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제4편 서자 대 서자 (1)
아드리아의 장황한 설명을 간단하게 줄이면, 이런 내용이었다.
마르틴은 공작가 저택에서 태어나 자란 나와 달리 영주 성 밖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후작가의 하녀였고, 그를 임신한 탓에 영주 성에서 쫓겨났다.
그녀는 쫓겨나면서 받은 돈으로 억척스럽게 일해 마르틴을 낳고 키웠다.
그리고 다른 평민 남자와 만나 결혼도 하고, 마르틴의 여동생을 낳았다.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그였지만, 6살 때 후작의 부름으로 영주 성에 오게 되었다.
시찰을 나온 후작이 각성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그를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운 좋게도 그는 상속 능력을 각성했고, 마침 평민인 남편이 죽어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던 어머니와 여동생도 함께 영주 성으로 부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하녀 출신인 데다 첩도 아니었기에 마르틴의 입지는 평범한 서자보다도 더 나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열심히 갈고닦아야 했다.
"마르틴 오빠는 열심히 훈련했어. 기사들에게도 열심히 배웠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
말을 하는 아드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그녀가 기사를 꿈꾸게 된 이유가 마르틴 때문이었을까?
"시샘도 많이 받았고, 오빠들이나 어른들 중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래도 마르틴 오빠의 실력은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
같이 이야기를 듣던 시몬이 힐끗 나를 훔쳐보았다.
나와 비슷한 처지처럼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레시아 공작가에 딱히 불만이 없었다. 내가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이미 집에서 쫓겨났으니까.
"그렇게 모두에게 인정을 받고, 기사들과의 대련에서도 이겨 나가고 있었는데, 그만 일이 생겼어."
귀족가에서 벌어지는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마르틴의 어머니가 평민인 남편에게서 얻은 딸. 마르틴의 여동생이 임신을 하게 된 것이다.
"누구 아이인지는 모르겠는데, 마르틴 오빠의 어머니 때문에 더 말이 많아졌지."
마르틴의 어머니도 하녀이면서 후작의 아이를 가지게 된 것이었고, 그의 딸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후작가에서 그냥 놔둘 수는 없었을 터였다.
"뭔가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는 말도 있고. 결국 마르틴 오빠 가족들은 집을 나가게 되었어."
뭔가 이해가 안 되는 결과였다. 겨우 그런 것 때문에 상속 능력을 얻은 서자를 쫓아내다니.
소문이야 잠재우면 되는 거고, 마르틴만 남기고 나머지 둘은 영주 성 밖에 따로 집을 얻어 주어도 될 텐데. 왜 그랬지?
생각을 이어 가던 와중에 조금 전 아드리아가 한 말이 떠올랐다.
'맞아. 소문이 있었지. 당연히 악담일 테고, 제일 심한 악소문이라면 결국…… 후작 일가와 연관되었겠군.'
최악의 경우, 후작 아들들 중에 임신한 아이의 아빠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냥 소문이 아닐 수도 있는 거고.'
그렇게 되면 족보가 보통 꼬이는 게 아니었다.
이쪽 세상의 귀족들도 일부다처제에다 가계가 복잡한 경우도 꽤 있었지만, 그건 전부 귀족들 간의 일이었다.
이곳 귀족들은 상속 능력 덕분에 귀족의 피를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피를 희석시키는 평민들과의 관계는 그들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일 뿐이었다.
아드리아와 시몬은 아직 눈치를 채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는 풋풋한 소년, 소녀였다.
'그럼, 쫓겨난 이유는 알아낸 것 같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지 쫓겨난 일 때문에 마르틴이 그토록 분노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에서는 저택을 불태워 후작 일가를 몰살시켰고, 사람을 보내 살아남은 아드리아까지 죽였다.
후작가에 오면서 잠깐 들었던 그의 이야기에서도 그의 강한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오래 보지는 않았지만, 마르틴이 단지 저택에서 쫓겨났다고 그렇게 강한 분노를 품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아드리아가 모르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게 분명했다.
"저택을 나간 뒤에는 쉽게 만날 수가 없었어. 사람을 써서 찾아봤지만, 영지 내에 없을 때도 많고 오빠도 피하는 것 같고. 나가기 전에는 정말 친하게 지냈는데……."
우울한 얼굴로 말소리를 줄이던 아드리아가 다시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오빠 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고, 내일 나들이 코스에 오빠가 있다는 여관도 들어 있다며. 오빠를 볼 수 있을지 알고 싶어서 부른 거야."
