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화. 도화(桃花)
“고장생이 아니, 관운장이. 네가 정신이 있는 새끼냐?”
187년 봄, 기주 안희현.
마궁수 관우는 잠시 현위 유비를 올려다보다 피식 웃었다.
“뭘 말입니까?”
“몰라서 묻냐? 내가 독우한테 뇌물 주려고 챙겨놓은 인삼, 네가 빼돌렸지?”
“그랬지요.”
“이번에는 누구냐?”
“소삼이네 막냇동생이 시름시름 앓기에 줬습니다. 그거 달여 먹고 깨끗하게 나아서 잘 뛰어논다고 하더군요.”
잠시 동안의 침묵.
끝에 유비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원수만도 못한 새끼.”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송구합니다, 어르신. 지금쯤 독우가 뇌물이 없다고 날뛰고 있겠군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처리하긴 뭘 처리해? 너 독우가 누군지나 아냐? 자사부 사람이라고, 자사부! 현위 휘하의 마궁수가 뭘 처리하겠다는 거야!”
소리를 버럭 지르는 유비.
그러나 관우는 평온하다. 일어나 유비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르신, 3년 동안 폐를 너무 많이 끼쳤습니다. 품팔이하던 이놈을 거둬 주시고, 좌전도 가르쳐 주시고, 군공까지 세우게 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했습니다. 이놈은 벼슬길은 영 아닌 것 같으니, 이제 어딘가로 또 떠나렵니다. 독우는… 떠나기 전에 이놈이 조용히 시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그때, 문이 드르륵 열렸다.
“아주 지랄을 하는구만. 어이 관씨, 여기 나와서 독우 꼴이나 좀 보시오.”
관우에게 퉁을 놓는 건 보궁수 장비. 큼지막한 눈망울과 수염 없는 매끈한 턱선을 가진, 썩 잘생긴 청년이었다.
문을 나서 보니 놀라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아니, 누가 사람을 이렇게…….”
사람인가, 떡인가?
흠씬 두들겨 맞아서 얼굴이 본래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해 버린 관리 하나가 수레에 실려 누워 있었다.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는데, 구타당하며 대소변을 지렸는지 비단 관복에서 지린내가 진동했다.
“장 대협, 이자가 독우요?”
“그렇소.”
“누가 자사부의 관리를 이렇게 만든단 말이오?”
“관씨. 자꾸 모르는 척할 거야? 그럼 누구겠소?”
미청년 장비가 짜증을 버럭 냈다. 관우의 눈이 천천히 유비에게 돌아갔다.
“…어르신?”
“아니, 그게, 독우 이 새끼가…….”
우물거리는 유비를 대신해 상황을 설명하는 장비.
“인삼을 어린 여자아이가 먹었다는 걸 알고, 그럼 인삼 먹은 아이와 교접이라도 해야겠으니 끌고 오라고 난리를 치지 뭐요.”
“아아.”
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유비는 성격상 그대로 독우를 때려죽이려고 했을 것이고, 장비가 간신히 말려서 목숨을 붙여 놓은 게 틀림없었다.
유비는 그렇게 수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대형은 죄를 지었으니 당연하고, 관씨는 앞으로 죄를 지을 테니 당연하지. 그런데 나는 왜!”
관우와 장비도 수배자가 되었다. 아무래도 독우가 세 사람 모두 공범이라고 증언한 모양이었다.
한참 울분을 터뜨리던 장비는 이내 냉정을 되찾고 두 사람을 불러 모았다.
“일단 때를 기다립시다.”
“때라니, 무슨 때?”
“황실의 후예라는 자가 이렇게 무식해서야. 지금 조정에는 대장군 하진이 집권했는데, 십상시와 한 판 붙을 분위기 아니오?”
“그렇지.”
“금군은 개판이 된 지 오래고, 하진은 군사가 필요하지. 조만간 모병이 있을 것이오. 그때 공을 세우면 사면될 수 있소.”
“오오! 그런 방법이!”
