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제9편 다른 길을 걸어 보았습니다 (1)
"멈춰!"
미겔은 순식간에 연무장을 가로질러 복면인에게 달려들었다.
다행히 복면인은 나보다 미겔을 우선으로 생각한 듯했다.
미겔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몸을 돌린 복면인의 팔도 휘둘러졌다.
캉!
검이 튕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큭."
미겔의 신음이 들려왔다.
복면인은 그 자리에 서 있었지만, 달려들었던 미겔은 어느새 뒤로 밀려나 있었다.
미겔이 들고 있는 것은 공작가 기사단의 장검. 복면인의 손에는 짧은 단검이 들려 있었다.
긴 장검과 단검. 달려들었던 미겔과 그 자리에서 방어했던 복면인.
하지만 신음을 흘린 것도, 뒤로 밀려난 것도 미겔 쪽이었다.
'젠장, 기사도 도움이 안 되는 거야?'
암살자 따위가 너무 강했다.
"바로 사람들이 달려올 거다."
"약하군. 시간은 충분해."
그 말과 함께, 이번에는 복면인이 미겔에게 달려들었다.
갑옷을 입은 미겔이 피하기에는 불가능한 빠른 속도였다.
미겔은 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검을 휘두른 자리에는 복면인이 보이지 않았다.
복면인은 미겔의 뒤에 나타났다.
내 눈에는 마치 공간 이동을 한 것처럼 보였다. 미겔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순간적으로 복면인을 놓쳤고, 다음 순간.
서걱.
미겔의 목이 하늘로 치솟았다.
'맙소사!'
미겔이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난 황당한 광경에 그만 얼이 빠지고 말았다.
아쉽게도 놀랄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커억, 커억."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는 내 앞에 복면인이 다가왔다.
그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마지막 순간, 멀리서 고함이 들려왔지만 이미 너무 늦은 발걸음이었다.
어둠이 찾아왔다.
[사망하셨습니다. 자동 저장 시점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 * *
다시 밝아진 시야.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연무장이 아니라 가족묘 내부였다.
눈앞에 공작이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돌아온 건가.'
내가 각성한 바로 그날로.
방금까지의 고통 때문일까.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공작이 입을 열었다.
"각성했군."
그때처럼 공작은 바로 내 각성을 선포했다.
"헉."
"말도 안 돼."
전에는 듣지 못한 사람들의 앓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시 한번 주변을 돌아보았다.
사람들의 모습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
놀라고, 분노하고, 감탄하고, 시샘하는 사람들.
하지만, 내 마음은 달랐다.
'너무 설쳤어.'
날 죽이려는 자가 있는데 능력에 취해 너무 튀어 버렸다. 각성한 뒤에는 조심하기로 그렇게 다짐했었는데.
당장이라도 범인을 찾고 싶었지만, 아직 어린 내 나이와 실력이 발목을 잡고 있었다.
아직은 더 숙이고, 더 숨어 있어야 했다.
"그래, 무슨 능력을 상속받은 거지?"
공작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과 똑같은 대답을 해서는 안 되었다.
공작의 눈을 피해야 했다.
"몸이 튼튼해지는 능력 같은데, 잘 모르겠는데요."
공작의 눈살이 조금 찌푸려졌다.
어리바리한 내 대답이 마음에 안 든 것이 분명했다.
"육체 계열일까요? 용사 카를로스 님의 능력 가운데 비슷한 능력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 확인해 보면 알겠지."
전과 다른 대답 덕분일까? 공작의 반응이 전과 달랐다.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사며 각성식은 끝이 났고, 다음 날 난 미겔 기사와 함께 연무장에 서게 되었다.
알렉스 기사단장이 함께한 자리도 아니었고, 저택 뒤쪽 숲에 있는 공작 일가의 연무장도 아니었다.
기사단이 쓰는 거대한 연무장 한쪽에서 미겔 기사에게 테스트를 받게 된 것이다.
연무장에 나와서 훈련을 받던 기사들과 그의 종자들이 나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기사단장님의 지시로 공자님을 테스트할 생각입니다.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알렉스 기사단장은 나오지 않았지만, 테스트는 전과 다르지 않았다.
쓰러질 때까지 계속된 달리기와 이어진 검 휘두르기.
