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제24편 후작가로 갑니다 (2)
"인원은 여기까지이고, 총 인솔자는 우고 선임 기사다. 내일 출발이니 모두 준비를 마치도록."
"알겠습니다!"
기사단장의 말에 기사단원들은 힘차게 대답했다.
기사단장이 먼저 자리를 뜨자, 정렬해 있던 기사단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뜻밖이네요. 우고 선배님이 가시게 되다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던 미겔 기사가 우고 기사에게 말했다.
"글쎄, 뭔가 이유가 있으시겠지."
우고 기사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경호 업무라니. 못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특기는 경호 쪽이 아니었다.
"못 들으셨어요? 선배님이 가신다면 평범한 경호는 아닐 것 같은데……."
우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가 있다면 알려 주셨을 것이다. 지금은 맡겨진 임무에 충실하면 그만이었다.
"그보다 미겔, 너는 괜찮나? 다른 기사들이 조금 거리를 두는 것 같던데……."
"뭐, 어쩔 수 없죠. 진급을 생각한다면 미래의 주군도 생각해 두어야 할 테니까요. 뭐, 전과 다르지 않게 대해 주시는 선배님도 있으시니까요."
"……꽤 오래되었으니 이제 교체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한번 말씀드려 보지, 그래."
"제가 그만두면 선배님이 하실지도 몰라요."
"그런 지시가 내려온다면 따르면 그뿐."
그의 대답에 미겔은 멋쩍은 얼굴이 되었다.
"하하, 아니에요. 말을 꺼낸 제가 잘못이죠. 뭐, 저도 아주 벅차서 바꾸어야 할 것 같긴 한데 교육생이 저를 놓지를 않네요."
"서자일 텐데……. 귀족이라고 말을 안 듣나?"
"이런, 말을 안 듣는 게 아니고요."
미겔이 슬쩍 주변을 살폈다. 두 사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르치기가 벅찹니다. 마나를 쓰지 않으면 저하고 맞수가 될 정도입니다."
"그게 무슨……. 지금 겨우 9살일 텐데."
"네. 겨우 9살이죠."
"설마, 성장 강화형 능력인가?"
"네. 육체 강화 쪽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9살이 그 정도라는 게 말도 안 되죠."
"그렇다고 해도, 이해 안 될 정도로 강한데……."
미겔은 젊은 기사 중에서도 상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기사와 동급이라니.
"육체 쪽 성장은 상속 능력 때문이라고 쳐도, 검술 실력은 저도 이해가 안 갑니다. 검술 이해력도 뛰어난 편이지만, 숙련도도 24시간 동안 검만 휘두른 것처럼 보일 정도니……."
"어렸을 때부터 천재라고 들었는데, 검술도 마찬가지였나?"
"모르겠습니다. 귀족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천재라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건지……."
미겔의 말에 우고가 고개를 저었다.
"나름 잘하고 있다고 듣긴 했는데 그 정도라니. 그런데, 나는 그동안 그런 이야기를 왜 못 들었지?"
"선배님만 못 들은 게 아닙니다. 제가 입을 닫고 있었던 거죠. 다른 사람들도 조용했고요."
"왜?"
"괜한 분란이 일어날까 봐 그런 거다."
우고의 질문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앗!"
미겔이 찔끔한 표정으로 정자세를 취했고, 우고도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대답한 사람은 기사단장이었다. 그는 모르는 사이에 두 사람 옆으로 다가온 것이다.
"제가 괜한 것을 물은 것입니까?"
"선배님이 물어보신 게 아니라 제가 알려 드린 겁니다."
두 사람 말에 기사단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성격도 영 다르면서 결과적으로 하는 짓은 별다를 게 없군."
착하고 충직하고. 둘 다 좋은 기사였다. 하지만, 앞을 생각하면 조금쯤은 때가 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우고라면 문제없겠지. 대단한 비밀도 아니니 어디 가서 일부러 퍼트리지만 않으면 돼."
"알겠습니다."
서자가 너무 실력이 뛰어나면 가문에 풍파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가게 된 후작가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그레시아 공작 가문이야 공작님이 계시니 괜한 걱정일지도…….
