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제1편 여행의 인연 (2)
마르틴 데 이에로.
마물을 날려 버렸던 남자는 이에로 후작의 서자이자 아드리아의 배다른 오빠였다.
그가 합류를 원하자, 기사단장은 형식적이나마 시몬 형에게 허락을 구했다.
일행의 인솔자는 알론소 기사단장이었지만,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위치는 충분히 대접을 받을 만했다.
제대로 교육을 받아 온 시몬 형은 기사단장이 결정을 내리도록 했다.
당연하게도 기사단장은 나에게는 묻지 않았다.
이에로 후작가의 서자가 말한 것처럼 귀족이지만 서자의 위치는 딱 그 정도일 뿐이었다.
뭐, 아직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이기도 했고.
어쨌거나 알론소 기사단장은 그가 같이 가는 것을 허락했다.
남자는 활기차고 사교적이었다.
그는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모두와 친해졌다.
그는 병사들과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고, 기사들과도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자이긴 하지만 귀족이 편하게 대해 주자 병사들도 기뻐했고, 혼자 마물을 해치운 것을 본 기사들도 그에게 호감을 느꼈다.
시몬 형은 관심을 안 가지려고 했고, 기사단장과 총집사는 사무적으로 대했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금방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에게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저번 삶에서 경험한 것이 있으니 아무리 그가 친절하게 대해 주어도 좋아질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내가 서자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날아가는 마물을 검을 던져서 밀어내다니 웬만한 기사도 쉽게 못 하는 건데. 아까도 말했지만, 정말 대단했습니다."
기사들과 한바탕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나에게 다가와 서슴없이 말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반말하셔도 돼요. 근데 저보다 더 대단하시던데요. 검으로 그 마물을 그렇게 날려 버릴 수 있을 줄 몰랐어요."
나는 굳어지는 얼굴을 펴고 그의 칭찬에 감사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는데, 놓칠 수 없었다.
알아내야 할 것이 많았다. 집안에서 쫓겨났던 서자가 어떻게 사람을 모으고 권력을 차지했는지.
뒤를 봐주는 사람은 누구고, 저번 삶에서 우리를 죽였던 자들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의 실력과 약점을 알아내야 했다.
그를 죽이려면.
"말 놓아도 되려나……."
"네. 나이 차이도 있고, 둘 다 같은 처지인데요."
"그렇지. 같은 처지지. 그래, 편하게 지내자고."
역시, 친화력 만땅의 남자였다.
"그보다 내 실력은 전부 상속 능력 덕분이야. 실제 검술은 기사들에게 한참 못 미치는걸. 상속 능력 덕분에 이렇게 혼자서도 돌아다닐 수 있고……."
말하는 동안 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무래도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아, 맞다. 나야 상속 능력 때문이지만, 알렉스가 보여 준 것은 검술이잖아! 기사들도 쉽게 하지 못하는 고난도 검술!"
그의 말에 나는 힐끗 주위를 둘러보았다.
식사 뒷정리와 개인 장비 정리로 이쪽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싸우느라 못 알아차렸는데, 정작 마물을 날려 버린 사람은 내 실력을 제대로 본 모양이었다.
"딱 봐도 10살이나 그 아래로 보이는데, 그게 가능한 거야?"
"관련 능력을 얻어서 각성 때부터 훈련을 받았습니다."
"아……. 상속 능력이 그쪽이라……. 그래도 그 실력이 나올 수 있나?"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르틴이 조금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훈련이라. 그레시아 공작가는 서자라도 제대로 키워 주는 곳인가?"
나는 주위를 신경 쓰며 그의 말에 대답했다.
"뭔가 쓸모가 있어서겠죠. 이건 비밀인데, 제가 왜 같이 왔겠어요?"
"아, 그렇군. 형제끼리의 여행이 아니었군."
그에게서 정보를 얻어 내려면 동질감을 심어 놓아야 했다.
전부 다 사실이니 거리낄 것도 없었고, 같이 온 이유도 공. 식. 적. 으로는 시몬 형만 모르면 그만이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음, 문제가 생기려나? 에이, 아무도 안 들었으니 시치미 떼면 그만이었다.
