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술천재는 무한리셋 중-21화 (21/563)

제21화

제21편 결혼은 조심해야 합니다 (1)

횃불 하나를 들고, 바위 사이에 난 좁은 틈을 비집고 움직이는 것은 무척이나 지치고 힘든 일이었다.

끝이 어디일지, 이대로 틈이 좁아져서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지, 도중에 숨이 막히게 되는 건 아닐지, 여러 생각이 자꾸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헉. 헉."

다행히 뒤에서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 덕분에 엄습해 오는 두려움을 몰아낼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힘든 것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헉. 헉. 둘 다 무사하겠지?"

"후…….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걸까?"

"……."

거친 숨소리 사이로 아드리아의 말이 계속 들려왔다.

내 뒤를 따라오는 아드리아도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아니, 체형이 조금 더 큰 그녀는 나보다 더 힘들 게 분명했다.

"더 어린 꼬맹이도 힘든 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데, 좀 더 힘내 봐요."

"흥, 완전 애늙은이면서……."

투덜거리긴 했지만, 그녀는 내 말에 힘을 내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좁은 동굴을 이동하는 데 조금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거친 숨소리는 줄어들었고, 대신 말을 거는 빈도가 늘어났다.

무서웠던 것일까?

"기사가 되면 이런 일들을 겪게 되는 걸까? 우고 기사나 비앙카를 보니 자신이 없어졌어."

그녀의 말에 절실히 공감했다.

뭐, 전생처럼 전쟁이 없는 안정된 나라라면 군인이나 기사도 공무원에 가까운 직업에 불과하겠지만, 이쪽 세상은 예상보다 훨씬 무서운 곳이었다.

전생에는 의사당에서 의원들이 멱살을 잡는 것이 정쟁(政爭)의 모습이었는데, 여기는 직접 상대의 목을 날리는 거로도 모자라, 상대의 딸을 죽이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는 동네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세상이니 더욱 힘을 길러야 했다.

"검을 배우지 못했으면 도망치지도 못했을 겁니다."

"그런가? 하지만, 알렉스 너는 나하고 같이 안 와도 됐잖아."

그건 댁이 끌고 다녔기 때문이었어.

"그보다 내가 검을 배운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던 겁니까?"

"시몬……. 공자님이 우리 영지에 방문했을 때 같이 왔던 기사단장님이 내가 검을 배우는 것을 보고 알려 주셨어."

설마 '공작가의 숨겨진 검'이 기사단장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나!

나만 보면 마음에 안 들어 하더니 후작가에 가서는 이상한 소문이나 퍼트리다니…….

요즘 좀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한번 말문이 트이자, 아드리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갑자기 약혼이 잡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약혼자 집으로 피난을 오고, 또 이렇게 도망치고……."

동굴이 어두웠기 때문일까? 그녀의 음성이 점점 가라앉았다.

"다른 귀족 영애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서 검을 배웠는데, 이래서야 다를 게 없어. 아니, 더 나빠졌나?"

말이 계속되니 완전히 넋두리로 변해 버렸다.

이해는 가지만, 그런 넋두리를 계속 들어 줄 마음은 없었다. 나는 경호원이지 심리 상담사가 아니었다.

슬슬 그녀의 입을 막으려 할 때였다.

휘이잉.

정면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살랑.

이어서 작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흘러오는 바람은 지금까지 들이켰던 텁텁한 공기가 아니었다.

"어? 바람이다!"

아드리아도 바로 알아차렸다.

"출구인가 봐!"

어두웠던 목소리가 단숨에 밝아졌다.

우리 두 사람은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앞으로 걸어갈수록 신선한 공기가 더욱 느껴졌다.

아직도 빛은 보이지 않았지만, 신선한 공기만으로도 밖과 연결되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잠시 뒤, 우리는 계속 이어졌던 좁은 동굴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는 횃불을 들어 올려 주변을 살폈다.

"밖이 아냐?"

그녀 말대로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위로 꽉 막힌 동굴도 아니었다.

벽과 바닥, 천정은 바위가 아니라 사각형으로 이어붙인 석벽으로 되어 있었다.

"지하 석실?"

커다란 철문이 한쪽 벽 중앙에 자리하고 있었고, 석실 중앙 제단에는 커다란 관이 놓여 있었다.

