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제23편 후작가로 갑니다 (1)
공작부인이 타고 있는 마차가 떠나고, 며칠 뒤에 엘레나 누나도 저택을 나섰다.
나도 미겔에게서 훈련을 받았다.
전과 다르지 않은 삶이었다.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변하지 않았고, 두 형제가 애써 외면하는 것도 똑같았다.
다만, 미겔은 나를 보며 다르게 말했다.
"저 말고 다른 기사에게 따로 배우시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실력이 갑자기 오를 리가 없는데……."
"끙, 그냥 천재라고 하기에는 검에 대한 이해도가 확연히 달라졌고."
나는 다시 어려지는 바람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아 답답했지만, 미겔은 전혀 다르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몸은 6살 때로 돌아갔지만, 10살 때까지 받은 훈련과 실전 경험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전과 똑같다면 되돌아온 보람이 없었다.
그 덕분일까. 전보다 훨씬 성장이 빨랐다.
검술을 이해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육체만 강화하면 되니 과거의 성장을 순식간에 앞지를 수 있었다.
전과 달리 기사단장도 얼굴을 보이고, 공작도 내게 더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머리만 좋은 줄 알았는데, 검술에도 천재가 아닐까 하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훈련 말고도 조사하고 준비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저번 삶에는 검을 배운답시고 주변 정세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10살도 안 된 꼬맹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그 때문에 죽게 되었으니 남들 눈치를 볼 때가 아니었다.
우선 서재에 들러 왕국 역사에 관한 책을 모두 살펴보았다.
전에도 대부분 읽어 봤던 책들이었다.
다시 읽어 봐도 별 내용이 없었다. 왕국을 만든 용사에 대한 찬양과 그 피를 이은 왕가에 대한 칭송이 나열되어 있을 뿐이었다.
더구나 내가 알고 싶은 현재 왕국의 상황에 대한 것은 전혀 나와 있지 않았다.
"여긴 신문이나 방송 같은 게 없으니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왕국의 현 상황 말입니까?"
미겔의 답은 예상보다 훨씬 처참했다.
"왕이 계시고, 두 아드님과 따님 한 분. 공작님과 다른 귀족분들이 있으시죠."
아니,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저는 기사입니다. 그 정도만 알면 충분합니다. 그보다 지금은 훈련 시간입니다. 훈련에 집중해 주시죠."
미겔의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글쎄요. 기본적인 것은 말씀드릴 수 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으실 겁니다."
몇 가지 더 듣긴 했지만, 총집사도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서기관에게서는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건……. 제가 말했다고 하시면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입이 무거운 것 잘 아시잖아요."
내 말에 서기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기름칠을 한 보람이 있었다.
"저희 왕국의 귀족은 크게 보면 둘, 좀 더 자세히 나눈다면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을 이었다.
"국왕 폐하께 힘을 실어 주어야 한다는 국왕파와, 영지와 귀족들의 권리를 지켜야 한다는 귀족파, 크게 보면 이렇게 나뉘고요. 얼마 전부터 국왕파는 제1 왕자파와 제2 왕자파로 갈리게 되었습니다."
"국왕 폐하의 연세 때문인가요?"
"그렇죠."
서기관은 내 대답을 듣고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도 계시잖아요."
"어차피 고위 귀족과 결혼하거나 다른 나라로 가실 분이니까요."
이럴 때면 중세에 가까운 세상이라는 게 다시 한번 느껴졌다.
"그레시아 공작가는 제1 왕자 쪽이군요."
"오, 맞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죽기 전에 들어서 알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저희도 왕실 계보이니 국왕파일 거고, 정통성은 제1 왕자께서 가지고 계실 테니 제1 왕자 쪽을 지지하겠죠."
골수까지 정통 귀족인 공작이 다른 사람을 지지할 리가 없었다.
"잘 아시네요. 그레시아 공작가는 제1 왕자파입니다. 그래도 아직 폐하도 정정하시고, 왕자님들도 이제 막 성인이 되셔서 크게 갈리는 상황은 아닙니다."
