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제19편 유적 탐험(?) (1)
마차가 있는 곳까지 내려가니, 그곳은 이미 큰 싸움이 벌어져 있었다.
"커억!"
"제길! 막아!"
"죽어!"
고함과 비명이 귓속을 찔렀고, 피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마차는 이미 부서져 있었다. 마차를 지키던 병사들도 마차 근처에 죽어 나뒹굴고 있었다.
그렇다면 싸울 사람이 없어야 하겠지만, 현재 수십 명의 병사가 가죽옷을 입은 용병들과 싸우고 있었다.
병사들 중에는 처음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몇몇은 경계 근무 때 보았던 사람들이었다.
병사들 사이에는 기사들도 보였다.
그들은 병사와 차원이 다른 검술로 적을 상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들은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밀리고 있었다.
상대는 분명 용병들과 다르지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검은 기사와 동급, 아니 그 이상이었다.
"어디 기사냐! 기사가 용병들과 섞여서 습격하다니, 명예를 버린 건가!"
기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지만, 가죽 투구를 깊게 눌러쓴 남자는 기사의 말에 비웃음을 날렸다.
"나는 그런 명예를 얻어 본 적이 없어서. 뭐 이번 일이 끝나면 나도 그 자리에 설 수도 있겠지."
기사들도, 병사들도, 처음 보는 용병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아니, 용병처럼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들은 용병처럼 보이지 않았다.
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의 일이 벌어질 줄이야. 이건 미스터리물이 전쟁물이 되어 버린 꼴이었다.
저 용병들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 온 적일 테고, 기사와 병사들은 함정을 파고 적들을 잡기 위해 숨겨 놓은 병력일 터였다.
계획이 바뀌어 숨어 있던 병력이 모여 적에 맞서 싸우고 있는 것까진 알겠는데.
왜 밀리고 있는 거지?
함정을 파고 적을 잡을 생각으로 준비한 병력이 이렇게 밀리면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지금 이곳에서는 기사와 영지병들이 적에게 하염없이 밀리고 있었다.
쓰러지는 병사들. 용병에게 밀리다 다른 용병에게 뒤를 찔리는 기사.
늦게나마 이곳으로 달려오는 병사들도 있었지만, 영지병들이 무너지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더구나, 용병 중에는 싸움에 가담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말을 타고 싸움을 지켜보는 남녀들.
그들 중 대장처럼 보이는 중년 용병이 검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아드리아다! 목표가 저기 있다!"
그의 말은 전장의 소리를 뚫고 모두의 귀에 들려왔다.
덜컥. 싸움이 멈추었다.
모두 우리를 바라보았다.
"곤란한데."
내려오기 전에 변장이라도 시킬 걸 그랬다. 쏘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무척이나 따가웠다.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잡아라!"
다음 순간,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조금 전과 달리 진형도 채 갖추지 못한 전투였다.
"비켜!"
"막아! 접근하지 못하게 해!"
병사들이 적을 막는 사이, 기사들은 속속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우고 경! 적을 막기 어렵습니다! 퇴각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새로 퇴각해서 시간을 버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원군이 곧 올 겁니다."
기사들의 말에 우리를 이끌던 기사, 우고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위험해. 포위망을 뚫고 퇴각한다."
"네? 그게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습니다."
기사 우고는 시몬을 가리켰다.
"일행에 공자님이 계신다. 지금 최우선 목표는 시몬 공자님의 안전이다."
"맙소사."
"시몬 공자님이 왜 여기에……."
기사들이 시몬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큭! 탈출이 가능하겠습니까?"
벌써 들이닥친 용병을 막아서며 다른 기사가 소리쳤다.
병사들의 방어를 뚫고 달려드는 용병들이 점점 많아졌다. 기사들이 급하게 막아섰지만, 달려오는 용병들을 보니 오래 막기는 어려워 보였다.