다시 봐도 아드리아는 빈말을 못 하는 성격이었다.
인사로라도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있어서 불렀다는 말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말은 눈곱만큼도 하지 않았다.
뭐, 그런다고 마음이 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번 삶과 다르게 오빠만 찾는 모습이 조금 낯설어 보였다.
"글쎄요. 내일 여관에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낯설어 보여서일까. 대답이 퉁명스럽게 나와 버렸다.
방 안에는 어색한 공기가 한참 동안 감돌았고, 그렇게 다과 시간이 끝이 났다.
다음 날, 아드리아와 시몬과 나 그리고 비앙카와 호위 기사 몇 명이 함께 도시 나들이를 나섰다.
시몬과 아드리아가 따로 마차를 탔고, 나는 비앙카와 다른 하녀들과 함께 다른 마차에 타게 되었다.
꽤나 심한 차별 대우였지만, 약혼 예정인 두 사람을 위해서라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나는 얌전히 하녀들의 마차를 올라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이번 도시 나들이는 꽤나 무료한 시간이었다.
공작가보다 더 깨끗하지도 않았고, 볼거리가 많지도 않았다.
예상대로 도시 안이라서 어떤 위험도 없이 나는 하녀들의 수다나 듣고 있어야 했다.
그렇게 끝난 외유는 세 사람 모두에게 완전히 망한 행사가 돼 버렸다.
우선, 아드리아는 마르틴과 만나지 못했다.
여관에 들렀지만 마르틴은 자리에 없었고, 계속 기다릴 수 없어 그녀는 자신이 왔다 갔다는 말만 여관 주인에게 남기고 밖으로 나와야만 했다.
덕분에 아드리아는 종일 우울했고, 아직 풋내기인 시몬 형은 둘만의 단란한 시간은커녕, 우울한 그녀를 위로하지 못해 온종일 쩔쩔매야만 했다.
그리고 나는 나들이 동안에 아무 정보도 얻지 못했다.
후안 병사가 '붉은 곰 용병대'의 숙소와 약간의 정보를 더 알아내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다른 영지의 병사가 조사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움직여 조사하고 싶었지만, 호위 중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리고 호위가 아닌 상황에서도 역시 나이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의미 없는 외유를 끝내고, 헤어질 때 아드리아가 나에게 물었다.
"밤에는 돌아오겠지?"
누굴 말하는 건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겠죠. 숙소 비용을 이미 냈으니까요."
아드리아 옆에 있던 하녀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아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시겠지만, 밤에는 나가실 수 없습니다."
아드리아는 서슬 퍼런 하녀의 눈빛을 무시하고 나에게 다시 물었다.
"너도 마르틴 오빠가 다시 보고 싶지?"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의문이 들긴 했지만, 우선 평범하게 대답했다.
"그렇긴 하지만, 방법이 없네요."
내 말이 끝나기 전에 하녀가 아드리아를 향해 소리쳤다.
"아가씨!"
"그냥 물어본 거예요."
아드리아는 하녀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고, 이어 시몬 형과 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오늘 고생하셨어요. 평안한 밤 보내시길."
그녀는 한 손으로 치맛단을 들고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시몬 형도 가슴에 손을 대고 인사를 했고, 나도 그를 따라 했다.
내 인사에 아드리아와 하녀들이 미소를 지었다.
꼬맹이가 어른이 하는 인사를 하는 것이 귀여웠던 모양이었다.
"흥!"
옆에서는 콧방귀가 들려왔다.
온종일 심기가 불편했던 시몬 형은 결국 꼬인 심사를 드러낸 것이다.
시몬 형은 아드리아가 보이지 않자, 고개를 휙 돌리고는 말없이 자기 방으로 향했다.
서자인 나를 무시하기 위한 귀족적인 방법인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나도 손님방에 들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해가 넘어가 창밖은 어두웠다.
"예상보다 난관이 많은데……."
아니, 난관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앞이 꽉 막혀 버렸다.
어느 정도 정보를 얻긴 했지만, 이 정도 정보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좀 더 자세한 정보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했는데, 이렇게 영주 성에 붙잡혀 있어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영주 성을 방문한 손님이 홀로 성 밖으로 나가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어린 내가 밖으로 나가는 것은 더욱 힘들었다.
밤에 외출한다는 말은 아예 꺼낼 수도 없었다.
암살자를 만났을 때, 한 수 정도 배웠으면 좋았을 뻔했다.
