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제6편 각성했습니다 (2)
뭔가 찝찝하게 여겨졌던 공작의 표정과 달리 그 뒤의 시간은 별다른 것 없이 지나갔다.
시몬과 브리비아 공작부인의 건조한 축하의 말과 마누엘 꼬맹이의 무시, 그리고 제대로 칭찬해 준 누이와 둘째 공작부인.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축하 인사를 하는 총집사와 저택의 고용인들까지.
"너무 서운해하지 마렴. 능력을 각성한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한 거란다."
방에 돌아와 어머니가 꼭 껴안으며 위로해 주었지만, 난 딱히 위로가 필요 없었다.
오히려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아예 각성을 못 한 것보다 더 좋을 수 있어.'
안전이 중요하다지만 이런 시대에 평민으로 내쫓기는 것은 앞으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형제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수준의 애매한 능력이라면 안전을 도모하면서도 앞날에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뭐, 까놓고 말해 각성을 해 버려서 어쩔 수 없이 '정신승리'를 하는 중이지만.'
애매한 능력도 상속 능력은 상속 능력이었다.
공작의 보호가 끝난 지금, 다시 위험이 덮쳐 올지도 몰랐다.
'풀어져선 안 돼. 긴장해야 해. 긴장.'
어머니께 인사를 드린 뒤, 방에 돌아온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거나 공작가에 남게 되었으니, 이제 다시 긴장의 시간이 시작될 터였다.
'이제, 목표는 분가! 천재 코스프레는 던져 버리고 대충 쓸모 있는 놈으로 변하는 거다!'
그런 다짐을 하는 사이,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플로라인가?'
"들어와."
하지만, 예상과 달리 문을 연 사람은 나이가 지긋한 여성인 하녀장이었다.
"내일 아침 일찍, 저택 뒤쪽 연무장으로 나오시랍니다."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입을 열었다.
"연무장 맞나요?"
"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웬 연무장이지?
나는 다시 물었다.
"누가 지시한 거죠?"
"총집사님이십니다."
총집사라…….
그가 나에게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공작이 지시를 내렸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연무장에서 나오라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기사를 만나라는 거겠지?"
"네, 알론소 기사단장님을 뵈라고 하셨습니다."
하녀장의 말에 나는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기사단장은 꽤 껄끄러운데…….'
알론소 기사단장.
다른 기사와 달리 그는 평민으로서 능력을 각성한 단승 귀족이었고, 서자인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리 서자라도 공작의 자식인데, 그는 복도에서 스쳐 지나갈 때 나를 못 본 척 무시하곤 했다.
공작의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고, 나도 확인해 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각성한 능력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다음 날 아침.
난 플로라의 뒤를 따라 저택 뒤쪽 연무장으로 향했다.
물론 위치를 알고 있었지만, 이제 막 6살이 된 아이를 홀로 돌아다니게 할 리가 없었다.
연무장은 저택 뒤쪽에 난 샛길로 조금 걸어가야 했다.
나무에 둘러싸인 자그마한 연무장에는 두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능력을 남에게 보여 주기 싫어하는 귀족들이 사용하는 사적인 연무장.
아버지인 공작과 배다른 형들이 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오늘은 공작도 보이지 않았고, 배다른 형제들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텅 빈 연무장 중앙에 두 명의 기사가 나와 있었다. 중년의 기사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기사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기사는 날 좋아하지 않는 알론스 기사단장이었고, 젊어 보이는 기사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누구지?'
그런 의문을 마음속에 묻어 둔 채 난 기사단장 앞에 서서 인사를 했다.
몸을 곧게 세우고,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귀족이 신뢰하는 자에게 하는 인사.
"알렉스입니다."
예의가 바르지만, 귀족적인 인사에 기사단장과 젊은 기사가 몸을 움찔거렸다.
막 여섯 살이 된 아이가 할 만한 인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사단장 알론소…… 입니다."