그게 4년 뒤면 그렇지 않다는 거겠지. 제1 왕자파인 그레시아 공작가와 제2 왕자파인 이에로 후작가가 혼인으로 연합을 맺어야 할 정도로.
그런데, 그때쯤이면 귀족파도 양쪽 왕자에게 줄을 대고 있어야 하지 않나?
"혹시 귀족파의 수장이 따로 있나요?"
"네. 훌리안 데 카를로스 공국왕. 현 국왕 폐하의 동생분이시죠."
하, 개판이네.
"대단하신 분이십니다. 공국도 그분이 직접 세운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꽤나 인기 있는 귀족인 모양이었다. 왕자들을 언급할 때도 시큰둥하던 서기관이었는데, 지금은 존경이 가득 담겨 있었다.
어쨌거나 왕의 자리를 노리는 왕자 두 명과 귀족들을 모아 세를 이룬 삼촌.
결국 왕의 자리를 노리는 사람은 세 명이었다.
그럼, 아드리아를 죽인 자들은 어디 소속일까?
"라팔마 백작은 어느 쪽이죠?"
라팔마 백작. 나를 죽인 자가 섬겼다는 귀족.
"라팔마 백작님은 조금 애매한데……. 옆 영지인 이에로 후작과 같이 제2 왕자파라는 이야기도 있고. 그래도 귀족파에 가까울 겁니다."
나는 서기관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런 사람이었나?
"정말, 잘 아시네요."
"하하, 천재를 가르치려면 아는 거라도 많아야죠."
6살을 한 번 더 살게 되니, 공부에서도 천재라는 별명을 계속 지니게 되었다.
아니 그보다, 서기관치고는 왕국 정세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가르치는 일 외에는 영지의 사무를 보는 평범한 서기관이었다.
그런 그가 왕국 정세에 대해 이토록 세세히 알고 있다니. 평범한 서기관도 마음속에 야망 하나는 가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젊은 서기관을 눈여겨보았고, 조금 전 대화를 가슴 깊이 담아 두었다.
서기관에게 정세를 들은 뒤에도 나는 틈틈이 사람들에게 물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왕국의 정세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영지에 대해.
그렇게 질문을 하고 돌아다니던 어느 날.
마누엘과 복도에서 마주쳤다.
나와 안 마주치려고 일부러 돌아가던 꼬맹이였는데, 오늘은 딱 중간에서 마주친 것이다.
12살짜리 마누엘을 보다가 다시 8살짜리 마누엘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한껏 비웃는 표정을 짓는 것이 무척이나 웃기고 귀여웠다.
"돌아다니면서 이상한 거 묻고 다닌다며? 조심해야 할 거야. 이야기 듣는 어머니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단 말이야. 요즘 예쁨 받는다고 너무 나대지 마."
아!
마누엘은 한껏 비웃는 어조로 말했지만, 나는 그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잘못했다. 질문한답시고 너무 설쳐 댄 것이다.
사람들에게 왕국의 정세를 물으며 돌아다녔으니 오해를 받기 딱 좋았다.
특히 공작이나 마누엘의 엄마인 공작부인이 들었다면, 시몬의 자리를 노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그런 오해를 받을 때가 아니었다. 비슷한 오해로 몇 번이나 죽었는데, 그 고생을 다시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고마워, 형! 조심할게. 말 안 나오게 조심할 테니 걱정하지 마. 정말 말해 줘서 고마워!"
"어, 어, 어, 알, 알면 됐어."
마누엘은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을 짓고는 후다닥 도망갔다.
어느 정도 정보는 모았으니, 이제 자중할 때였다.
나는 계속 훈련을 받으며 이번에는 다른 조사를 시작했다.
마요르카 요새와 요새 지하에서 보았던 무덤의 문양에 대한 조사였다.
서재를 온통 뒤집어 놓으며 문양을 찾았고, 서기관들이나 사람들에게 문양과 요새에 관해 묻기 시작하니 어느새 내가 시몬의 자리를 노린다는 소문은 가라앉았다.
