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제2편 이에로 후작가 (1)
공작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 귀족을 향해 시몬이 인사를 했다.
"후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시몬 데 그레시아입니다."
후작을 향한 인사는 흠 잡을 데 없이 정중했지만, 그답지 않게 무척이나 딱딱한 인사였다.
후작 앞이어서 긴장했나?
그는 후작에 이어 귀부인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후작의 자식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처음 인사는 막 성인이 된 듯한 어린 청년이었다. 나이로 보아, 그는 후작의 첫째 아들인 것 같았다.
그를 보니 오는 길에 보았던 서자 마르틴이 생각났다.
큰 덩치와 자신감이 가득한 서자와 기가 약해 보이는 정식 후계자.
제삼자인 내가 봐도 두 사람은 너무 비교가 되었다.
그리고 평범해 보이는 다른 아들들과도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딸들과 인사를 했다.
제일 먼저 맏딸인 아드리아.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시몬이 입을 열었다.
"정,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시몬 데 그, 그레시아입니다."
세상에. 귀족 예절을 몸에 새긴 것 같은 시몬이 말을 더듬다니.
이제야 그가 긴장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아차린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후작과 귀부인들은 슬쩍 미소를 지었고, 아드리아의 여동생들은 손으로 입을 막고 작게 웃었다.
시몬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끝까지 인사를 마쳤다.
창피를 무릅쓴 저 모습은 역시 훌륭한 귀족의 표상이었다.
"뒤에 있는 소년은 누구지?"
뒤이어 기사단장과 총집사의 인사가 이어진 뒤, 후작이 나를 보며 물었다.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봐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후작이 물어온 이상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앞으로 나가 고개를 숙였다.
"알렉스라고 합니다. 후작님께 인사드립니다."
"알렉스? 아, 그 서자……."
슬쩍 그를 쳐다보니, 그는 한껏 인상을 쓰는 중이었다. 후작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기야 정략결혼을 준비 중인데, 상대 가문에 대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모두 들어가지."
역시,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문 안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그러게 분위기 이상할 거라니까. 왜 물어봐서는.
후작 일가는 나를 보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놀란 눈으로 나를 보는 사람도 있었고, 후작보다 더 나를 쏘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 대부분은 서자가 괜한 자리에까지 따라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다만 한 사람. 시몬 형의 약혼 예정자는 서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몬 형은 후작 일가에 둘러싸인 채로 안채로 들어갔다. 나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아드리아도 그들과 함께 안채로 사라졌다.
"지낼 곳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사들과 기사단장, 총집사 그리고 나는 따로 손님방으로 안내되었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따로 독실을 주었다. 애매한 내 위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독실을 내준 것 같았다.
점심 식사도 따로 방으로 가져왔다.
식사가 끝난 뒤, 내 방으로 찾아온 사람이 있었다.
후작가로 오는 동안, 열심히 꼬셔 놓은 병사였다.
후안이라는 이름을 가진 병사는 다른 사람보다 과묵하고 성실했다.
나는 돈과 정성을 들여서 그를 내 편으로 만들어 놓았고, 기사단장도 여행 중에는 그가 나를 돕는 것을 허락했다.
후안의 입장에서는 어린 도련님의 수발을 드는 것이라 귀찮을 법도 했지만, 열심히 꼬셔 놓은 덕분에 내 부탁을 잘 들어주었다.
"알아봤나요?"
"네. 다행히 멀리 가지는 않았습니다."
"어디죠?"
"용병 거리에 있는 여관에 투숙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들키지는 않았죠? 감시받는다는 것 알면 오해를 살 수도 있어서요."
"네. 사복으로 갈아입고 지켜봤습니다."
역시 사람을 잘 선택했다. 그는 내 예상보다 더 잘해 주었다.
나는 후안에게 외성 앞에서 헤어진 마르틴을 몰래 미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후안에게는 그를 미행하는 이유를 나중에 몰래 찾아가 놀라게 할 생각이라고 말해 놓았다.
뉘앙스는 다르지만, 실제로도 같은 이유였고.
"수고하셨어요. 나중에 꼭 보답할게요."
"괜찮습니다. 보답은 이미 충분히 받았습니다. 이 돈도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그는 가슴을 두드렸다. 가슴에서 내가 건네준 금화 소리가 들렸다.
그 금화는 아픈 그의 어머니의 치료약을 사기 위한 돈이었다.
후안이 아픈 어머니의 약을 사기 위해 돈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듣고 냉큼 건네준 돈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후안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했다.
나에게도 적은 돈이 아니었지만, 여행 중에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돈보다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찾기 힘들었다.
뭐, 어디 투자할 곳도 없으니 성인이 되기 전에 원금을 돌려받을 수 있다면 그리 손해 보는 일도 아니었다.
'설마 떼먹지는 않을 거야. 암.'
불안해지는 마음을 꾹꾹 눌러 놓고, 나는 마르틴이 머물고 있다는 여관 이름을 물어보았다.
"은빛 용사 여관입니다."
은빛 용사. 후작가의 선조를 말하는 걸까?
어쨌거나 외우기 쉬운 이름이었다.
나는 방을 나서는 후안에게 몇 가지 부탁을 더 했다.
그가 나간 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도중에 마르틴을 만난 덕분에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르틴이 있는 곳도 알아냈고, 용병과 접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났던 용병들과 같은 용병인지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되었다.
겸사겸사 시몬이 언제 아드리아에게 반했는지도 알아냈고, 쓸데없이 마르틴이 왜 일을 벌였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증거를 찾는 건가."
최악의 경우가 아닌 이상, 내가 직접 처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다른 사람, 즉 후작가의 손을 빌려야 했고, 후작에게 고자질하려면 증거가 필요했다.
