기 싫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몰래 돌아와 골목의 어둠 속에 숨어 싸움을 지켜보고, 이렇게 검을 날려 도와주고.
냉정하게 생각하면 정말 바보짓이었다.
나와 관련도 없고, 한 번 만났을 뿐인 사람인데.
도움을 받았다고 순진하게 다시 도울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무덤의 단서인 문양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지, 어떤 이유든 잘한 짓은 아니었다.
"죽인 게 아니었네요."
내 말에 망토 속에 있는 시선이 조금 엄해진 것 같았다.
"어린애가 벌써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를……."
역시 용병답지 않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 귀족들도 그런 소리는 안 하는데 어디 꽃밭에서 평생을 놀다 온 사람인가.
나는 옆에 나뒹굴고 있는 반검을 들어 올렸다.
반검에 남아 있던 검날도 사방으로 금이 가 있었다.
이제 완전히 못 쓰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아쉽게도 여자 용병의 독검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간 거지?
나는 망가진 검을 손에 쥐고, 쓰러진 여자 용병 앞으로 걸어갔다.
휘파람 소리가 더 가까워졌고, 이제 고함이 들릴 정도였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쓰러져 있는 여자 용병 앞에 서서 검을 내려쳤다.
정확히 여자 용병의 목을 향해.
퍽!
하지만, 검은 여자 용병을 찌르지 못했다.
반검은 다른 검에 막혀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왜 막죠? 우리를 죽이려고 했던 여자인데."
"정말……. 나라가 어떻게 되어 가는 건지……."
망토 용병은 이상한 소리를 중얼거린 뒤, 뒤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람들이 오잖아.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저들에게 잡히면 안 되는 거 아냐?"
망토 용병은 내 팔을 잡고 용병 거리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순순히 망토 용병을 따라 달렸다.
이미 늦어 버렸다.
검은 부서지고, 이 오지랖쟁이가 막고 있으니 저들이 도착하기 전에 여자를 죽이는 것은 무리였다.
하지만, 다리를 다친 사람을 뛰게 하다니.
"저 여자, 노아라는 용병 맞지? 붉은 곰 용병단 부단장."
상대를 모르는 게 아니었었다. 망토 용병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을 했었다.
"성격 안 좋은 거로 유명한 용병이던데, 실제로 보니까 그 정도 문제가 아닌 것 같아."
아무렴, 그 정도 문제가 아니지. 미친 듯이 위험한 문제라니까. 그런데 왜 말린 건데!
"하지만, 그런 여자라고 해도 붉은 곰 용병단 부단장이 이런 곳에서 죽으면 엄청 귀찮아질 게 뻔하잖아."
"너도 그렇고, 나도 이 영지에 더 이상 붙어 있지 못할 거야. 잘못하면 곰 용병단에게 평생 쫓길지도 몰라."
헐, 오지랖쟁이가 꺼낸 말치고는 무척이나 논리적인 말이었다.
"내 얼굴도 모르고, 꼬맹이는 완전히 착각하고 있으니 죽이지만 않으면 금방 잠잠해질 거야."
내 원래 모습을 알지 못하는 평범한 용병의 입장에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나도 조용한 편이 좋았다.
어느 정도 계획이 잡혀 가는 중인데, 이런 소란이 벌어지면 좋을 리가 없었다.
죽이면 죽이는 대로 좋았지만, 죽이지 않는 것도 계획을 위해선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보다 무슨 일로 쫓기는 거야? 단순한 소아성애자라서 쫓는 것은 아닌 것 같던데?"
그런 이유로 쫓기는 것도 꽤나 무섭겠는걸.
"뭔가 들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에요.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면서 쫓아왔어요."
"흠. 이야기를 훔쳐 들었다고……. 너도 단순한 꼬맹이가 아니었나?"
어라? 단순한 설명이었는데 오해를 산 건가?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들었을 뿐이에요."
"용병 여럿의 추적을 피하고, 다리를 다쳤는데도 나도 모르게 접근해 검을 던지고, 그 검에는 마나도 실려 있는 꼬맹이라……. 거기다 그 꼬맹이가 우연히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실력을 들킨 덕분에 핑계가 안 먹혔다.
"뭐, 도와준 건 후회하지 않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도와준 값으로 어떻게 된 건지 들을 수는 있겠지?"
망토 용병이 물었을 때 마침 우리는 용병 거리에 접어들 수 있었다.
이곳은 아직도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아니, 밤이 깊어져서 더 시끄러워진 것 같았다.
"그런데 나를 아세요?"
"아까 봤었잖아. 내가 소매치기 잡아 준 거 기억 안 나?"
역시,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망토를 벗었다.
"역시 미소년이네. 벗으니까 얼마나 좋아."
역시, 말을 하면 할수록 말투가 달라지고 있었다.
'변성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네.'
나는 망토 속에 숨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 얼굴도 알고 계셨으니……. 저는 어떻게 부르면 될까요? 아가씨? 누님?"
내 말에 상대는 우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난감한 모양이었다.
"들켰어?"
어색하던 목소리가 제 모습을 찾았다.
조금은 중성적인 허스키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확실히 여자 목소리.
"그런 어색한 말투는 말만 조금 많이 하면 들킬 수밖에 없어요."
"역시, 그런가……. 조심하려고 했는데, 너무 흥분했었나 봐."
어느 파트에서 흥분할 걸까? 오지랖? 전투?
어쨌거나 그녀처럼 나도 듣고 싶은 게 있었다.
"어디 묵고 계시나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따로 찾아갈게요. 보답도 해야겠고, 무슨 일인지 말씀도 드릴게요."
궁금한 게 많았지만, 당장은 다른 일이 급했다. 우선은 있는 곳을 듣고 다음에 만나야 했다.
다행히 그녀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지내는 곳을 알려 주었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다른 여관이었다.
"저녁 시간에 오면 될 거야. 나가게 되면 주인에게 돌아올 시간을 말해 놓을 테니 물어봐."
그녀는 약속을 잡자, 내 손에 약병을 하나 쥐여 주고 가 버렸다.
약병 안에는 꽤나 고급스러운 약이 들어 있었다. 상처 치료 전용인.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한 뒤에 건물 구석에 앉아 상처에 약을 발랐다.
피가 멎고, 상처에서 바로 거품이 올라왔다.
좋은 약이었다. 처음 본 아이에게 주기에는 너무 비싼 약.
의아했지만, 덕분에 다리의 통증은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다리를 확인한 뒤에 아드리아가 기다리는 여관으로 향했다.
여관에는 마르틴은 보이지 않았고, 아드리아가 혼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그녀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오빠가 바쁜 일 있어서 먼저 갔어."
음, 그 바쁜 일이 나 때문일 것 같은데…….
"오랜만에 이야기를 많이 했어. 오빠도 많이 달라졌지만, 또 하나도 안 달라졌어."
여관을 나서 돌아오는 길에 아드리아는 마르틴과 대화한 이야기를 계속 늘어놓았다.
주위에 낯선 용병들이 뭔가를 찾으며 지나갔지만, 남매로 보이는 우리 두 사람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용병 거리를 벗어나자 사람이 줄어들었고, 신전에 다가가자 거리에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아, 맞다. 오빠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 줬어. 나중에 시간이 나면 오빠가 만나러 와 준대."
결국, 그녀는 마르틴에게 비밀 통로를 알려 주었다.
몇 개월이나 빨라졌지만, 결국 저번 삶과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