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제10편 다른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2)
"훈련을 받고 싶습니다!"
6살짜리 꼬맹이가 갑자기 나타나 이런 소리를 하면 기사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것도 자신이 소속된 공작 가문의 서자가.
그 결과가 눈앞에 서 있었다. 미겔 기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는 표정이었지만, 주변에 있던 기사들은 모두 나와 기사 미겔을 외면했다.
어리벙벙한 미겔의 모습을 보며 난 속으로 웃었다. 역시 미겔은 다른 기사와 다르게 순진했다.
"나이도 아직 어리시고, 단장님이나 다른 사람의 허락도 받아야 하고……."
그는 우물쭈물 대답했지만, 이쪽은 이미 준비하고 있었다.
"미리 기사단장님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내 말에 미겔은 한층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순진하고 착한 기사였지만, 주위 상황을 모르지는 않았다.
나는 저번 삶에서처럼 공작의 기대를 받고 있는 아들이 아니라 관심이 끊어진 서자일 뿐이었다.
그가 내 훈련을 담당하게 되면 기사로서의 그의 장래는 어느 정도 불투명해질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못 본 척하는 다른 기사들에게는 부탁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휴, 단장님께 허락을 받았다면 어쩔 수 없죠."
사실 기사단장이 허락한 내용은 담당할 기사의 허락을 받아야만 훈련을 하게 해 주겠다는 조건부 허락이었지만.
이런 이야기는 당사자에게 해 줄 필요가 없겠지.
"나이가 너무 어리신데……. 그래도 상속 능력이 있으시니 종자들이 받는 기초 훈련부터 시작하죠."
나는 묵묵히 훈련을 받았다.
힘든 달리기와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검 휘두르기.
전에 했던 것이었지만, 힘든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만큼 능히 견뎌 낼 수 있는 고통이었다.
실력이 쑥쑥 성장했다.
처음에는 내 훈련을 외면하던 사람들이 점차 힐끔거리며 쳐다봤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평범한 인간 이상의 성장을 보였던 저번의 삶과 달리, 지금은 성실하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기사 후보생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혹시 기사가 되실 생각은 없습니까? 이대로 계속하시면 정말 뛰어난 기사가 되실 것 같은데."
미겔도 빠르게 성장하는 내 모습에 기뻐했다.
하지만, 나는 내 모든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서의 훈련은 하루에 하는 훈련의 반도 되지 않았다.
방에 돌아온 뒤에도 계속 훈련했다.
방도 크고 전생에 배웠던 실내 운동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기에 근육을 혹사할 정도로 충분히 훈련을 이어 갈 수 있었다.
헉. 헉.
그렇게 방 안에서 땀범벅이 되도록 훈련을 마친 뒤.
"자, 그럼 다음 단계로 가 볼까."
문 옆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졸고 있던 플로라를 불렀다.
"플로라!"
"네?"
갑작스러운 부름에 플로라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내가 불렀다는 것을 알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운동을 끝내신 건가요? 너무 심하게 하지 마세요. 아직 어리시니까요."
존 게 민망했던지, 그녀는 허리에 손을 얹으며 걱정스러운 한마디를 던졌다.
하지만, 나는 의자를 빤히 쳐다봤고, 그녀는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입을 뻐끔거렸다.
장난은 여기까지. 나는 용건을 꺼냈다.
"아무래도 이 방에서 자기는 어렵겠어. 오늘은 손님방에서 자야 할 것 같아."
내 말에 플로라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바닥 곳곳에 물기가 흥건했고, 훈련 덕분에 물건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하아, 오늘은 꽤 어지럽히셨네요. 알겠습니다."
다른 때보다 훨씬 어질러진 모습에 그녀는 잘 곳을 준비하러 방을 나섰다.
다행히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은 전보다 훨씬 방이 어질러졌다는 것과, 그렇게 방이 어질러졌는데 졸 수 있었다는 것을.
그날부터 나는 훈련을 핑계로 자는 방을 계속 옮겼다.
저택에 있는 손님방들과 빈방으로 계속 옮겨 다녔고, 플로라와 하녀들은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불만이 쌓여 갔다.
"훈련한다고 몸이 안 좋은 거니? 그렇게 이 방 저 방 옮겨 다닐 거면 엄마 방에서 같이 자렴."
다과 시간에 어머니도 걱정해 주셨지만, 난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와 같이 자다니 절대 그럴 수는 없었다.
계속 자는 곳을 바꾸자 저택에 소문이 퍼졌다. 각성한 서자가 밤마다 이상한 행동을 한다는 소문이었다.