뭐, 상황을 보니 확실한 증거가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후작이나 그 부인들에게 의심을 살 만한 정도면 충분해 보였다.
"자, 그러면 이제 나갈 이유를 만들 차례이려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기사단장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시몬 공자님이 언제 외유하실지 알고 싶다고요?"
"네. 외유하는 곳을 미리 둘러봐야 할 것 같아서요."
기사단장의 입가에 실소가 스쳐 지나갔다.
"사전 답사입니까. 그런 건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뭐, 그의 심정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계속 말을 이어 갔다.
"형의 경호로 온 거니까요. 후작가로 올 때나 돌아갈 때는 기사와 병사들이 있으니 제가 할 일이 없잖아요. 영주 성안에서도 마찬가지고."
반나절 동안 시몬 형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성안에 있는 동안에는 경호는커녕 얼굴 보기도 어려울 것 같았다.
"외유 때는 소수 인원만 움직일 테니, 그때야말로 제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맡겨진 일은 제대로 해내고 싶습니다."
나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열심히 거짓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은 내키지 않는 얼굴로 허락을 했다.
"하지만, 사전 답사는 혼자 보낼 수 없습니다. 기사 한 명과 같이 가시죠."
"그럼, 우고 기사님과 함께 가겠습니다."
"우고 말입니까?"
"네. 우고 기사님이 잘하실 것 같아요."
기사단장이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었다.
그거야 저번 삶에서 보았으니까…….
나는 넘겨짚었다는 표정을 지은 채 기사단장을 마주 바라보았다.
외유는 삼 일 뒤로 결정되었다.
도착한 날부터 이어진 소개와 인사가 다음 날까지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로 후작가와 그레시아 공작가의 정혼은 벌써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만찬이 여러 차례 열렸고, 그레시아 공작가의 차기 후계자와 안면을 익히고 싶은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너무 몰려들어 외유가 없어질 뻔했지만, 당사자들끼리 이야기할 시간도 필요하다는 후작부인들의 이야기에 겨우 외유가 잡혔다.
다행스럽게도 외유 코스 중에 용병 거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외유 전날, 사전 답사를 위해 영주 성을 나섰다.
우고 기사가 나와 함께 영주 성을 나섰고, 도시를 안내하기 위해 후작가에서 사람을 붙여 주었다.
후작가는 특이하게도 하녀를 붙여 주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비앙카입니다."
나는 또다시 이어진 인연에 그만 웃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우리를 안내하는 것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서자이긴 하지만, 나도 공작 일가의 한 사람이었다.
내 나이 때문에 하녀를 보낼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고 영주 성 밖으로 나가는데 아무 하녀나 보낼 수는 없었을 터였다.
영주 성을 나선 세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비앙카는 전에 봤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실력을 숨긴 채 길 안내를 맡은 하녀의 모습만 보여 주었다.
하지만, 조금씩 흘러나오는 기세를 전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고는 저번 삶과 다르게 그녀의 숨긴 기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때도 미리 듣지 못했다면 비앙카의 실력을 알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우고만 못 알아차리는 걸까? 아니면 기사들은 다 못 알아차리는 걸까?
비앙카의 능력을 알아차린 것이 내 능력의 일부인지, 아니면 귀족의 특성인지 이것도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외유 코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코스는 도시를 벗어나지 않았다.
비앙카는 영주 성에서 멀어지자, 주변에 보이는 광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중앙 광장입니다. 전전대 후작님이 이 광장 분수대에서 후작부인께 사랑을 고백한 일화로 유명한 곳입니다."
무심한 얼굴로 꺼낸 이야기는 표정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저기 보이는 신전은 1년 전부터 비어 있습니다. 담당 신관이 술을 먹고 성법을 역으로 거는 바람에 출입 금지 구역이 되어 버렸습니다. 저 안에 들어가면 성불구가 되니 조심하십시오."
동네 아줌마가 몰래 나누는 소문에다가 사람들이 쉬쉬하는 이야기도 들어 있었다.
우고 기사는 뜨악한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역시, 그 성격이 어디 가진 않았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불만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지금은 그 불만을 들어 줄 시간이 없었다.
우고 기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심히 주변을 살폈고, 나도 그의 흉내를 냈다.
그렇게 여러 장소를 거쳐 드디어 원하던 곳에 도착했다.
"이곳은 용병 거리입니다.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곳입니다. 시끄럽고, 지저분하고, 사고뭉치들이 모여 있는 곳이죠."
무척이나 신랄한 이야기였지만, 눈앞에 보이는 용병 거리는 그녀의 말을 부인하기 어렵게 했다.
거리 분위기는 무척 활기찼다.
무장한 용병들이 무리를 지어 걷고 있었고, 그들을 향해 소년 소녀들이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여관으로, 무기상과 다른 상점으로, 술집으로.
그리고 구석에는 술을 먹고 널브러진 용병들이 나뒹굴었고, 술집 여성과 용병들이 서로를 향해 고함을 치고 있었다.
그런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거리 한쪽에 내가 찾던 간판이 보였다.
[은빛 용사 여관]
마르틴이 머무는 여관이었다.
"잠깐 들러 볼 수 있을까요? 안쪽 분위기도 보고 싶은데요."
내 말에 두 사람은 의아해했지만, 둘 다 반대하지는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을 이끌고 은빛 용사 여관 안으로 들어섰다.
낮이라서 그런지, 여관 1층은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전날부터 술을 먹고 널브러진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사람들.
그리고 크지 않게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용병들.
그 용병들 사이에 내가 찾던 남자가 보였다.
아니, 용병들도 아는 얼굴들이었다.
미친 여자 용병과, 아드리아와 날 죽인 남자 용병.
두 사람이 마르틴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