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제20편 유적 탐험(?) (2)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던 계단을 내려오자 이번에는 큰 돌로 짜 맞춰진 지하 시설이 앞에 펼쳐졌다.
치이익.
때마침 우고 기사가 들고 있던 횃불이 그 힘을 다했다.
다시 어두워지는가 싶더니, 우고 기사는 어디서 구했는지 다른 횃대에 불을 붙였다.
화악!
횃불을 밝히자, 어두워지려던 통로가 다시 밝아졌다.
"계단을 내려올 때도 그렇고, 그 횃불은 또 어디서 난 건가요?"
아드리아의 질문에 우고가 대답했다.
"영지 안에 대전쟁의 중요한 유적인 마요르카 요새가 있는데, 공작가에서 그걸 그냥 방치할 리가 없죠. 사람이 계속 상주하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확인하고 관리합니다. 그때 사용하기 위한 횃불들입니다."
아드리아는 그의 말에 신기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느끼던 섭섭함과 분노는 이제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냥 사지에 내버린 것이 아닌 이상, 계속 화를 내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무너져 잔해만 남은 유적이 아니라, 아직도 멀쩡한 부분이 많은 대전쟁 때의 시설을 보게 되니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움직이죠. 계속 추격해 올 겁니다."
우고 기사의 말에 주위를 살피던 일행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기는 뭐 하던 곳인가요?"
이번에는 비앙카가 물었다.
"마요르카 요새의 지하 시설입니다. 구 제국이 한창때 만든 요새라 지하 시설이 무척 큽니다. 지상보다는 덜하지만, 지금은 많이 무너져서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의 말대로 벽이 무너져 통로가 막힌 곳이 보였다.
무너진 곳도 많았지만, 지상과 달리 아직 멀쩡한 곳이 훨씬 더 많은 지하 시설이었다.
벽과 바닥은 큰 돌로 짜 맞춰져 있었다.
일행의 발소리와 멀리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리고, 횃불에서 멀어진 곳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음침한 곳이었다.
'대전쟁 때 무너진 유적의 지하 시설이라……. 이제는 던전물로 가는 건가?'
갑자기 떠오르는 황당한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다.
"왜 웃어?"
아드리아가 내 얼굴을 보며 물었다. 이런, 웃음이 겉으로 새어 나온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이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에 다른 두 사람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 맞다. 나도 듣고 싶어."
아드리아도 내 말에 격하게 동의했다.
다행히 비앙카도, 우고 기사도 대답을 뒤로 미룰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시몬 공자님의 약혼을 반대하는 귀족들이 있다는 것은 아드리아 님도 잘 아실 겁니다."
나는 몰랐는데.
"응. 옆 영지에서 사절이 와서 항의하기도 하고. 그래서 공작 영지로 온 거잖아."
"네. 하지만, 그냥 피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니, 역시 위험한 일에 제대로 휘말리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두 가문의 연합을 막기 위해 아드리아 영애를 죽일 생각이라는 첩보를 받게 되었고."
"이 기회에 습격해 오는 자들의 뒤를 캐내서 누가 적인지 확인하고, 확인된 적들에게 압력을 줄 생각이었다는 겁니까?"
제1 왕자파인 그레시아 공작가와 제2 왕자파인 이에로 후작가, 거기에 귀족파까지 얽힌 대규모 정쟁의 결과가 이런 사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공작가 내부 일도 쉽지 않은데, 왕국의 정치 싸움이라니. 이러다가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 모르겠다.
더구나, 준비한 일이 잘된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계획이 실패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내 말에 우고 기사와 비앙카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건……."
"시몬 공자님이 끼어들어서잖아요."
대신 아드리아가 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몬 형에게 위로를…….
앞으로 시몬 형의 연애는 무척이나 험난해질 것 같았다.
"……그것도 있지만, 적의 숫자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 아니었나요?"
우고 기사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정도 숫자면 습격으로 보기 힘듭니다. 뒤에 사태를 무마하기도 어려울 텐데,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만, 일이 어그러진 지금은 알게 된 내용을 모두 믿기 어려웠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이 지하에 숨을 곳이 있나요?"
