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제22편 결혼은 조심해야 합니다 (2)
우리를 포위망에 가둔 채 여자 용병은 말을 이어 갔다.
"서자인 마르틴 데 이에로 님께서 이에로 후작가의 새로운 가주가 되셨다니까."
"거짓말! 마르틴 오빠가 그럴 리가."
"거짓말이 아냐. 아가씨의 배다른 오빠 맞아요."
그녀는 손수건을 뒤로 던지고, 쪽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조금 전에 소식이 왔어. 안타깝게도 저택에 불이 나서 후작 일가가 전부 돌아가셨다네. 저택 밖에서 지내던 마르틴 경이 다. 행. 히 살아남으셔서 새로운 영주 자리에 오르셨어요!"
아드리아는 계속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로서는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냐. 아냐. 아냐."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아무것도 모르고 죽어야 하는 아가씨가 안타까워서 알려 주는 것뿐이니까."
안타까운 듯이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즐거운 기색이 가득했다.
저런 걸 사이코패스라고 부르는 걸까?
나도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지만, 그녀의 말대로라면 남은 의문들이 모두 풀렸다.
후작 일가의 생존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서자가 가문을 승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맏딸인 아드리아가 살아 있으면 후작가는 아드리아가 이을 게 분명했다.
어떻게 저택에 불을 지르고 빠져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건지, 일이 벌어지자마자 바로 서자를 후계자로 올릴 수 있었는지,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아 있었지만, 이 정도면 알고 싶었던 내용은 거의 들은 것 같았다.
"자, 그럼."
여자 용병이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꼬맹이는 누구? 그 공자님의 하인이야? 이런, 못난 도련님 수발들다가 낙오되었나 보네."
어라? 나를 모르는 건가?
하긴 모르는 게 당연했다. 영지민들도 내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데 이들이 알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혹시 되려나?
나는 검을 잡은 손을 조금 흔들었다. 마치 떨리는 것처럼.
그다음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오랜만의 목소리 연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도 애처로움을 가득 담아 여자 용병에게 빌었다.
"제발, 제발 부탁해요."
충격을 받았는지 아드리아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지만, 나는 연기에 더욱 몰입했다.
"에고, 불쌍해라."
포위한 용병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여자 용병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설마, 오랜만의 연기가 먹히는 건가?
"너한테는 정말 미안하네. 그래도 살려 두긴 무리예요.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한 네 주인을 원망하렴."
하,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
아드리아 때와 똑같았다.
저 사이코패스는 위로하는 말로 남을 절망에 빠뜨리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괜히 힘만 뺐네."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바로 하자, 여자 용병이 눈을 크게 떴다.
"큭, 큭, 바보."
옆에서 아드리아가 비웃는 소리도 들려왔다.
내 바보짓 덕분에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저 여자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직접 확인하면 돼요. 우선 돌아갈 생각부터 하자고요."
"응, 네 말이 맞아."
내 말에 아드리아는 검을 굳게 잡았다.
"호. 호. 호. 재미있는 꼬마네."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자 용병의 웃음소리였다.
"영애가 죽을 때 어떤 소리를 낼지 기대했는데, 더 듣고 싶은 꼬마가 생겼지 뭐야. 어떻게 죽여야 예쁜 소리를 들려주려나."
관심을 너무 끌었나? 그녀는 나를 보면서 입술을 핥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질렸는지 용병들이 움찔 뒤로 물러섰다.
틈이 났으려나?
나는 빠르게 주변을 살피며 아드리아에게 물었다.
"설마 나한테 관심을 보였던 게 그 서자 때문인가요?"
"아! 그런 것도 있었지만……. 아니, 지금 그런 질문을 할 때야?"
아드리아는 내 말을 잘 받아 주었다.
말하는 동안, 나는 눈짓으로 계속 신호를 보냈다. 그녀도 대답하며 알았다는 신호를 보냈고.
셋.
둘.
하나.
"지금!"