단도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았지만, 몰래 저택 안으로 잠입하는 것은 지금 같은 때를 위해 배울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있었나?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걸어갔다.
덜컥.
문을 열어 보았지만, 복도에는 사람이 없었다.
잘못 들었나?
똑. 똑.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아니야?"
노크 소리는 문 쪽에서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바닥에서 들리고 있었다.
"알렉스……. 알렉스……."
거기다 여자 목소리까지 들려왔다.
소름이 쫙 돋았다.
"설마, 귀신까지 있는 거야?"
마나도 있고, 초능력도 있고, 성법도 있는데 귀신도 충분히 있을 수 있었다.
"아니, 그건 좀 봐주라."
하지만, 귀신은 영 내 체질에 안 맞았다.
뭐, 다른 세상에서 전생해 온 나도 있었지만, 귀신은 분명 다른 문제였다.
"귀신이 아닐지도 몰라. 환청일 수도 있지. 너무 신경을 많이 썼던 걸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툭!
불쑥 침대 아래쪽에서 바닥 판이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도와줘. 그렇게 불렀는데, 도와주지도 않고."
이어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 지금은 조금 전과 달리 또렷하게 들려왔다.
"아드리아 님?"
나는 놀라 침대로 달려갔다.
"끙."
침대를 밀어 확인해 보려 했지만, 침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침대 아래에서 다시 아드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도 침대가 안 움직이지? 어쩔 수 없네. 알렉스도 기어서 들어와야겠어."
그녀의 말에 나는 침대 옆에 엎드렸다.
침대 아래쪽을 바라보니, 바닥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사방 일 미터 정도 크기의 바닥 판이 사라졌고,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계단 아래쪽에 한 손에 등을 든 아드리아가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짜잔, 놀랐지? 우리 영주 성 비밀 통로야."
그녀는 자랑하듯이 계단과 뒤로 보이는 통로를 가리켰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조금 내려오니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비밀 통로인가요?"
"응. 오래전에 폐쇄되어서 아는 사람이 없어. 내가 발견한 거야."
그녀의 말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저번 삶에서 보았던 아드리아의 성격이라면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찾았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아니면 이런 낡은 통로를 발견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다행이야. 이 손님방에 묵게 되어서. 연결 안 된 방도 많거든."
"그런데 갑자기 왜 비밀 통로입니까?"
"응. 이 비밀 통로를 통과하면, 영주 성 밖으로 나갈 수 있어. 우리 둘이 마르틴 오빠를 만나러 가는 거지."
그녀를 다시 확인하자, 아드리아는 남자 차림의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체형과 얼굴 덕분에 절대로 남자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저요? 저랑 간다고요?"
"응. 아까 물어봤잖아."
아니, 그런 뜻인지 몰랐지.
하지만, 그녀의 권유는 무척이나 고마웠다. 앞뒤가 꽉 막혔던 나에게 꼭 필요한 도움이었다.
다행히 나도 외출복 그대로여서 칼만 챙긴 뒤에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그긍.
기관이 있는지 아드리아가 벽 한쪽을 만지자, 계단 위의 통로가 다시 막혔다.
우리 두 사람은 아드리아가 들고 있는 등에서 나오는 빛을 길잡이 삼아, 비밀 통로 안을 걸었다.
비밀 통로는 무척이나 좁고 어두운 통로였다.
오래되었는지 아드리아 말대로 먼지가 가득했고, 사람 손이 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알렉스, 너한테 처음으로 보여 주는 거야.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안 돼."
아니, 나한테 알려 준 게 더 문제입니다만?
외부인한테 영주 성 비밀 통로를 알려 주다니. 후작이 알았다가는 뒷목을 잡고 쓰러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약속했다.
그녀와 후작가의 문제였지, 내 문제는 아니었다.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길이 생긴 이상, 열심히 써먹어 줄 생각이었다.
그녀는 앞장서서 걸어가며 계속 이야기했다.
"마르틴 오빠한테는 알려 줄 생각이야. 비밀 통로로 오면 다른 사람은 모를 테니까. 나중에 몰래 찾아오라고 할 거야."
마르틴에게 알려 준다고?
설마…….
나는 저번 삶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후작의 성이 불타고, 마르틴이 승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경계가 삼엄한 성이 어떻게 불타게 되었는지, 그리고 범인이 밝혀지지도 않았고, 또 어떻게 마르틴이 승계하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아드리아가 지금 그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나는 아드리아의 뒤통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범인은 바로 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