"아니, 우고가 아는 편이 더 좋겠지. 이번에 우고 네가 참가하게 된 것은 알렉스…… 님의 추천 때문이다."
"네? 알렉스 님이요?"
기사단장의 말에 미겔이 놀라 외쳤지만, 우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뿐이었다.
"저를 모르실 텐데요. 지나가면서 몇 번 보았지만, 따로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었습니다."
우고가 미겔을 쳐다보았다.
"저도 따로 이야기를 드린 적이 없었는데요. 아, 기사단을 궁금해하셔서 설명해 드린 적은 있었습니다."
그의 대답에 기사단장도 미겔을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그때도 선배님을 따로 칭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름만 나열한 정도였는데요."
"뭐, 이유야 나중에 들으면 되니까."
"그보다 둘을 찾은 것은 그 막내…… 공자 때문이다."
기사단장은 먼저 미겔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가 후작가로 가는 일행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미겔은 돌아올 때까지 원대 복귀를 하도록."
"아, 넵!"
이어서 그는 우고를 바라보았다.
"우고는 그가 시몬 공자님의 비밀 경호를 맡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도록. 시몬 공자님에게는 비밀로 해야 하네."
시몬 공자가 동생, 그것도 서자의 호위를 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좋아할 리 없었다.
공작의 지시였지만, 기사단장도 우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기사단장이 미겔을 슬쩍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알렉스…… 공자의 실력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네!"
두 사람을 보낸 뒤, 기사단장은 저택을 바라보았다.
반평생을 섬겨 왔던 공작가였다.
"왕국 분위기도 영 안 좋은데, 그래도 이번 여행은 조용히 마쳤으면 좋겠는데……."
비밀 경호라는 이유를 붙여 따라가기는 했지만, 실력을 드러낼 일이 없는 편이 좋았다.
뛰어난 서자가 등장한다면, 시몬 공자님의 자존심은 둘째 치고 점점 소란스러워지는 왕국만큼이나 공작가도 시끄러워질지 몰랐다.
* * *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공작에게 말했던 사춘기적인 이유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모르고 있었지만, 그만큼 어머니는 내 안전을 두려워하고 계셨다.
어렸을 때 벌어진 독극물 사건과 암살 사건이 당신의 가슴속에 깊이 박혀 결국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알고 보니 내가 기사에게 훈련을 받는 것도 내 안전을 위해 받아들인 것이었다.
당신은 계속 반대하셨지만, 나도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 동안의 실랑이 끝에 미겔까지 끌어들여 내 실력을 보여 드린 뒤에야 겨우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다 버리고 도망쳐야 해."
하지만, 어머니는 상행하는 외가 주소가 적힌 쪽지와 돈을 쥐여 주며 한 번 더 다짐을 시켰다.
"네."
저번의 삶이었으면, 무조건 따랐을 말이었다. 아니, 아예 집을 나서지도 않았을 게 분명했다.
아쉽게도 이번 삶은 어머니의 말씀을 따르긴 어려워 보였다.
'잠깐, 저번 삶에서 시몬 형이 후작가를 다녀올 때 별일이 없었지?'
내가 일을 벌이지 않는 한, 특별한 일 없이 무사히 다녀올 수 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일을 벌이러 가는 길이었다. 많이 소란스럽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이번 여행은 요새 앞 나들이 때와 차원이 달랐다.
마차도 두 대가 넘었고, 수행하는 병력은 그때의 몇 배나 되었다.
기사단장과 우고 기사 그리고 10명의 평기사. 병사들도 수십 명이었다.
마차를 모는 고용인도 따로 있었고, 하녀들과 식사와 허드렛일을 해 줄 고용인들도 함께였다.
공작부인도 같이 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 모양이지만, 저번 삶처럼 시몬 형의 반대로 같이 가지 않게 된 모양이었다.
어머니 품을 벗어나려는 사춘기 소년의 고집 덕분이었다.
대신 총집사가 가게 되었다. 공작도, 공작부인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노인이었다.
공작가 방계의 귀족이라고 들었는데, 모두 정확하게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튼 그가 공작부인을 대신하기에 충분한 모양이었다.
