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제5편 각성했습니다 (1)
난 속으로 한숨을 내쉰 뒤, 공작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역시 고귀한 귀족. 공작부인이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보이지 않을 듯이 고개를 까닥이는 공작부인의 모습을 확인한 뒤, 난 그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을 한 두 소년을 지나, 어린 소녀와 한 여성이 서 있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누나와 두 번째 공작부인이었다.
엘레나 데 그레시아.
귀여운 누나는 나를 보자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저 괘씸한 두 형제와 달리 나름 나와 친한, 한 살 터울의 누나.
물론 저쪽은 어머니가 자작에 불과했지만, 제대로 된 귀족이었다.
당연히 그녀는 나와 달리 공작의 제대로 된 딸이었지만, 그녀의 어머니 덕분인지 아직은 그럭저럭 나와 잘 지내고 있었다.
나는 소녀 뒤에 서 있는 여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 인사에 미소를 지으며 웃어 주는 여성.
마리아 데 그레시아.
시골에 작은 영지를 거느리고 있는, 이비사 자작가의 막내딸인 둘째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첫째 공작부인과 달리, 조용하고 주변을 무척이나 잘 배려해 주는 자비로운 귀족이었다.
지금처럼 서자인 나도 차별하지 않았고.
물론 성격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딸밖에 없으니 나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지도 몰랐다.
음,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좀 성격이 꼬여 있는 것 같은데.
고개를 흔들어 허튼 생각을 날려 버린 뒤, 난 앞을 바라보았다.
정면에는 내 아버지인 공작이 서 있었다.
그 옆에는 나이 든 총집사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서 모셔 온 신관도 보였다.
하지만, 난 날 노려보는 공작의 시선에 사로잡혀 버렸다.
꽤나 무서웠다.
"이쪽으로 와라."
공작은 담담한 목소리로 어머니 뒤에 서 있는 날 불렀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행히 경직된 몸이 풀렸다.
걱정스러운 얼굴의 어머니와 하녀들의 시선을 받으며 난 앞으로 걸어갔다.
자박, 자박.
석실 안에는 어린 내 발소리만 들렸다.
발소리가 그치고, 난 공작 앞에 멈추었다.
날 잠시 쳐다본 공작이 입을 열었다.
"오늘 알렉스의 6번째 생일을 맞아 각성식을 시작하겠다."
공작의 말에 난 찡그려지는 눈썹을 억지로 폈다.
각성식에서도 이름만 불릴 줄이야.
역시 몇 년 전에 들었던 말은, 공작의 아들로 받아 준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단지 각성일까지 보호해 준다는 말일 뿐.
역시 서자는 공작가의 일원이 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각성식을 거행한다는 것은 혹시나 하는 기대일 뿐.
'기회를 준다고 생각하는 걸까?'
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런 상황이면 각성해도 고생길이 펼쳐질 뿐이었다.
난 각성을 못 해도 상관이 없었다. 공작, 귀족이라는 위치는 그 권력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건국 당시 왕실에서 분리된 우리 그레시아 공작가는 먼 옛날 용사 일행이었던 카를로스 기사의 능력을 이어받아……."
덕분에 긴장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난 공작이 이어 가는 예식 연설을 귓가로 흘려들으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담담한 얼굴로 연설을 다 듣자, 공작은 묘한 얼굴로 날 바라봤다.
난 그러든지 말든지 식이 진행되기를 기다렸다.
공작의 얼굴에 떠올랐던 표정은 금세 사라졌고, 곧 식을 진행했다.
"각성을 시작하겠다."
공작은 굳은 얼굴로 손을 올렸다. 드디어 각성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각성.
상속 능력을 깨우는 시간.
하지만, 난 각성일에 한 가지 더 노리는 것이 있었다.
'자동 저장 시점'이 저장된 지도 벌써 몇 년.
앞으로 죽게 된다면 마지막 죽은 시점. 1살 아기 때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게 분명했다.
미친.
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기 시절을 다시 겪으라니.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똥오줌을 가리고…….