아드리아의 물음에 우고 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여러 곳이 무너져서 복잡해졌지만, 따로 숨을 만한 곳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계속 피해 다니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 뒤로 우고 기사가 갑자기 역사 이야기를 꺼냈다.
"대전쟁 때 벌어진 마요르카 요새 전투는 처음에 요새가 마족들에게 포위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좋아하던 이야기였을까? 아드리아가 냉큼 우고 기사의 말을 받았다.
"저도 그 이야기 알아요. 용사들이 구원을 와서 외곽에서부터 포위망을 부수고 전세를 역전시켜서 계속 밀리던 대전쟁에서 반격의 시발점이 되었다고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요새가 포위당했다는 소식을 용사들과 지원군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죠."
"아……. 그러네. 그때 혹시 천리안이나 예지 능력을 가진 용사가 있지는 않았죠?"
"아니었습니다. 능력이 아니라 포위망을 뚫고 소식을 전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드리아와 우고 기사의 대화는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이건 마치 유적의 역사를 설명하는 가이드와 여행객 같은데.'
적에게서 도망치는 와중에 나누는 대화로는 영 어울리지 않았지만, 우고 기사의 말은 우리 모두를 궁금하게 만들었다.
"혼자서 포위망을 뚫은 거예요? 요새에 용사가 있었던 건가요?"
"아뇨. 그는 싸움 한 번 없이 포위망을 빠져나갔습니다."
우고 기사는 위를 가리키던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요새 지하에 있는 비밀 통로로 빠져나간 겁니다."
비밀 통로? 여기에 그런 게 있었어?
"그럼, 지금 우리는 그곳으로 가는 건가요?"
물어보는 아드리아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네. 비밀 통로가 있는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두 여성은 모두 기뻐했지만, 나는 그의 설명에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런 비밀 통로가 있다면 포위당했을 때 모두 그리로 빠져나오면 되었을 텐데요."
"아, 그러네. 일부만 남기든가 허수아비 같은 거로 속일 수도 있고."
아드리아가 대단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비앙카는 심각한 표정으로 우고 기사를 쳐다보았다.
"아쉽게도 그럴 수 없었습니다. 도착하면 아실 겁니다."
정말, 일행을 계속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이었다.
덕분에 풀어졌던 분위기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졌고, 일행은 다시 불안한 얼굴로 지하 통로를 나아갔다.
아쉽게도 요새 지하는 전생의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던 던전 같은 곳은 아니었다.
함정도 없었고, 괴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쥐를 닮은 작은 짐승들이 불빛을 보고 도망쳤을 뿐이었다.
우리는 통로를 돌고, 구멍 뚫린 벽을 지나 시설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주변은 점점 인위적인 느낌이 사라져 갔다.
정돈된 돌벽이 줄어들고, 자연적인 암벽이 늘어났다. 중간마다 천장을 받치는 목침이 보였고, 나중에는 자연석으로 이루어진 동굴이 되었다.
이윽고, 동굴이 끝이 났다.
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 더 갈 곳이 없었다.
바위에는 갈라지고 부서진 흔적이 가득했고, 그 앞에는 곡괭이와 삽, 그리고 처음 보는 도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우고 기사는 우리를 바위 앞으로 데려갔다.
비앙카가 바위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냥 바위인데요? 설마 여기가 비밀 통로라는 건가요?"
설마 '열려라, 참깨.'로 열리는 바위인가!
내가 바위에 손을 올리고 작게 웅얼거리자, 일행이 모두 쳐다보았다.
쩝, 이건 아니었나?
"네. 비밀 통로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바위 동굴, 아니 바위 사이에 난 틈이라고 해야겠죠. 요새 지하를 계속 확장하다가 바위로 막힌 곳입니다. 더 확장할 필요가 없어서 놔둔 곳이었는데, 이곳에서 밖으로 빠져나갈 길을 발견한 것이죠."
그는 횃불을 바위에 가까이 가져갔다. 횃불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그림자가 움직였고, 바위가 갈라진 틈이 모서리 쪽에 나타났다.