기사 우고가 아드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인원을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아드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우고 기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시몬 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고, 거기다 인원을 나눈다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끼가 되라는 겁니까!"
비앙카가 벌컥 화를 냈다.
"미끼?"
"미끼라니요?"
시몬과 아드리아가 의문을 표하자, 우고 기사가 빠르게 대답했다.
"저들은 아드리아 영애를 노리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을 안전하게 모시려면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공작의 후계자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후작의 딸을 미끼로 삼다니.
나중에 크게 문제가 될 게 분명할 텐데, 기사의 표정은 전혀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아드리아가 입술을 깨물었고, 비앙카가 다시 화를 내려 했다. 하지만, 먼저 분노를 터트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보호하는 것도 아니라 미끼가 되어 달라니. 기사가 할 수 있는 말인가!"
"네. 저는 그레시아 공작가의 기사입니다."
우고 기사가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공작가에 대한 충성심이라…….'
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기사가 보여 주는 충성심의 단면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시몬 공자를 모시고 탈출하도록. 나는 아드리아 영애를 모시겠다."
"알겠습니다."
병사들을 막아서며 다른 기사들이 대답했다.
그들의 대답을 들은 뒤에야 우고 기사가 나에게 물었다.
"공자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실력을 보여 주어도, 인정을 받아도, 나이가 더 어려도, 역시 서자는 서자일 뿐인가.
시몬과 전혀 다른 대우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나는 조금 비웃듯이 대답했다.
"우리 입장으로는 내가 남는 편이 좋겠죠?"
"네. 가문에서 한 명이 남게 되면 나중에 후작가도 뭐라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지독한 사람이었다.
내가 직접 당하고 보니 먼저 당한 두 여성에게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기사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황당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너무 똑똑한 척을 하지 않는 건데……. 아니 그러면 예전에 죽어 버렸으려나.
어쩔 수 없었다. 임무를 맡아 놓고 달아나 버리면 공작의 성격에 좋은 결과가 나올 리 없었다.
돌아가면 시몬도 대판 깨질 테지만, 덩달아 나까지 가 버리면 나는 후작가의 먹이로 던져질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뒤도 안 보고 도망쳤을 텐데.'
죽으면 5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살아야 했지만, 그래도 다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휴, 저도 남죠."
"잘 생각하셨습니다."
짧은 대화였지만, 벌써 적들이 밀려들고 있었다.
"바로 출발해! 우리는 무너진 요새로 후퇴합니다!"
아드리아는 입술을 깨물고는 몸을 돌렸다. 그녀는 비앙카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나와 우고 기사는 두 사람의 뒤를 따르며, 적들을 막아 냈다.
"목표가 도망친다! 추격해!"
우고 기사의 예상대로였다. 아드리아가 달아나는 것을 본 적들은 시몬과 다른 기사들을 지나 우리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시몬과 기사들은 금방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기사들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시몬은 기사들을 따라 북쪽으로 달려갔다.
"바로 지원군을 데려오겠습니다! 조금만 버텨 주세요!"
마지막으로 시몬이 우리를 보며 큰 소리로 외쳤지만, 굳어진 아드리아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5명이 내려왔던 길을 이제 4명이 올라가고 있었다.
무너진 요새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미 지나갔던 길을 다시 가는 것이라 그런지, 일행은 금방 추적을 뿌리칠 수 있었다.
무너진 요새에 들어서면서 우고 기사가 선두로 나섰다.
그는 이 요새를 속속들이 아는 것처럼 순식간에 길을 찾아 요새 깊숙이 나아갔다.
우고 기사의 뒤를 따르는 아드리아와 비앙카의 표정은 무척이나 비장했다.
믿었던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이제 죽음까지 각오한 표정이었다.
아직 어린 10대에 불과한 아드리아가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한 것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지만, 아드리아는 오히려 내가 더 대단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무섭지 않아? 죽을지도 모르는데, 전혀 무서운 얼굴이 아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아드리아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드리아의 말에 비앙카도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솔직히 무섭지 않았다. 죽음을 무서워하기에는 너무 많이 죽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지만, 죽음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도 싫었고, 5년이라는 시간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에는 죽지 않고 마지막까지 살아남아서 돌아갈 생각이었다.
