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제15편 형의 약혼자가 왔습니다 (1)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누구신지요?"
무척이나 예쁜 소녀였지만,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알렉스 아냐? 공작가의 세 번째 공자, 그리고 서자라고 들었는데?"
그녀가 꺼낸 '서자'라는 말에서 깔보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비하가 느껴지지 않는 점이 무척이나 참신했지만, 그만큼 예의가 없었다.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나보다 3, 4살 정도 많아 보였다. 전생이었으면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문제는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무척이나 비싼 것 같다는 점이었다.
딱 봐도 귀족 가문의 여식이었다.
그녀에게 예의를 따지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알렉스 맞습니다."
"맞잖아!"
"하지만 숨겨진 칼 같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모르는 분과 검을 겨룰 이유도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복도 한가운데서 이런 이야기를 나눌 이유도 없었다.
연무장으로 가는 길이었다. 아직 늦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드리아 데 이에로! 이에로가의 딸입니다. 시몬 공자의 손님으로 공작가를 방문했습니다!"
소녀는 목검을 양손으로 잡고 자신을 소개했다.
입고 있는 옷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절도 있는 기사의 인사였다.
황당한 상황이 이어졌지만, 최소한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게 되었다.
시몬 형의 약혼녀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었다. 공작가와 후작가의 연맹을 위한 정략이긴 했지만, 약혼 상대가 무척이나 아름다워 시몬 형이 내심 마음에 들어 했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그때는 10대 초반의 꼬맹이가 예뻐 봤자 얼마나 예쁠까 싶었지만, 지금 보니 확실히 소문이 돌 만큼 예뻐 보였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성격이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는데?
더구나 공작가의 숨겨진 검이라니. 몇 년 동안 꼭꼭 숨어서 훈련만 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떤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역시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임은 맞았다.
그런데, 시몬 형의 약혼자가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녀는 다시 검을 내밀었다.
"자기소개를 했으니, 이제 싸워 볼 수 있겠지?"
그녀는 싸울 마음이 가득해 보였지만, 이미 시간은 충분히 벌은 뒤였다.
"아드리아!"
나지막한 고함이 그녀 뒤에서 들려왔다.
10대 중반의 귀족 소년, 시몬 형이 얼굴이 벌겋게 변한 채로 빠르게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시몬 형이 다가오면서 묻는 말에 소녀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마침 상대가 보여 대련을 청하는 중이에요."
시몬 형은 힐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에 시몬 형은 눈썹을 씰룩였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생기면 늘 짓던 표정이었다.
"아직 저택 안내도 다 안 끝났습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다니면 안 됩니다."
"공작님께도, 공작부인께도 인사드렸잖아요. 어차피 방 정리가 될 때까지 시간 보내기였으니, 남은 시간을 활용해야죠. 아니면 공자님이 대련해 주시겠어요?"
시몬 형의 얼굴이 좀 더 붉게 변했다.
그녀의 말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이곳에 있기 때문일까?
"지금은 저택을 안내하는 중입니다. 저에게 저택을 계속 안내하는 영광을 주시기 바. 랍. 니. 다."
시몬 형은 정중한 모습으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림에 그린 듯한 예의 바른 귀족의 모습이었다.
시몬 형의 약혼자는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저와 대련해 주세요."
그녀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후작가 자제가 예의를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 나한테만 그런 건가?
뭔가 괘씸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이곳을 어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대련은 고민해 보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확답은 피한 채 시몬 형이 대답했다. 역시 제대로 배운 처세술이었다.
시몬 형이 손을 내밀었고, 시몬 형의 약혼자는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무례하게 시간을 빼앗았네요. 그럼 나중에 봬요."
아름다운 소녀가 손으로 가슴을 받치고 그림처럼 인사를 했다.
가슴이 뛸 만한 모습은…… 개뿔. 조금 전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기에 감흥은커녕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인사처럼 다시 그녀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저택에 살면서도 시몬 형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시몬 형의 약혼녀라면 지금처럼 같이 다닐 터. 일부러 내가 다니는 동선을 피해 다니는 시몬 형이니만큼 앞으로도 그녀를 볼 일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혼을 잔뜩 빼놓고, 시몬 형과 시몬 형의 약혼자는 저택을 구경하러 떠났다.
두 사람이 떠나자, 나도 발걸음을 옮겼다.
저택 뒤쪽에 있는 연무장으로 가는 길. 몇 년 전까지 플로라와 같이 걷던 길이었지만, 이제는 나 혼자 다니고 있었다.
혼자 다닐 만큼 나이를 먹은 것이었다.
물론 아직 키도 작고, 변성기도 오지 않은 어린아이였지만, 저택의 고용인 그 누구도 어리다고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일가의 가족묘 옆을 지나 숲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갔다.
몇 년 동안 걸었던 길이라 이젠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다.
잠시 걷고 나니, 나무로 둘러싸인 공터가 나타났다.
공작 일가의 연무장이었다.
연무장에는 언제나처럼 미겔이 홀로 기다리…….
어라? 혼자가 아니었다.
중년 기사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미겔 옆에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기사의 표정은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강렬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기사단장 알론스였다.
그가 왜 왔는지는 미겔이 이야기해 주었다.
"공자님의 실력을 보시겠답니다."
테스트인가? 하지만 미겔이 이야기해 주었을 텐데.
처음에는 공작도 가끔 찾아왔었고 기사단장도 얼굴을 비치었지만, 근래에는 연무장에 모습을 보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숨겨진 칼이니 어쩌니 하는 소문이 난 건가?
아무튼 오지 않았어도 미겔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텐데, 왜 갑자기 테스트를 보겠다는 걸까?
의문이 들었지만, 테스트가 우선이었다.