비앙카가 갈라진 틈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틈 앞에 멈춰 섰다.
"아까 말한 뜻이 이거였군요."
그녀의 말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바위 사이에 나타난 틈을 보니 나도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저기로는 요새의 모든 병사가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아니, 한두 명이나 가능했을까?
바위 사이에 난 틈은 성인이 지나가기에는 너무 좁았다.
비앙카가 아드리아와 나를 보고 말했다.
"두 분은 가능하겠네요."
안심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아드리아도 틈을 확인하더니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냐! 난 도망가지 않을 거야! 같이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거야. 응. 조금만 버티면 공작님이 병사들을 이끌고 오실 거야."
비앙카를 보며 아드리아가 외쳤지만, 비앙카는 아드리아를 보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드리아 님을 부탁드릴게요."
나는 고개를 숙인 비양카를 바라보다가 우고 기사에게 물었다.
"시몬 형을 보낼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습니까?"
"네. 시몬 공자님은 나이에 비해 덩치가 크시니까요. 여길 지나가기 어렵죠."
나를 데려온 것도, 마지막으로 아드리아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어린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 정말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변명도 없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죽을 자리를 스스로 찾아온 기사.
나는 기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큰 덩치에 험상궂게 생긴 얼굴.
말투와 행동 모두가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충성을 하는, 고리타분한 기사의 표상 같은 남자였다.
하지만, 역시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니, 내가 그동안 이 세계 사람들을 바보로 여기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공작님께 당신이 한 일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무. 슨. 일. 이 있어도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하하, 공자님이 기억해 주신다니 영광입니다."
험상궂은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당연히 그는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비앙카도 결국 아드리아를 설득했다.
나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귀족의 의무라는 말을 듣고 아드리아는 그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우고가 틈 옆에 새겨진 작은 문양을 쓸며 말했다.
모든 것을 들었기 때문일까? 그의 음성이 편하게 들렸다.
"요새 주변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요새를 빠져나가 구원을 요청한 이가 용사 중의 한 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뭐 흔한 전설 중 하나일 뿐이죠."
어디서 본 것 같은 문양이었다. 어디서 봤을까?
"하지만, 혹시나 압니까? 공자님이나 아드리아 영애님이 커서 그런 용사님 같은 분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름대로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한 말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어두웠다.
멋쩍은 표정을 지은 그가 벽에 난 틈을 가리켰다.
"이제 출발하십시오. 절대 중간에 멈추거나 돌아오시면 안 됩니다. 적이 화공을 하거나 특수한 능력을 사용할지도 모릅니다."
비앙카가 이어 말했다.
"서둘러요. 언제 들이닥칠지 모릅니다."
그녀의 말에 아드리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죽으면 안 돼!"
"그럴 리가요. 저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결정한 이상, 시간을 끌 순 없었다.
나는 아드리아의 팔을 잡고, 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나도 정면으로 걷기는 불가능했다.
그래도 몸이 작은 덕분일까, 옆으로 몸을 틀자 쉽게 틈 사이로 움직일 수 있었다. 아드리아는 가슴이 걸리는 듯했지만, 팔다리를 움직여 억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틈 사이로 어린 소년과 소녀가 사라졌다.
비앙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셨네요. 무사히 도착하시겠죠?"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아이고, 그런 성격으로 잘도 이런 일을 책임지는 자리까지 갔군요."
"그 점은 공작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쉽네요. 일찍 알았으면 슬쩍 손수건이라도 흘리는 건데."
"흠. 그건 좀 아쉽군요."
두 사람은 피식 웃었다.
조금 전 이야기는 적진에 돌격하기 전 마지막 잡담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검을 다시 쥐었다.
아드리아에게는 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지만, 두 사람은 그 말대로 할 생각이 없었다.
최대한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해 적에게 혼란을 주어야 했다.
"이제 갈까요?"
"네. 마지막은 멋진 기사님과 함께네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우고 기사가 든 횃불이 점점 작아졌고, 곧이어 비명과 고함이 작게 들려왔다.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얼마간 이어진 뒤, 빛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