난 절대! 다시 그런 일을 되풀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중간에 자살할 수도 없었다. 남에게 죽는 것과 달리 자살하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냥 생이 끝나 버릴지도 몰랐고, 시점이 저장 안 될지도 몰랐다.
결국, 이 시간까지 끌고 온 것은 각성일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공작. 이번 생애의 내 아버지가 머리에 손을 올렸다.
"지금부터 선조로부터 이어 온 능력을 깨우겠다."
공작의 무뚝뚝한 목소리와 함께 내 머리를 덮고 있는 손이 조금 따뜻해졌다.
아버지의 사랑과 같은 따뜻함은……. 개뿔.
말 그대로 손에서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뜨거워!
"움직이지 마라! 뜨겁다고 들었을 텐데! 참아라!"
움찔거리는 나에게 공작이 호통을 쳤다.
하지만, 이렇게 뜨겁다고 말해 준 사람은 없었다.
젠장, 또 중간에 말이 씹힌 거야?
각성 때까지 소금을 뿌리다니. 난 고통 속에서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난 열기를 참으며 쓰러지려는 몸을 곧추세웠다.
손에서 출발한 열이 머리를 감쌌다. 열기가 머릿속으로 점점 파고들었다.
열기에 눈앞이 뿌옇게 변하고, 의식이 흐려졌다.
통증이 머릿속을 마구 찔러 댔고, 열기가 온몸을 불태웠다.
하지만, 난 참아 냈다.
엄청난 고통이었지만, 죽는 것에 비하면 별거 아닌 고통이었고, 열기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화악!
고통이 사라졌다.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문장.
[각성에 성공했습니다. 새로운 '저장 시점'이 설정되었습니다.]
나이스! 기대했던 대로였다.
자동 저장이라는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죽음을 반복해야만 저장이 가능할 리 없었다.
이 능력이 나에게 주어진 벌이 아니라면, 죽지 않아도 중간에 저장할 시점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6살 생일. 난 새로운 저장 시점을 얻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머리 깊은 곳에 전에 없던 것이 느껴졌다.
뇌처럼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운 기관이 머릿속에 생겨나 있었다.
"!"
눈을 뜨니 공작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에 생긴 기관이 아니더라도, 공작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다.
기쁘게도, 아니 아쉽게도.
난 각성에 성공했다.
* * *
"각성했군."
공작이 내 각성을 확정적으로 선언하자, 사람들은 모두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첫째 공작부인의 모습과 이맛살을 찌푸린 첫째 공자 시몬. 입을 딱 벌리고 있는 둘째 마누엘.
둘째 부인도 무척이나 놀란 듯했고, 하나밖에 없는 누나도 놀란 표정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기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대기하고 있던 신관과 총집사도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역시 모두 내가 각성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무척이나 복잡한 표정을 짓고 계셨다. 걱정과 기쁨이 섞여 있고, 한숨과 대견함이 묻어 나왔다.
나도 어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예상과 전혀 다른 결과였다.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전이었으면 기쁨에 겨워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심경이 복잡할 뿐이었다.
더구나 내가 받아들인 각성 능력은 무척이나 애매한 능력이었다.
머릿속에 새로운 기관이 생겨난 뒤에
난 내 능력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손을 다시 찾은 것처럼.
어떤 능력이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 바로 알게 되었다.
특별한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충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훈련을 받고, 싸움의 경험을 쌓으면 점점 육체가 강화되는 능력.
쩝. 이렇게 설명하니 일반인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군.
하지만, 그래도 일반 평민들과 같지는 않았다. 성장하는 속도도, 성장의 한계도 보통 사람과 달랐다.
더 빨리 성장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을 정도로 강해지게 만들어 주는 능력이었다.
물론 끝도 없이 강해지지는 않겠지만.
그러니까, 허접스럽게 보여도 마냥 허접하지는 않은 능력이라는 것이다!
역시 애매한 능력이다.
"그래, 무슨 능력을 상속받은 거지?"