각성의 여파로 정신이 이상해졌다. 몽유병이 생겼다. 밤마다 오줌을 싸는 버릇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더구나 자는 곳을 알려 주는 하녀도 매일 달라진다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비어 있던 저택의 손님방 한 곳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밖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고, 방 안도 등불이 꺼져 무척이나 깜깜했다.
끼이익.
창이 작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복면을 쓴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두운 방 안이었지만, 그는 방 안의 모습이 잘 보이는 것 같았다.
주위를 둘러본 복면인은 발소리도 내지 않고 침대를 향해 나아갔다.
이불이 덮여 있는 침대는 가운데가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튀어나온 이불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이불을 젖혔다.
척.
이불이 젖혀진 침대 위에는 베개와 둘둘 말린 다른 이불이 놓여 있었다.
그는 지그시 이불을 노려보다가 피식 웃었다.
"머리가 좋군. 거기 숨어 있었나?"
그는 허리에서 검을 뽑아 둘둘 말린 이불 옆에 꽂았다.
푹!
그 순간.
"윽!"
낮은 비명과 함께 침대 밑에서 작은 인영이 튀어나왔다.
어린아이. 바로 침대 밑에 숨어 있던 나였다.
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힐끗 보니 입고 있던 잠옷 바지는 찢어져 있었고, 다리에 구멍이 뚫려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걸 피했어? 대단한데?"
피가 묻은 검을 침대에서 뽑아 들고, 복면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숨도 멈췄는데……. 어떻게 알았지?"
"숨을 멈췄다고 기척이 숨겨질까."
피식 웃는 모습이 복면 위로도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웃음은 곧바로 사라졌다.
"조금 전 행동이나 고통을 참는 것을 보니 겉보기처럼 애 취급을 하면 안 되겠어."
'아니, 애 취급을 받아도 되는데요.'
나는 등 뒤로 숨긴 검을 꼭 쥐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그는 다리에 피를 흘리는 내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밤마다 방을 바꾸는 것도 그렇고, 침대 밑에 숨어 잠을 자는 것까지……. 어떻게 내가 온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지?"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나이에 맞게 행동할 상황이 아니었다. 고통 때문에 그런 걸 신경 쓰기도 힘들었다.
암살자가 오리라는 것은 '자동 저장 시점' 문구가 뜨지 않는 것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훈련은 기사단과 같이 연무장에서 받았으니, 저번 삶처럼 연무장에서 습격을 받을 리도 없었다.
낮 동안은 공작 저택 안에서 습격을 받을 리도 없을 테니, 내가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암살자가 밤에 내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밤에 찾아오는 암살자를 피하려고 전생에 TV에서 보았던 것처럼 열심히 방을 옮겨 다녔는데, 암살자는 결국 찾아왔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암살자에게 해 줄 필요는 없었다.
"그럼, 누구 지시로 날 죽이려는지 묻는다면 대답할 거야?"
내 반문에 암살자의 눈이 휘어졌다.
"재미있는 아이로군. 시간이 좀 있었으면 같이 놀아도 좋았을 텐데."
그 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묶이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전에 죽었을 때 느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그때는 죽기 직전 운이 좋게도 풀려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몸속에 숨겨진 힘을 일깨우기 시작했다.
죽기 전에 느꼈던 힘. 분명 각성 능력에는 없었던 마나라는 힘.
두 달의 시간 동안, 난 육체의 힘을 늘리는 것만큼 이 마나라는 힘을 일깨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직 어린 만큼 짧은 시간에 대단한 성취를 이룰 순 없었지만, 원하는 수준의 능력은 일깨울 수 있었다.
쩌쩍.
첫 번째로는 몸을 감싼 암살자의 힘을 깨 버릴 수 있을 정도로.
"그걸 깨?"
암살자의 눈이 커지는 순간, 난 뒤로 숨긴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휘이익.
암살자가 번개같이 달려왔고, 나는 손에 들린 검을 내던졌다.
정면이 아닌, 창문 쪽으로.
쨍그랑!
창문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검이 창문 밖으로 쏘아져 나갔다.
쐐애액!
마나가 실린 검은 아이가 던진 것 같지 않게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갈랐다.
그와 동시에 어느새 다가온 암살자의 검이 내 가슴을 찔렀다.
까아앙!
가슴에서 불꽃이 튀고, 난 뒤로 튕겨 나갔다.
"막았어?"
암살자는 당황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쳐다보았다. 검이 깨져 반만 남아 있었다.
쿨럭.
벽에 부딪힌 난 입에서 피를 쏟았다.
제길. 영화처럼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영화에서는 가슴에 몰래 숨긴 쟁반이 적의 총알도 막아 내던데.
잠옷 속에 보호구를 입고 철판까지 안에다 넣었는데, 이런 치명상에 가까운 상처라니.