기사단장의 조금 늘어진 대답이 돌아왔다.
"공작님의 지시로 알렉스…… 공자님의 능력을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역시, 존대하는 게 무척이나 껄끄러운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이 기사단장과는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도 제대로 된 내 인사 덕분에 얕잡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상대에 대한 존중은 말로 시작하는 법.
조금 거리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나도 그리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으니 얕잡아 보이지 않게 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예상대로 각성 능력을 확인할 모양이었다.
공작의 얼굴이 꽤 무서웠는데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내 앞에 서 있는 꼬장꼬장한 기사를 상대해야 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 질문에 기사단장은 목검 하나를 건네주었다.
내 몸의 크기에 맞게 줄인 목검. 이곳저곳에 있는 흔적으로 보아하니 새로 만든 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쓰던 물건 같았다. 시몬이나 마누엘이 썼던 검인가?
'설마 이곳에서도 물려받기인가.'
뭔가 한심한 생각이 언뜻 지나간 뒤 난 검을 잡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전생 때에는 검을 든 적도, 검도 학원에 다닌 적도 없으니 검을 잡자마자 뭔가 느껴질 리가 없었다.
내가 대충 검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기사단장이 입을 열었다.
"기본기가 아예 없으니 우선 기본 훈련부터 시작합니다. 미겔!"
"넵!"
'아니, 그렇게 표 나게 말할 필요가 없는데. 처음 검을 잡는데 기본기가 있을 리 없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는 동안, 기사단장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젊은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정기사 미겔입니다."
두꺼운 팔을 가진, 순해 보이는 기사였다. 다행이었다. 일부러 사람을 골릴 만한 기사는 아닌 듯했다.
기사단장은 옆으로 물러서서 팔짱을 끼고 훈련을 지켜보았다. 직접 훈련하는 대신 옆에서 지켜볼 모양이었다.
"오늘 하루 동안 수습 기사 훈련 과정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체력과 몸 상태에 따라 진도를 조정할 테니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늘 하루뿐이었다. 나도 상속 능력이 궁금한 만큼 최선을 다해 볼 생각이었다.
"그럼, 우선 달려 볼까요? 이 연무장은 작은 편이니까 50바퀴만 돕시다."
50바퀴? 잘못 들었나?
기사의 말에 입이 딱 벌어졌다.
기사들이 사용하는 연무장과 비교하면 많이 차이 나지만, 그래도 연무장이었다. 연무장 한 바퀴면 100m가 넘었다. 50바퀴라니. 5㎞였다.
운동도 안 한 6살짜리한테 5㎞를 뛰라니 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설마 네가 암살자냐?
"우선 달리십시오.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리면 됩니다. 치유 성액도 준비해 놓았으니, 몸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한계를 시험할 모양이었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준비했으면 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을 쥐고 뛰십시오. 검을 놓치면 처음부터 다시 뛰겠습니다."
기사의 말에 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운동 좀 해 놓는 건데.'
난 젊은 기사의 호통을 들으며 이를 악물고 계속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또 달려서 32바퀴째.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끈기는 있군."
정신이 들자, 귓가로 뜻밖의 음성이 들려왔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음성이었다.
차갑고 딱딱한 목소리. 공작의 음성이었다.
"확실히 능력을 얻으신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훈련을 받지 않은 평범한 6살 아이의 지구력은 아닙니다."
이번에는 기사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사단장과 공작이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설마 내가 저택에 실려 온 건가?
하지만, 코 위로 숲의 내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바닥에 닿은 등과 팔다리도 오돌오돌한 흙바닥이 느껴졌고.
내가 있는 곳은 기절했던 바로 그 연무장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지구력이 아니다라…….
역시 그건가?
달리는 중간에 힘들어서 포기하려던 순간이 있었다. 하늘이 노랗게 변하고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위액이 올라올 때였다.
바로 그때, 몸속 깊은 곳에서 힘이 솟구쳤다.