앞에 서 있던 공작께서 친히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나에게 처음 하는 질문이었다. 그것도 말 속에 일말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
역시, 가문에 도움이 될 듯하니 바로 처우가 달라졌다.
덕분에 기분이 무척이나 나빠졌다.
공작에게 먼저 사과의 말을 꺼냈다. 마음속으로.
'미안하게도 가문에 그리 도움이 안 될 듯한데요.'
그와 동시에 나이답지 않은 대답을 했다.
"육체 강화 계열로 보입니다. 훈련 성취가 일반인보다 무척 높아지는 것 같습니다."
막 6살이 된 아이의 앳된 목소리였지만, 난 공작을 바라보며 똑 부러지게 대답했다.
"풋!"
옆에서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에다 작게 들리는 안도의 한숨 소리까지.
비웃는 녀석은 뻔했고, 한숨 소리는 첫째 공작부인의 것이 분명했다.
총집사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육체 강화 계열이라, 특이한 능력이군요. 분명 선조이신 용사 카를로스 님이 가지고 계신 능력 가운데 비슷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총집사의 말이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았다.
그동안 도서관급 서재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분이었다.
몇 년간의 노력 덕분에 나도 선조 카를로스가 가지고 있던 능력을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먼저 직계인 왕실에 내려오는 [마나 감응력].
이 능력을 깨달으면, 세상과 몸속에 있는 마나를 눈으로 보듯 느끼고 다룰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현왕과 두 왕자가 이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왕실의 분파인 이곳 그레시아 공작가에 내려오는 능력인 [마나 회로 구축법].
속칭 [심법]으로 불리는 마나 순환 기법으로, 몸 밖으로 유형화된 마나를 뿜어내기 위한 기술이었다.
카를로스 기사는 네 개의 심법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심법들을 돌아가면서 그레시아 공작가 일족이 얻어 왔었다.
물론, 오랜 역사 속에서 카를로스 기사의 다른 능력을 상속받은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와 같은 능력을 얻은 사람은 내가 알기론 한 명도 없었다.
'거기다 꽤나 허접한 능력으로 보이니…….'
나름 성장형 능력처럼 보였지만, 다른 능력도 어차피 다 훈련과 시간이 지나면 강해지는 능력들이었다.
귀족이 쓰는 능력들은 거의 다 마나를 기반으로 한 능력들이었다.
마법도 마나를 가공해서 사용하는 것이고, 검으로 내뿜는 검기도 몸속의 마나가 유형화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모든 마나의 기반을 다룰 수 있는 왕실의 능력이고 비록 육체 한정이긴 하지만 공작가도 마나의 기반을 다룰 수 있어 이만큼 귀족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마나와 전혀 상관없는 육체 강화라니.
잘하면 기사급이나 되려나.
이래서야 귀족으로 불리기도 쉽지 않을 듯했다.
'아니, 잠깐. 허접한 능력도 나쁘지 않은 것 아냐?'
난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놀랐던 표정들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고, 어머니 표정도 그리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렇군. 나쁘지 않았다.
나 같은 서자에게 딱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평민으로 떨려 나가지 않아도 되는, 귀족 언저리에 딱 걸칠 수 있는 능력.
잘하면 조그만 마을의 영주가 되어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승 귀족 정도만 줘도 땡큐인데.'
상속 능력을 받았다고 해도 자작급 이상은 언감생심이었다.
'좋다. 묻어간다. 5년을 살아남았다. 이대로 늙어 죽을 때까지 버티기다!'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니, 공작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육체 최적화] 능력을 상속받은 건가."
공작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가까이 있는 내 귀에 들려왔다.
아무래도 내 강화 능력의 원래 이름은 [육체 최적화]였나 보다.
뭐, 이름은 별 상관없지만, 문제는 공작의 표정이었다.
항상 무표정하던 공작의 표정이 바뀌어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공작의 눈빛이 뭔가 맛있는 먹이를 눈앞에 둔 늑대의 그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