일행의 출발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말을 타고 선두에 섰고, 병사들이 창을 세우고 그 뒤를 따랐다.
마차들이 병사들을 따라 이동했고, 나머지 병사들과 고용인들이 일행의 마지막 순서가 되었다.
저택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나와 일행을 배웅했다.
공작도, 공작부인도, 어머니도.
저택을 나선 뒤에도 메테나 시를 빠져나올 때까지 구경을 나온 영지민들의 인사를 계속 받게 되었다.
길 양옆을 메운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장관이었지만, 아직 전생의 감각이 남아 있어서인지 조금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가 받는 인사가 아니라 공작가, 공작이 받는 인사라서 그런 것일까?
내가 받는 인사라면 조금 다른 기분이 들지도 몰랐다.
앞자리에 앉아 있는 시몬 형은 무척이나 멋진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자세로 앉아 흐트러짐 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가끔 손을 흔들어 주는 그의 모습은 귀족의 표상 같았다.
가끔 표정이 꿈틀거리지 않았다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어린 나이에 충분히 칭찬할 만했다.
조금은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일행은 도시를 벗어났다.
외성 문을 지난 뒤, 시몬 형은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수고하셨습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총집사가 시몬 형에게 잔을 내밀었다.
얼음물이 담겨 있는 유리잔이었다.
저걸 어디서 꺼냈는지, 어떻게 보관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역시 총집사는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시몬 형은 얼음물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그사이 총집사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알렉스 님은 생각보다 무척 여유로우시군요. 마차 여행은 처음 아니신가요? 마치 여러 번 타 보신 것 같습니다."
전에도 한 번……. 아, 그 일은 없던 일이 되었지.
어쨌든 저번에 한 번 타 봤으니 새로울 게 없었다. 화려한 행렬이야 전생에 이것보다 대단한 걸 신물 나게 보았고.
"속으로 무척이나 놀라는 중이에요. 긴장하고 있는 걸 표시 안 내려고 하고 있어서일 거예요."
대외적으로 나는 형을 따라가는 별생각 없는 꼬맹이였다. 마음 넓은 시몬 형이 허락한 동생.
말투도, 행동도 그것에 맞게 해야 했다.
"아버지가 왜 허락하셨는지 모르겠지만, 함부로 행동하면 가만두지 않을 테니 최대한 조심해라."
"네. 알겠어요."
내 대답에 시몬이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몬 형의 말도 그리 듣기 좋은 것은 아니었으니 어차피 피장파장이었다.
"그런데 이에로 후작가와 꼭 약혼해야 하나?"
시몬 형은 이번 여행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귀족이라면 가문을 위해 상대를 정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라? 저번 삶에서 보았던 시몬은 이렇지 않았는데?
"아드리아 영애 소문이 그리 좋지 않은 듯하고……."
아하, 아직 아드리아를 보기 전이었군. 아름답다는 소문 말고 다른 소문도 돌고 있었나?
"검술을 배운다는 소문 말입니까? 공작님도 시몬 도련님이 반대하면 강제로 진행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지가 내 말을 듣고 안 하실 거라고? 그럴 리가."
역시, 우리 공작님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초지일관한 그의 모습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그래도 뭐, 이번에는 시몬 형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반대할 리가 없을 테니.
시몬 형의 투덜거림을 흘려들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 언덕 위에 버려진 요새가 보였다.
벌써 3년이 지났나? 아니, 1년이 남았나?
어쨌거나 저번에 보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바라보았다.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던 우고 기사가 요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추천이 먹혀서 다행이야. 중간에 좀 친해진 뒤에 요새에 관해 물어봐야지.'
후작 영지까지 반달은 족히 걸리는 여행이었다. 왕복 길을 생각하면 시간은 충분했다.
전생이었으면 한나절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이쪽 세상은 보통 먼 게 아니었다.
마법 통신이라는, 거의 실시간 통신에 가까운 연락망이 있는데, 여행은 이 꼴이라니.
그게 다 대전쟁 이후 세상에 흩어진 마물들 때문이었다.
영지를 채 벗어나기 전 나는 처음으로 마물을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