처음에 내 훈련을 훔쳐보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자 점차 관심을 잃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일까. 똑똑하다고 알려진 어린 공자의 실력이 소문만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나이대의 아이들치고는 열심히 하는 것 같았지만, 자신들이 어렸을 때도 그만큼은 했었기 때문이다.
나는 온몸에 먼지와 땀범벅이 되어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휴, 레벨업 전에 멈추면 대충 이 정도군.'
레벨업이 되지 않게 아슬아슬하게 훈련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린 몸이라 쉽게 지쳤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튼튼하거나 컸으면 지치기 전에 레벨업을 했을 게 분명했다.
"지구력도, 성장 속도도 확연히 구별되는 능력은 아닌 것 같군요. 그 나이대에서는 나름 뛰어나 보이지만……."
미겔도 조금은 실망한 눈치였다. 걱정했는데 다들 눈치를 못 채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혹시 다른 곳에서 검술을 배우셨습니까? 검이 지나가는 길이 깔끔하군요."
하지만, 손에 익은 검 솜씨는 들키고 말았다.
한 달 동안 받은 훈련은 되살아나서도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각성일에 받은 상속 능력을 알아보는 시간이었다. 미겔 기사는 검술에 대한 것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저는 기사단장님께 보고할 테니 돌아가서 쉬십시오."
말을 마치고 미겔은 몸을 돌렸다.
기사단장뿐만 아니라 공작도 보이지 않았고, 미겔도 실망한 표정이었으니 이번에는 공작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암살의 위협에서도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플로라가 다가오려는 것을 멈춰 세우고 나는 검을 좀 더 휘둘렀다.
내려치기와 휘두르기.
최선을 다해 십여 차례 검을 휘두르자, 힘이 사지로 뻗어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육체가 강화되고 성장하는 느낌. 바로 레벨업이었다.
지금 내 몸속을 돌아다니는 힘. 얼마 전 복면인에게 죽기 직전에 느꼈던 바로 그 힘이었다.
나는 그 힘을 뽑아 검에 밀어 넣었다.
우우웅.
검에 무언가 보이지 않는 막이 씌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팟.
바닥에 선을 긋자, 모래 먼지와 함께 깊게 금이 그어졌다.
검을 휘두른 범위보다 더 길게 이어진 금. 바로 검에 둘린 막이 해낸 것이다.
"이게 마나인가……."
나는 목검을 살펴보았다.
마나가 맞나? 분명 내 상속 능력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는 능력이었는데…….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마나뿐이었다.
도대체 내 상속 능력은 무슨 비밀을 가지고 있는 거지?
뇌리에서 전 회차에 보았던 공작의 눈이 떠올랐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길이었다.
* * *
미겔 기사의 실망한 표정대로, 나는 공작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기사단장은 물론이고, 미겔 기사도 찾아오지 않았고 과도한 훈련도 없었다.
평범한 6살짜리 아이의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뭐, 그동안 천재로 소문난 덕분에 평범한 어린이로 보기에는 애매했었지만.
일주일에 두 번 서기관들에게 수업을 받고, 나머지 시간은 거대한 서재에서 책을 보며 지내는 생활.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나는 최대한 조용히 있었다. 테스트 이후 검술 훈련도 받지 않았고, 죽을 때 느꼈던 마나를 연습하지도 않았다.
훈련을 받았던 기억 덕분인지 신기하게도 무척이나 좀이 쑤셨지만, 꾹 참고 서재와 내 방만 오가며 서기관에게 받는 수업에만 참가했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시간을 보내자, 내 각성으로 놀랐던 사람들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첫째 형은 전처럼 나를 무시했고, 둘째 도련님은 슬슬 날 놀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복도에서 마주친 누나는.
"괜찮아? 어디 아픈 건 아니지?"
귀여운 표정을 하고는 날 걱정해 주었다.
7살짜리 꼬마 숙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걱정해 주는 모습은 전생에 텔레비전 광고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왜요? 제가 아프대요?"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막 이야기했어."
"엘레나 님!"
그녀의 말에 같이 따라왔던 하녀가 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 실수했다. 이런 거 말하면 안 되는 거지? 혼나겠네."
귀족 가문의 딸 역시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다. 물론 나 같은 서자가 아니라서 무시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몸이 아픈 게 아니야? 그럼 마음이 아픈 건가?"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와 내 머리에 손을 올렸다.
"마음이 아픈 건 내가 치료해 줄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엘레나의 손이 은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상속 능력이 발휘된 것이다.