"역시 귀족가는 전부 다를 바가 없군……."
"그러고 보니, 집을 나오셨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되신 거예요?"
나는 최대한 순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채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자자, 슬슬 꺼내는 거다.
밤벌레들이 울고, 모닥불이 은은하게 불을 밝히는 중이었다.
좀 빠른 것 같았지만, 속내를 털어놓기에는 딱 좋은 분위기였다.
나는 순진하고 안쓰러운 표정을 최대한 유지한 채로 계속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그는 결심했는지 주위를 둘러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듣는 사람은 없겠지?"
없어. 내가 다 확인했어.
"알렉스도 비밀로 해 줄래?"
비밀을 지킬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뭐, 전에 말했다시피 집을 나온 게 아니라 쫓겨난 거야."
말을 하는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나름 도움이 되는 능력을 얻게 되어서 가문에 보탬이 되려고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그만 다른 사람들에게 밉보인 거지. 뭐, 가문을 노린다나? 서자에게 가문을 물려주는 귀족가가 어디 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지."
그의 말대로였다. 각성했더라도 서자가 가문을 이었던 귀족가는 왕국 역사에서 손에 꼽힐 정도였다.
하지만, 나도 어이없는 오해를 받아 죽은 적이 있었기에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았다.
"뭐, 죽이지 않았으니 고마워해야 할까. 하지만 내 누이에게 한 짓은……."
말하는 도중에 그의 눈에는 섬뜩한 빛이 지나갔다.
빛은 바로 사라졌지만, 주위의 기운은 계속 분노를 담고 있었다.
"지금은 이 꼴이지만 언젠가는 갚아 줄 수 있겠지."
마지막으로 작게 중얼거린 그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가 이런 말을 해 주는 건 알렉스, 너도 조심했으면 해서야. 나이답지 않게 똑똑한 것 같으니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었겠지."
그의 말대로 무척이나 잘 알아들었다. 아니, 이미 죽음으로 깊게 새겨져 있었다.
아쉽게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르틴은 악당처럼 보이지 않았다.
물론, 나를 어리게 보았기 때문이겠지만, 남에게 상처를 입은 뒤에도 다른 사람의 걱정을 해 주는 무척이나 좋은 사람이었다.
단지.
그가 원하고 미래에 행했던 일이 나에게 피해를 주었을 뿐이었다.
아드리아, 우고, 비앙카의 죽음과 나의 죽음이라는 큰 피해를.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죽음을 사이에 둔 적이 된 이상, 그의 정의는 나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내가 알아듣는 것처럼 보이자, 그는 아쉬운 듯 입을 열었다.
"아쉽군. 알렉스, 네가 조금만 더 컸어도 같이 일해 볼 수 있었을 텐데."
어라, 이건 무슨 떡밥?
살짝 물어볼까?
"용병 같은 거 말인가요?"
"하하, 그래 보였어?"
"기사 같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요."
"흠, 용병이라면 용병일까. 정식 등록한 것은 아니지만, 좋은 용병 동료들과 같이 일하고 있으니까 그게 맞을지도."
"와, 용병들하고 같이 일하세요? 무슨 일을 하는데요."
"하하, 영업 비밀이라 좀 더 커야 알려 줄 수 있어."
이런, 마지막에 와서 발을 빼다니.
그래도 저 용병들이 내가 아는 용병들이라면 의외로 쉽게 놈들을 찾게 될지도 몰랐다.
음, 가는 길에 틈을 보이면 죽일 생각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너무 빨리 마르틴을 죽이면 놈들을 놓칠지도 몰랐다.
뭐, 솔직히 여행 중에 몰래 죽이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여행 중 틈나는 대로 이어진 대련으로 그 생각은 더욱 확실해졌다.
퍽!
우렁찬 소리와 함께 머리 아래로 나를 올려다보는 병사들이 보였다.
그들 입장으로는 내가 지금 한창 날아가고 있었겠지.