내 말에 아드리아가 뒤로 몸을 날렸다.
슈악!
번개 같은 속도.
가속 능력이 빛을 발했다.
"멈춰!"
나는 놀라서 소리치는 여자 용병을 향해 달려갔다.
딱 봐도 이 여자가 이들의 통솔자이자 제일가는 실력자였다.
아드리아가 빠져나가려면 내가 이 여자를 붙들고 있어야 했다.
달려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달려가는 속도에 맞춰서 들이마시고.
멈추었다.
그리고 몸속 깊은 곳에서 숨겨진 힘을 끌어올렸다.
지금은 마지막 한 수 같은 것을 남겨 둘 때가 아니었다.
솟아오른 힘, 마나를 온몸에서 풀어놓았다. 팔과 다리, 근육과 신경에.
좁았던 시야가 넓어지고, 답답하던 숨이 트였다.
시간이 느려지고, 적의 모습이 솜털 하나하나까지 보였다.
이것이 마나. 어린 내가 기사와 팽팽한 맞수가 될 수 있었던 힘이었다.
순식간에 적이 가까워졌다. 나는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놀란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팔이 움직이고, 검이 휘둘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검을 감싼 희미한 빛까지.
제길, 생각 이상의 실력자였다.
캉!
검이 튕겨 나왔다.
다행히 힘은 많이 밀리지 않았다. 검날도 깨지지 않았고.
다만, 체중 차이는 어쩔 수 없었다.
"큭."
몇 발짝 밀린 나는 다시 검을 치켜세우고 적에게 달려들었다.
캉. 캉. 캉.
날아오는 검을 피하고, 피할 수 없는 검은 튕겨 내고, 가깝게 달라붙어 검을 휘둘렀다.
"넌 뭐야! 꼬맹이가 아니라 난쟁이였냐!"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설마 다른 종족도 있었나?
뭔가 오해를 받는 기분이었지만, 시간만 벌 수 있다면 어떤 오해를 받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날 선 줄타기를 하는 기분으로 여자 용병과 어느 정도 검을 섞은 뒤, 훌쩍 뒤로 물러섰다.
이 정도면 되겠지?
그리 오랜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드리아가 도망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가 도망친 방향은 가속 능력을 쓰는 아드리아를 막을 만한 용병이 없었다.
아드리아라면 용병들을 제치고 도망쳤을 게 분명했다.
그럼, 이제 내 차례였다. 후딱 틈을 찾아 빠져나가야…….
빠르게 고개를 돌리다 나는 우뚝 멈추고 말했다.
아드리아가 달려간 방향으로 쓰러진 두 명의 용병이 보였다. 내 예상대로 아드리아는 훌륭하게 포위망을 빠져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용병들은 아드리아를 따라가지 않았다.
아드리아도 멀리까지 도망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렇게 좁을 줄 알았나. 그보다 까딱하면 일을 망칠 뻔했잖아!"
여자의 말에 대답하는 남자는 요새 아래에서 용병들을 지휘하던 자였다.
그는 두꺼운 팔로 아드리아의 목을 휘감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컥. 컥."
남자의 팔에 매달린 아드리아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나야 대장님만 믿은 거죠. 내가 대장님이 오는 걸 모를 리가 없잖아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코를 두들겼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되지는 않는 건가. 정말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아드리아를 감은 팔은 무척 두꺼웠다. 다른 쪽 팔의 두 배는 되어 보였다.
분명 처음 보았을 때는 저렇게 두꺼운 팔이 아니었다.
입고 있던 갑옷도 바지 빼고는 전부 벗어 버렸고, 우리처럼 온통 흙투성이였다.
조금 전 말과 저 모습.
"설마, 신체 변형?"
"오, 똑똑한데? 공작가에 너 같은 애가 있었나? 흠. 서자가 네 나이쯤이라던 것 같았는데……."
말 한마디를 꺼냈을 뿐인데, 상대는 바로 정답을 꺼내 들었다.