어린아이의 몸이라지만, 그동안의 훈련이 무색했다. 더구나, 암살자는 마나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반만 남은 암살자의 검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나였다. 보통 검으로 이렇게 되었는데, 저걸 막기는 무리일 듯싶었다.
"그냥 놔두면 안 될까. 어차피 죽을 것 같은데."
난 입에서 피를 쏟으며 그에게 중얼거렸다.
"너, 6살 맞냐?"
그는 황당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다가오는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확인 사살이다."
젠장, 성실하기도 하셔라.
농담이 아니었다. 신관도 치료하기 힘든 상처였다. 검에 뚫리는 것은 막았지만, 어린아이의 몸속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빨리 도망쳐야 할 텐데……."
부서진 창과 쏘아진 검 덕분에 밖은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적이다!"
"당장 수색해!"
저택의 방들은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했고, 경비를 서던 병사와 기사들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칠 시간은 충분해."
암살자는 여유로웠다. 하지만, 나도 그를 비웃어 줄 수 있었다.
"과연 그럴까."
내가 왜 손님방을 고집했을까.
바로 공작의 서재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근래 업무가 늘어나 서재에서 밤을 새우는 공작이니만큼, 이런 소란을 눈치 못 챘을 리가 없었다.
콰아아아앙!
멀리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파파팍!
그리고 누군가 복도를 질주했다. 소리는 순식간에 문 앞까지 다가왔다.
콰앙!
그리고 문이 터져 나갔다.
"젠장!"
암살자는 반만 남은 검을 내던진 뒤, 창문을 향해 재빨리 몸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공작이 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빠르게 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내가 벽에 기댄 모습을 보며 몸을 움찔했다.
그는 내 쪽으로 한 발 다가왔지만, 내 모습을 보고 발을 멈추었다.
피바다 속에 벽에 기대어 앉은 어린 아들. 아들의 왼쪽 가슴은 움푹 들어가 있었고, 오른쪽 가슴에는 검이 박혀 있었다.
아들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작의 얼굴은 항상 보았던, 표정 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회한, 안쓰러움. 안타까움. 어두움. 갈등.
여러 감정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더니, 그는 결국 고개를 돌렸다.
"암살자다! 알렉스가 당했다!"
엄청나게 큰 고함을 지른 그는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고, 창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창밖을 나서자, 나는 다시 한번 피를 토했다.
"쿨럭, 아무리 그래도 아들인데 살릴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그냥 가는 건가?"
마지막에 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도 앞으로 그를 용서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까악! 공자님!"
뒤이어 잠옷만 걸친 플로라가 뛰어들어 왔다.
그녀는 나를 보며 비명을 질렀고.
"신관! 마님! 아니, 어떻게."
나는 허둥지둥하는 그녀를 불렀다. 의사를 불러도 신관을 불러도 나을 상처가 아니었다. 숨이 넘어가기 전에 그녀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내가 여기서 잔다는 것을 누, 누구한테 말했지?"
방을 계속 옮긴 덕분에 어린 시절처럼 다시 숙직 하녀가 옆방에서 자게 되었다.
나는 자는 곳을 숙직 하녀에게만 말해 두었고, 내가 그날 자는 곳은 숙직 하녀만 알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암살자가 찾아오게 될 때 누가 발설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 담당은 플로라였다.
설마 그녀가?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저번에 죽었을 때 나는 그녀가 검에 찔리는 광경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었다.
만약, 저번 삶에 플로라가 검에 찔려 죽지 않았다면 지금 그녀를 의심했을지도 몰랐다.
내 질문에 그녀는 마구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말하지 말아요. 나을 수 있어요."
엉뚱한 소리를 하는 그녀에게 나는 고함을 질렀다.
"당장 말해!"
핼쑥한 표정으로 그녀는 떠듬떠듬 대답했다.
"아, 저, 엘레나 님이 여쭤봐서……."
말을 하다 말고 그녀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설…… 설마, 말도 안 돼."
젠장, 누나라고?
나도 믿을 수 없었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졌다.
플로라의 고함이 점점 작아졌고, 마지막 순간.
툭.
복면인의 잘린 머리가 내 앞에 던져졌다.
복면인의 잘린 머리 뒤로 공작이 보였다.
아쉽게도 무슨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시야가 깜깜해졌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눈을 뜨니 무표정한 공작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 번째 맞이하는 각성일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여러 얼굴들이 내 눈앞을 지나갔고, 나의 누나.
엘레나가 보였다.
누이한테 말했다고?
난 그녀 옆에 서 있는 여성을 바라보았다.
둘째 공작부인.
마리아 데 그레시아가 미소를 띤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