관을 보는 아드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구 제국 시절의 무덤일까?"

구 제국 시절인지는 모르겠지만, 관이 있는 거로 봐서는 묘지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

어차피 철문으로 가려면 관 옆을 지나야 했기에 나는 횃불을 들고 조심스럽게 관을 향해 걸어갔다.

"우리가 처음 발견한 걸까?"

아드리아가 뒤에서 기대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역시 그녀는 후작가 영애와 어울리지 않았다.

유적과 무덤을 보면 흥분하는 아드리아를 보니, 쌍권총을 들고 무덤을 털고 다니는 전생의 게임 캐릭터가 자꾸 떠올랐다.

"처음일 리가 없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게 기연 따위가 다가올 리가 없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갈림길도 없었으니, 첫 번째로 왔을 리가 없었다.

관 뚜껑도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선객이 먼저 무덤을 터신 모양이었다.

"용사가 아니라 도굴꾼이었나 보네요."

관 안에는 옷가지 일부와 뼛조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정말. 다 가져갔네."

관을 확인하고는 아드리아가 안타까워했다.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르죠. 관에 담긴 지 오래되었으니 어차피 쓸모도 없었을 테고."

오래된 유물이니 돈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대전쟁 때 유적도 방치한 꼴을 보니 큰돈이 되긴 무리였다.

더구나 그때는 대전쟁 때였으니, 오히려 처치 곤란이었을지도…….

"왜 쓸모없어? 신물로 이름 높은 무기나 갑옷은 다 구 제국 때 물건이잖아. 대전쟁 때 영웅들이 쓰던 신물들도 그런 거였고. 구 제국이 무너진 뒤로는 다시는 못 만드는 물건들이잖아."

잃어버린 기술이라니, 이 동네는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유적에서 쏟아지는 동네인 건가!

끙, 인터넷이 필요해.

역시 서재에 있는 책과 서기관에게 듣는 수업만으로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아, 여기 열쇠 구멍 같은 게 있어. 기관이 있는 걸까?"

아드리아가 관 안을 좀 더 살펴보다가 관 바닥에 뚫린 구멍을 발견했다.

손가락 길이 정도의 짧은 틈처럼 보이는 구멍 위에는 문과 동굴 입구에서 보았던 문양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검으로 찔러 넣으면 딱 맞을 것 같은데……."

아드리아가 구멍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럼, 시체와 함께 묻혔던 검이 열쇠일까? 검을 구멍에 밀어 넣으면 기관이 움직여서 숨겨진 보물 상자가 나타나는 거겠지?"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마구 늘어놓았다.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은 시체 때문에 이 구멍을 보지 못하고 검만 가져간 거고, 시간이 지나 시체가 썩어 없어져서 우리는 구멍을 보게 된 거지."

짝. 짝. 짝. 마음속으로 손뼉을 쳐 주었다.

아드리아 영애는 도굴왕에 이어 이제는 명탐정이 되신 것이다.

반박할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 철문으로 향했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에요. 빨리 가야죠."

"……응."

밝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아드리아의 손은 잘게 떨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희생, 그녀가 휘말려 버린 일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일까지.

아직 10대 소녀인 아드리아는 지금 겁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무섭다고 멈추어 설 수는 없었다.

끼익.

다행히 철문은 쉽게 열렸다.

원래 쉽게 열리는 문은 아닌 것 같았지만,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원래 이쪽으로 들어오는 거군요. 우리가 온 길은 바위가 갈라져 생긴 샛길이었고요."

일부러 꺼낸 말이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직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것 같았다.

나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철문 뒤에도 동굴이 이어졌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럭저럭 큰 동굴이라 움직이기 어렵지 않았다.

앞서와 달리, 동굴 안에는 여러 동물들이 살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쥐들과, 커다란 발톱을 가진 두더지, 팔뚝만 한 벌레까지. 모두 처음 보는 동물들이었다.

다행히 나와 아드리아가 처리할 수 없는 짐승들은 없었지만, 나는 이 동굴에서 처음으로 다른 세계에 온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동굴 속을 지나니, 결국 빛이 있는 곳에 도달할 수 있었다.

우리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원통으로 막힌 수직 벽 위로 하늘이 보였다.

"우물이네."

"버려진 우물이군요."