"목검 대련입니까?"
목검을 꺼내 들며 말하자, 미겔이 고개를 저었다.
"목검이 아니라 진검입니다."
그가 철검을 건네주었다. 기사단의 검보다 조금 작은 검. 기사의 종자들이 사용하는 검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미겔을 바라보았다.
근래 나도 많이 다뤄 본 검이었지만, 그것은 훈련 때뿐이었다.
"설마 진검으로 대련하는 건가요?"
"네."
그의 말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괜찮을까요?"
피식.
내 말에 기사단장은 헛웃음을 지었다.
"진검이라고 해도 기사의 지도 대련에서 교육생이 다친다면 기사직을 내놓아야지."
기사단장의 말에 난 미겔을 쳐다보았고, 미겔의 목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문, 문제없습니다."
미겔의 더듬거리는 목소리에 기사단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나와 미겔은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지도 대련답지 않게 미겔은 한껏 긴장해 있었고, 나도 무척이나 긴장했다.
"정확한 실력을 봐야 하니 최선을 다하십시오."
기사단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단순한 테스트는 아닌 듯했다.
나는 검을 치켜들었다.
"오십시오!"
미겔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나는 미겔에게 달려들었다.
잠시 뒤, 대련이 끝났다.
나는 대자로 누워 숨을 헐떡였다.
온몸에 먼지가 가득했고, 이리저리 구르느라 이곳저곳에 멍이 가득했다.
그동안의 훈련으로 10살 나이에 성인 이상 아니, 거의 기사급의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매번 훈련 때마다 성장하는 모습에 미겔은 무척이나 놀라워했지만, 정식 기사와의 대결에서는 이렇게 바닥을 나뒹굴 수밖에 없었다.
육체는 강해졌지만, 어린 나이에 걸맞은 짧은 팔과 다리가 문제였다.
리치가 너무 차이가 났다.
팔 길이가 너무 차이가 나서 미겔의 검이 내 몸을 닿을 때도 내 검은 미겔의 팔을 겨우 벨 수 있을 뿐이었다.
움직일 때도 짧은 다리로 두 배는 열심히 뛰어야 했고, 검이 부딪칠 때마다 작은 몸무게 때문에 이리저리 튕겨 나가 버렸다.
거기다 진검으로 대련을 하자니, 정말 죽을 둥 살 둥 몸을 움직여야 했다.
나는 누운 채로 기사단장 쪽을 바라보았다.
기사단장이 심각한 얼굴로 우리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제대로 보고한 게 맞나?"
기사단장은 미겔을 향해 꾸짖듯이 물었다.
미겔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하게 보고했습니다."
"제대로 보고했다고?"
"네. 기사급 육체에 준기사급 검술. 좋은 판단력. 약점은 아직 성장하지 않은 육체. 마지막으로 보고한 내용입니다."
잠시 생각을 더듬던 기사단장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가. 내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 건가."
기사단장의 말에 미겔이 머리를 긁적였다.
"뭐, 공자님 나이를 고려하면 보고대로 생각하기가 쉽지 않죠."
나와 달리 땅을 구르지 않은 미겔은 옷도 몸도 멀쩡했다. 먼지도 흙도 묻지 않았고, 멍도 보이지 않았다.
기사와의 지도 대련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하지만, 미겔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한껏 긴장한 덕분에 얼굴은 아직도 붉은 채였고, 입고 있는 가죽 갑옷 곳곳에 베어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겨우 흔적만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갑옷에 검이 닿은 흔적이었다.
지도 대련 중에 교육생의 검이 기사의 몸에 닿은 것이다.
기사단장의 말대로라면 미겔은 기사직을 내려놓아야겠지만, 알론스 기사단장은 미겔을 꾸짖지 않았다.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실력이 늘고 있군요. 공작님께 다시 보고를 드려야겠습니다."
기사단장의 감탄에 나도 만족스러웠지만, 나는 아직 실력을 다 보여 준 것이 아니었다.
내 몸속 깊은 곳에는 깨우지 않은 마나가 웅크리고 있었다.
마나까지 보여 준다면 기사단장이 훨씬 더 놀라겠지만, 마나는 이런 대련에서 보여 줄 것이 아니었다.
마나는 '내 숨겨진 칼'이었다.
내 실력을 확인한 기사단장이 본론을 꺼냈다.
"이 정도면 걱정할 필요가 없군요."
역시 괜히 실력을 확인한 게 아니었다.
"공작님의 지시입니다."
공작의 지시라. 도대체 뭘 시키려는 거지?
누운 채로 듣고 싶었지만, 기사단장은 더 말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았다.
일어나라는 이야기였다.
끙. 꼰대 아재.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앞에 서자, 기사단장이 말을 이었다.
"오늘 시몬 공자님의 약혼자가 오셨습니다."
어라, 시작부터 뜬금없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에로 후작가의 따님이십니다. 공식적으로 방문한 것이 아니니 소란스러운 경호가 힘듭니다."
어, 뭔가 불길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설마 아니겠지?
"시몬 공자님이 바쁘셔서 옆에 계시기 힘드니 그분이 공작가에 머무시는 동안 경호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불길한 예상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거절할 수는 없는 걸까?
"다행히 그분도 기쁘게 허락하셨습니다."
아까 만났던 소녀가 떠올랐다. 목검을 눈앞에서 까닥거리던 소녀. 대련하자던 그녀의 말이 떠올랐다.
"내일부터 경호하시면 됩니다. 평범한 친구처럼 같이 다니시면 됩니다."
친구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거기다 시동생에게 경호를 부탁하는 법이 어디 있어. 분명 시몬 형이 알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속으로 욕을 퍼부었지만, 입 밖으로는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