"빨리 나아라. 아프지 마라. 무서운 귀신도 떠나가고, 예쁜 마음만 가득해져라!"
뭔가 전생의 굿에서나 들을 법한 말과 함께 머릿속으로 따사로운 기운이 스며들어 왔다.
신관들의 성법과 다른 그녀의 상속 능력은 '큐어'였다.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멘탈이 무너진 사람, 적에게 세뇌를 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는 능력. 그녀의 어머니 쪽 가문에서 물려받은 능력이었다.
아직 세뇌당한 것을 해결해 줄 능력까지는 안 되지만, 마음이 풀어지고 가슴을 따스하게 해 주기에는 충분했다.
다른 형제들과 달리 엘레나와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은 그녀의 착한 마음 덕이기도 했지만, 그녀가 받은 상속 능력의 비중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제 괜찮지?"
"……네."
기껏 능력을 써 주었는데 그 전에도 멀쩡했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응. 잘됐다. 맞아. 나도 능력을 써 주었으니까 알렉스도 능력을 보여 줘. 어머니도 보고 싶다고 하시니까 빨리 놀러 와."
당장이라도 같이 가자는 듯이 말했지만,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늦었습니다. 선생님이 기다리십니다."
"힝. 오늘은 빠지면 안 돼? 춤 연습 힘들단 말이야."
"안 됩니다."
이제 7살인데, 벌써 춤 연습이라니. '큐어'라는 좋은 능력을 지닌 공작가 딸의 몸값을 올리기 위한 준비일까.
잠깐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오늘은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오늘은 각성일로부터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저번 삶에서 복면인의 손에 죽었던 날.
이제 곧 내가 죽었던 시간이 도래할 터였다.
나는 방 안에 앉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을 기다렸다.
위기가 지나가 [자동 저장]이 되었다는 문구.
하지만, 오후가 지나고 해가 질 때까지 눈앞에는 아무런 문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계속 기다렸다. 밤늦게까지, 그리고 다음 날에도.
하지만,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위기가 안 지나간 거겠지?'
역시 암살자가 나를 죽일 수 없게 되지 않는 한, 메시지는 안 뜨는 모양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기껏 몸을 바닥까지 숙이고 있었는데, 효과가 별로였다.
그렇게 한숨을 내쉬고 있으니, 바로 앞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렉스, 왜 그러니?"
정신을 차리니 아름다운 귀부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리아 데 그레시아. 공작의 둘째 부인. 공식적으로 내 작은어머니였다. 물론, 어머니라고 부를 일은 없겠지만.
"알렉스, 정말 이상해요. 지금도 어른처럼 한숨을 내쉬잖아요."
마리아 옆에 앉아 있던 엘레나가 이때다 하고 내 흉을 봤다.
좀 더 큰 여성이 그랬다면 화가 났을지도 모르지만, 아직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 어린 소녀가 의자에 앉아서 하는 말에는 그저 미소만 지어질 뿐이었다.
"저거 봐요. 웃는 것도 이상해요."
음. 웃는 연기가 실패했군.
공작부인은 뾰로통하게 말하는 딸과 난감해하는 나를 보며 작게 웃을 뿐이었다.
나는 어제 엘레나가 일방적으로 정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공작의 둘째 부인과 만나는 중이었다.
장소는 공작부인의 개인 응접실. 그녀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수수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이었다.
마리아는 지금처럼 가끔 엘레나를 통해 나를 초대했다.
앞에 간식을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평범한 다과회였지만, 그녀와 어린 누나의 다정한 행동 덕분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뭐, 공작부인의 입장에서는 그저 어린아이들의 재롱을 보고 싶은 마음일 테지만, 나를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첫째 공작부인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었다.
흠. 그러고 보니 이것도 상속 능력 덕분이려나. 그런데 엘레나의 능력은 직접 발동해야 하는 액티브형 능력일 텐데.
뭐, 상속 능력이든 성격 덕분이든 나쁜 것은 없었다.
위기가 사라지지 않아 머릿속이 복잡한 지금, 이렇게 아늑한 분위기에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공작부인들의 능력은 뭘까?'
누나도, 작은 꼬맹이 형도 각각 자기 어머니 일가의 능력을 상속했는데. 공작부인들의 능력은 딱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결국, 위기를 피해 가는 것에 실패했으니 이제는 날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해야 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검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