사방으로 뻗치는 천재의 관심 정도로 여기게 된 것이다. 덕분에 괴팍한 천재라는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마요르카 요새에 대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설화를 들을 수 있었지만, 아쉽게도 문양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용사들이 사용했던 문양도 확인해 보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던 책에는 나와 있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과거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귀를 계속 열어 놓았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나는 드디어 미겔과 팽팽한 맞수가 될 수 있었다.
"이익! 이건 정말 말이 안 돼!"
미겔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미겔의 팔은 가득 부풀어 있었고, 얼굴은 벌겋게 변해 있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입을 열었다가는 땅과 이어 놓은 마나가 흩어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미겔의 검과 내 검이 딱 붙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아니, 몸무게 차이가 얼마인데 왜 안 밀리는 겁니까!"
그의 넋두리도 이해가 갔다.
키 차이도 확연하고, 몸무게는 무려 세 배나 차이가 나는데 내가 그의 검을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거야 새로 익힌 마나 사용법 덕분이었지만, 내 비밀을 말해 주지 않았으니 그가 분통을 터트리는 게 당연했다.
"그만하죠."
그가 뒤로 물러섰다.
"도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기술입니다."
"하아, 기술이라니……. 그럼 제가 가르치는 것은 여기까지겠군요. 실력도 비등하고 제가 모르는 기술까지 사용하는데 제가 교관으로 있기는 무리죠."
이런, 공격이 제대로 들어왔다.
그래서야 곤란했다. 연습 상대가 달아나면 큰일이었다.
저런 호구를 또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마나를 쓰지 않은 대결일 뿐이잖습니까. 마나를 얻는 법도 배워야 하고, 마나 심법도 배워야 합니다."
마나는 이미 얻었고, 마나를 사용한 대결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미겔이 모르니 문제없었다.
"그렇긴 하죠. 그래도 공자라면 금방 배워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마나 대결도 저를 이기실 겁니다."
이번에도 잘 먹혔다. 역시 내 훌륭한 호구 기사였다.
"어쨌거나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입니다. 기사단 소집이 있어서 가 봐야 합니다."
"무슨 일인데요?"
"며칠 뒤에 기사단장님하고 시몬 공자님이 이에로 후작가로 가신답니다. 그 일로 모이라고 하셨습니다. 같이 갈 사람을 뽑고 업무를 재조정하려는 거겠죠."
이때였나.
드디어 기다리던 이벤트가 시작되었다.
나는 미겔과 같이 저택으로 돌아온 뒤, 공작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들어오시랍니다."
더 늘어난 내 실력 때문일까. 이번에는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들어가자, 공작이 펜을 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지?"
대우는 조금 달라진 것 같았지만, 찬바람이 부는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기대하지 않았으니, 실망도 없었다.
"이번에 이에로 후작가로 가는 일행에 참여하게 해 주셨으면 합니다. 암중으로 시몬 형의 경호를 맡겠습니다."
뜻밖의 말이었나 보다. 공작의 표정이 슬쩍 바뀌었다.
"흠. 쓸 만한 생각이긴 한데……."
예상대로였다. 공작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열심히 실력을 닦고, 티를 낸 보람이 있었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지?"
"책으로만 세상을 봤습니다. 이제는 밖으로 나가 세상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으, 닭살이 돋았다.
정말 저택에 갇혀 지내는 꿈 많은 소년이 외칠 만한, 소름 돋는 대사였다.
"……그런가. 네가 9살이었지."
여태껏 무표정했던 공작이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길, 부끄러움이 배가 되었다.
"이유야 어쨌건 괜찮은 생각이군. 허락하마."
예스.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역시 공작은 냉철하고 합리적인…… 쓰레기 같은 귀족이었다.
"그런데, 아만다에게는 말해 놓았겠지?"
"아……."
"네가 부탁한 거니 네 엄마한테 말하는 것도 네가 하도록."
망했다. 눈물짓는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를 보는 공작의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