쩝, 검술 실력이 뛰어나 봤자였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마스터들이 검을 들고 쫓아오겠지만, 힘에서, 체력에서 이렇게 차이가 난다면 기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또래, 아니 기사급에 가까운 내 검술로도 그에게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사실 검술 실력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검을 부딪치지 않고 안쪽으로 파고들어야 하는데 그럴 정도로 그와 차이가 나는 실력은 아니었다.
덕분에 매번 대련 때마다 검에 맞아 이렇게 하늘을 날게 되었다.
뭐, 검에 마나를 싣는다면 이 정도까지 밀릴 이유는 없겠지만, 나중에 제대로 상대할 때를 위해 숨겨 놓아야 했다.
그리고 열심히 진 덕분에 그의 검술과 힘을 대충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쿵.
"아야!"
한참을 날아 바닥에 나뒹구니, 사방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하하, 이번에는 그래도 오래 버티셨습니다."
"날아가기는 더 멀리 날아갔지만요!"
기사들이 웃으며 일어나는 나를 놀려 댔다.
병사들은 차마 나를 놀리는 데 참여하지 못했지만, 모두 고개를 돌리고 피식피식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대련할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친화력이 만땅인 마르틴과는 금방 친해진 기사와 병사들이었지만, 처음부터 나를 무척이나 껄끄러워했다.
나는 공작의 자식인 데다 서자였다. 그것도 나름 쓸모가 있는 서자.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잡기 어려울 만했다.
하지만, 그들 앞에서 이렇게 대련을 계속하고 깨져 나가자, 나에 대한 거리감이 많이 없어지게 되었다.
아직 어린 나이에 나름 귀여운 얼굴 그리고 애교 스킬까지.
거기다 지금처럼 놀리는 말을 해도 그냥 쿨하게 넘어가는 모습에 그들의 경계심이 허물어진 것이다.
다행히 기사단장도 뭐라 말하지 않았고, 총집사도 내 행동을 따로 지적하지 않았다.
시몬 형만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서자인 내 위치를 생각했는지 인상을 쓸 뿐 뭐라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동과 대련을 이어 오는 사이, 어느덧 후작가 영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다른 영지 4곳을 거친 먼 여행.
다른 영지를 지나는 도중에 영주 성에 들러 달라는 사절이 오기도 했지만, 공작의 행차가 아니라는 핑계를 대고 곧장 후작가로 향할 수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여러 번 마물을 만나게 되었다.
전부 시체처럼 보이는 괴물들이었다. 하지만, 처음 만났던 마물들처럼 강한 괴물들은 아니었다.
기사 혼자, 어떨 때는 병사들만으로도 처리가 가능했던 마물들이었다.
"언데드 울프가 매번 등장한다면 영지 간 상행이 가능할 수가 없지. 기사급 용병들을 매번 대동하고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의아해하며 묻자, 마르틴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마르틴과는 여행하는 동안 무척 친해졌다.
매일 대련하고 이야기도 자주 나누게 되니 친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헤어질 때까지 더 이상의 정보를 흘리지 않았다.
물론 나도 쓸데없는 이야기는 전혀 꺼내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는 후작가가 있는 도시의 외성 앞에서 일행과 헤어졌다.
"일 년쯤 뒤에 보자고. 멋진 모습으로 나타날 테니까."
일일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 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나도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일 년까지 갈 필요 없죠. 곧 만날 겁니다."
그는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그가 들리지 않게 작게 속삭였다.
"자, 모두 기다리고 있으실 겁니다. 빨리 들어가죠."
총집사의 재촉에 일행은 외성문을 지나 도시를 가로질러 영주 성으로 향했다.
공작가 저택과 달리, 후작가는 성에 살고 있었다.
내성문 앞에서 병사들과 헤어진 우리는 기사들과 함께 내원을 가로질러 성 입구에 도착했다.
주위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을 배경으로, 멋지게 차려입은 귀족들이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부 모르는 얼굴들이었지만, 한 명은 아는 사람이었다.
전에 보았을 때보다 조금은 어려 보이는 소녀.
아드리아가 새침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