가짜 천재인 나보다 훨씬 더 똑똑한 것 같았다.
하아, 이번에는 정말 운이 나빴다.
적은 능력도 알맞게 맞춰 왔고, 타이밍도 딱 맞았다.
"예언가라도 있는 거 아냐?"
답답해서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내 말에 남자는 묘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당장 저 녀석을 죽여!"
이어서 그는 아드리아의 목을 졸랐다.
"커억!"
"달아날 생각은 마라. 도망치면 영애의 목숨은 없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잖습니까? 거기다 영애하고는 별로 친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런 실력을 가졌는지 모르겠지만, 그 실력이면 분명 영애를 호위 중일 테지. 명예를 생각한다면 그냥 도망치지는 않을 거야."
그는 다른 팔에 새겨진 상처를 힐끗 쳐다보았다.
"요새 지하에서 만난 기사와 하녀도 목숨을 버려 가며 우리를 막아섰으니까."
"캭! 큭!"
아드리아는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미친 듯이 몸을 흔들었다.
"그럼 좀 더 놀아 봐도 돼요? 하마터면 밀릴 뻔해서 속이 얼마나 상했는지 몰라요."
"안 돼! 시간이 없다."
여자 용병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곤란했다. 도망치는 게 정답이긴 한데, 쉽게 도망치지도 못할 것 같았고.
죽게 놔두고 도망치자니 잠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살 사람은 살아야지.
미안한 마음에 마지막으로 아드리아를 바라보았다.
아드리아도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고.
아드리아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컥. 컥. 도, 도망쳐!"
고마워요. 나도 그럴 생각이에요.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고개를 돌리려 할 때였다.
"캭!"
아드리아가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그녀는 크게 입을 벌리고, 혀를 깨문 것이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피.
피를 쏟으며 아드리아가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쳇, 자결하다니."
놀란 남자가 아드리아를 던지고 내게 달려왔다.
뒤에는 여자 용병이 뛰어왔고. 용병들도 검을 치켜들었다.
"도망갈 생각이 없는 건가?"
내 앞에 멈춰 선 남자가 나를 보며 물었다.
나는 그때까지 바닥에 나뒹군 아드리아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하, 젠장.
괜히 쓸데없는 짓을.
겉멋에 겨워서 남에게 피해나 주고.
"얘 왜 이래? 아예 맛이 갔는데?"
여자 용병이 재미있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그래. 이게 맛이 간다는 건가.
짜증이 나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영애가 쓸데없는 희생을 했군. 실력이 있어 봤자 아직 어린아이군."
남자가 검을 들어 올렸다.
"아까워라. 시간만 있으면 좀 더 가지고 놀 수 있었을 텐데."
여자 용병은 나를 보며 혀를 핥았다.
기분대로 한껏 어울려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물어볼 말이 남아 있었다.
"죽기 전에 하나만 묻죠."
"응?"
"두 사람은 어디 소속입니까? 그 서자라는 인간을 모시는 것도 아닐 테고."
침착한 내 목소리에 남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알 것 없다."
그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 했지만, 다행히 옆에 입이 가벼운 사람이 있었다.
"에이, 지금은 상관없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원래 소속은 말할 수 없고, 지금은 라팔마 백작 소속이지. 됐어?"
충분했다.
날 놀리기 위해 꺼낸 말일 테지만,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검을 휘두르는 남자와 웃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솜털 하나부터 눈썹 하나까지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 새겨 놓았다.
절대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서걱.
시야가 뒤집히고 점점 낮아졌다.
숲과 하늘이 점점 흐려지고, 결국 어두워졌다.
완벽한 어둠.
적막.
그리고 빛이 쏟아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눈을 뜨자, 6살 아이의 작은 손이 보였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둘째 공작부인을 내보냈던 그날로.
나는 주먹을 쥐었다.
파랗게 질린 손. 하지만,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시간은 충분했다.
나는 미래를 바꿀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