조금 전 달릴 때는 전생에 들었던 '러너스 하이'라고 생각했는데…….
죽을 정도로 운동하면 마약 비슷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힘이 솟구친다는 생리현상 말이다.
그게 아니었나? 하기야 전생에 들어 왔던 '러너스 하이'와는 느낌이 달랐다.
피로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힘든 것이 조금 덜해진 것 같은 느낌? 혹은 내 한계가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아무튼 그 느낌 덕분에 나는 한계를 넘어 달릴 수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결국 기절하고 말았지만.
"이제 정신을 차린 모양입니다. 회복력도 나쁘지 않습니다. 능력 자체는 확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능력으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기사단장의 말에 공작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발소리가 들렸다.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꽤 떨어진 곳에 서 있는 기사단장과 저택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공작의 등이 보였다.
그 상속 능력이란 것이 귀도 좋아지게 하는 걸까?
기사단장이 있는 곳은 내가 누워 있는 곳과 꽤 멀었다.
내게 무릎베개를 해 주던 플로라도 옆에 서 있던 젊은 기사 미겔도 둘의 대화를 못 들은 것 같았다.
난 떠나가는 공작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으세요? 더 누워 계셔요. 후유증이 있을지 몰라요. 사람을 부르려고 했는데……."
플로라가 더 이야기하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공작이 찾아왔으니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 수 있었을까. 그저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을 것이다.
"괜찮아."
정말 괜찮았다. 어디 아픈 곳도 없었고, 정신도 멀쩡했다.
갑자기 과격하게 쓴 근육들이 당기기는 했지만, 기절했다가 깨어난 것치고는 이상하게 멀쩡했다.
하지만, 멀쩡한 내 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공작이 이곳을 찾아오다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지나가는 길이었나? 아니면 잠깐의 변덕일까?
그럴 리가 없었다. 공작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그동안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뭔가 있었다. 이 테스트가. 별것 아닌 내 각성이.
뭔가 공작이 눈여겨보게 하는 이유가 있었다.
"후유증도 없는 것 같고. 더 훈련받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일어난 나에게 다가온 기사단장이 더 할지 물어보았다.
공작이 찾아왔기 때문인지, 처음보다 기사단장의 표정이 괜찮았다. 플로라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더 받겠습니다."
공작이 찾아온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공작이 알려 줄 것 같지 않으니 나 스스로 이유를 알아내야 했다.
그리고 다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작은 기대가 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다.
나는 내 손에 쥐게 된 무기가 뭔지 확실하게 알아 두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젊은 기사 미겔이 다시 내 앞에 섰다.
"원래는 계속 육체 단련을 이어 가는 게 맞지만, 지금은 능력 확인이 우선이니 검술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아쉽게도 뭔가 대단한 검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었다.
아래로 내려치기가 계속 이어졌고, 근육이 덜덜 떨리기 시작하자 이번에는 좌우로 휘두르게 했다.
한참 동안 훈련을 지켜보다가 기사단장이 자리를 비웠다. 나머지 테스트도 확인이 끝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훈련은 끝이 아니었다.
난 플로라가 싸 온 도시락을 먹은 뒤, 오후 내내 검술 훈련을 받았다.
나중에 가서는 팔에 힘이 빠져서 검술 훈련인지 춤추는 건지 알기 힘들어졌지만.
해가 저택 뒤 숲 너머로 넘어갈 무렵, 훈련은 끝이 났다.
이번에는 기절하지 않았지만, 난 차라리 기절하게 해 달라고 빌 정도로 힘들었다.
이 정도까지 계속한 나도 무식했지만, 막 6살이 된 아이를 종일 굴리는 기사는 무식해도 너무 무식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능력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오늘은 근육을 무리하게 사용했으니, 하녀들에게 마사지를 받고 하루 이상 푹 쉬십시오."
젊은 기사 미겔은 지쳐 누워 있는 나에게 인사를 한 뒤에 연무장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