뭐, 그렇다고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저도 무섭습니다."
"역시 그렇지? 나도 무서워."
내 대답이 그녀의 마음을 조금 편하게 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전보다 좋아졌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우리는 계속 요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비앙카가 결국 앞서 달리는 우고 기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죠? 안쪽으로 들어가 봤자 달아나기 더 어려운 것 아닌가요?"
바로 쫓아오지 않는 것을 보니, 적은 제대로 포위망을 펼칠 모양이었다.
지원군이 언제 올지 모르겠지만, 이래서야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될 뿐이었다.
우고 기사는 계속 달리면서 대답했다.
"왜 제가 책임자로 왔는지 아십니까? 이곳은 제가 어릴 때부터 놀이터로 지내던 곳이었습니다. 이 요새는 제가 속속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요새 안쪽을 가리켰다.
"제가 남은 것은 자살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드리아 영애와 알렉스 공자님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무너진 요새와 어울리지 않는 조각상이 서 있었다.
* * *
일행이 요새 깊숙한 곳으로 모습을 감추고 얼마 뒤.
요새 외벽 사이로 용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용병들은 바닥에 난 흔적으로 목표물을 추적했고, 기사들을 상대했던 용병들과 말을 탔던 용병들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들 중앙에는 조금 전 이들을 지휘했던 중년의 용병이 자리하고 있었다.
달아나던 일행과 달리 그들은 급하게 서두르지 않았다. 차근차근 변수를 없애며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뒤쪽에서 날렵하게 생긴 용병이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포위망이 완성되었습니다."
용병의 말에 중년 용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적의 공격이 거셉니다. 오래 막지 못할 것 같습니다."
"시간만 벌고 빠지라고 해."
"알겠습니다."
대장의 말에 용병은 다시 몸을 돌렸다.
전령이 사라지자, 일행 중 유일한 여성 용병이 대장에게 말했다.
"예상보다 편하게 되었네요. 기사들과 함께 달아나던 소년 덕분이에요. 혹시 공작 아들이 아니었을까요?"
"공작 아들 맞아."
대장의 대답에 여성은 놀란 얼굴이 되었다.
"네? 그런데 그냥 보내신 거예요?"
"우리 목표가 아니다. 괜히 죽기라도 하면 곤란해."
"하긴, 괜히 그레시아 공작가가 설치면 안 되죠. 하지만, 공작가 영지 안마당에서 이렇게 설쳐 댔는데, 괜찮을까요?"
"목표만 처리하고 물러나면 문제없다. 증거도 없는데 바로 전쟁을 벌일 수는 없어. 나중에 증거를 찾는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끝난 뒤니까."
"네, 네. 윗분들이 하시는 일인데 어련하시겠어요. 그보다 열심히 함정을 팠는데 미안하게 되었네요."
"처음부터 잘못 짚었는데 준비가 제대로 될 리가 없지."
"그렇죠. 신부를 죽여서 결혼 동맹을 막는다니……. 겨우 그런 일로 귀여운 영애를 죽인다는 게 말도 안 되죠."
"잠깐."
중년 용병은 손을 들어 계속 이어지는 말을 막았다.
앞에서 추적하던 용병들이 멈춰 서 있었다.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중년 용병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 도착하자, 그도 다른 용병들처럼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이런, 변수가 생겼네요. 이제 어쩌죠?"
여성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이 서 있는 앞쪽 바닥에는 지하로 향하는 통로가 있었다.
그리고 통로 옆에는 조금 전까지 통로 위를 덮고 있던 조각상이 쓰러져 있었다.
용병들은 통로를 내려다보았다.
아래로 이어지는 벽돌 계단은 어둠에 휩싸여 끝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