우리는 곧바로 우물 벽을 타기 시작했다.

아직 어린 두 사람이었지만, 우리는 성인 이상의 힘과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흙벽과 돌 사이에 손가락과 발을 걸고, 쭉쭉 위로 올라갔다.

잠시 뒤, 우리는 무사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흙투성이가 되어 버렸지만, 따뜻한 햇볕을 느끼느라 둘 다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물 주변은 나무로 가득했다.

오래된 집터들이 언뜻언뜻 보이기는 했지만, 마을은 오래전에 숲에 의해 집어삼켜진 것 같았다.

"기억에 잊힌 마을일까."

대전쟁 때 파괴된 마을인지, 아니면 그전에 이미 버려진 마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마을일 게 분명했다.

여기라면 버려진 우물 속에 고대 무덤으로 통하는 동굴이 있다는 것을 알기 힘들 게 분명했다.

"한 명은 알고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에서야 누구인지 찾기도 어려웠다. 찾을 생각도 없고.

지금은 빨리 영지군에 합류해야 했다.

"요새 근처에 있는 숲이라면 온스 숲일 겁니다. 요새 서쪽에 있으니 동북쪽으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응! 빨리 가자."

내 말에 아드리아가 힘차게 대답했다. 다행히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우리는 몸에 묻은 흙을 털고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지금쯤이면 영지군이 적들을 정리하고 우리를 찾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영지군이 찾을 때까지 숲에 숨어 있는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숲에서 밤을 새울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었다.

솔직히 적을 만날 확률은 거의 없었으니 최대한 빨리 숲을 벗어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역시 확률은 믿을 바가 못 되었다.

99%의 확률로 총을 쏘아도 매번 빗나가는 게임이 있었다는 것을 까먹다니.

"호호, 이번에는 내가 잡았네."

갑자기 나타난 용병을 보고 나는 주사위의 신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정말 놀랐어. 여기까지 이어지는 동굴이 있었다니. 내 능력이 아니었으면 놓칠 뻔했다니까."

이런, 능력으로 추적한 거였나? 그럼 저주는 취소다.

그녀가 말을 하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빠져나갈 곳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용병들이 우리의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는 동안, 여자 용병은 두 손가락으로 손수건을 잡고 흔들었다.

"내 손수건을 어떻게……."

손수건을 보고 아드리아가 신음을 흘렸다.

아드리아의 손수건이라고?

손수건이 추적의 매개체인 건가? 손수건으로 뒤를 쫓다니. 정말 개 같은 능력이었다.

"아가씨와 친한 분이 구해 주셨어. 덕분에 계속 쫓을 수 있었어."

"내 손수건을 훔치는 사람과 친한 적 없습니다!"

"그럴 리가, 이번에 이에로 후작가의 새로운 주인이 되신 분인데?"

여자 용병은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웃는 얼굴로 이야기했다.

* * *

용병과 영지병들의 시체가 요새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전장의 모습에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외부의 적들은 대부분 처리했습니다. 일부 달아난 용병들이 있어 추격 중입니다."

기사 한 명이 공작 옆에서 전황을 보고하고 있었다.

"지하는?"

"기사단장님이 직접 들어가셨습니다. 곧 결과를 들으실 수 있을 겁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보이지 않았다. 공작이 병사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려보냈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요새를 바라보았다.

아이들을 쫓아 적의 주력이 지하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에 다들 기대를 버린 뒤였다.

복수라도 제대로 할 생각으로 기사단장이 직접 들어갔지만, 아이들을 구해 오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공작은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고 있었지만, 지금은 다른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했다.

도대체 왜 거의 전쟁 수준을 방불케 한 인원을 보낸 것인지.

겨우 여아 하나를 죽이겠다고 기사급 인력을 쏟아부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행히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급보입니다!"

말을 타고 온 전령이 그의 궁금증을 풀어 준 것이다.

"이에로 후작가 저택이 불에 탔습니다. 일가는 전멸. 라팔마 백작이 기사들을 이끌고 와서 살아남은 후작의 서자를 새로운 가주로 세웠습니다!"

"아드리아를 죽이려는 이유가 그거였나?"

공작이 눈썹을 찡그렸다.

겨우 약혼 정도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후작 영지를 완전히 먹어 치울 생각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