손뼉을 치면서 좋아하는 유비.
조용히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관우.
그리고 울분에 차서 소리치는 장비.
“대형하고 관씨가 사고 친 게 한두 번이오? 내 이번에는 맹세를 받아야겠으니 그리 아시오.”
“장 대협, 무슨 맹세 말이오?”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죽을 때는 한날한시에 죽자! 뭐 그런 거 있잖아!”
장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상식을 가진 연나라 귀족의 후손으로서, 유비와 관우를 통제하려면 그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 * *
32년 후, 사례 산양현.
관우의 눈앞에 있던 마초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아래다.’
마초는 치란을 땅에 닿을 듯 늘어뜨리고, 낮은 자세로 관우를 향해 돌진했다.
척.
관우는 청룡도의 날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마초가 자신의 간격에 들어오자 지체없이 청룡도를 올려 쳤다.
쾅!
치란과 청룡언월도가 부딪히며 폭음이 울렸다. 마초의 몸이 들썩이며 몇 발짝 뒤로 밀려났다.
반면 관우는 땅에 뿌리를 박은 듯 서 있었다.
“비록 성씨는 다를지언정.”
앵속 기운 때문일까.
관우는 좀처럼 하지 않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마초를 향해 다가갔다.
“형제의 의를 맺었으니, 어렵고 위험할 때 서로 도울 것이다.”
콰직!
관우는 마초를 향해 청룡도를 내리찍었다.
마초는 관우의 일격을 피하지 않았다. 단단히 땅을 딛고 선 채, 무게가 청룡도의 십 분의 일밖에 안 되는 치란으로 청룡도의 거대한 날을 막아내고 있었다.
부드득.
마초는 이를 갈며 왼손으로 치란의 칼등을 잡았다. 그리고 청경의 수법을 쓰며 치란을 크게 접었다.
휘청.
청룡도와 청룡도를 쥔 관우의 무게중심이 동시에 흔들렸다. 마초는 그대로 청룡도를 따라 치란을 미끄러뜨렸다.
끼이이익.
퍽!
치란은 청룡도를 쥔 관우의 팔뚝에 박혔다. 선혈이 터져서 마초의 얼굴에 튀었다.
그러나 관우의 팔은 잘리지 않았다. 관우는 팔뚝에 칼을 문 채로 마초의 몸을 끌어당기며 장을 뻗었다.
쾅!
마초의 등에 달린 찰갑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마초는 이를 악물고 다음 수를 출수했다. 주먹으로 관우의 명치를 후려친 것이다.
퍽!
이번에는 관우가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팔뚝에 물려 있던 치란이 빠지며 다시 한번 선혈이 솟구쳤다.
관우는 수염을 한 번 쓸어내리고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오, 대장군.”
“동감이오, 관공.”
“대장군은 무공을 잊으셨나 보오. 관모는 체구가 크니, 이런 식으로 싸우면 대장군이 관모를 당해낼 수 없소.”
마초에게 조언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마초는 듣지 않았다. 푸른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씩 웃을 뿐이었다.
“내 상대가 무성 관우라면 그렇겠지. 하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수만 명을 전쟁터로 밀어 넣는 필부에게 내가 당할 것 같은가.”
마초는 다시 한번 관우에게 달려들었다.
누구에게나 보일 법한 큰 동작이었다. 치란을 두 손으로 단단히 잡고, 한껏 뒤로 젖힌 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온몸을 비틀며 휘둘렀다.
쉬익.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공격 중간에 촌경의 수법으로 가속하니 칼끝이 더욱 빨라졌다.
관우는 청룡도를 세워 마초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했다.
쩡!
날카롭고도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뒤로 두 발짝 물러난 관우는 거기서 다시 중심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중심을 잡으니, 어느새 마초가 두 번째 일격을 넣고 있었다. 이번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이었다.
쩡!
타다닥.
관우는 세 발짝을 물러나서야 균형을 다시 잡을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힘이 가능한가.’
장비에게서도, 여포에게서도 느껴 보지 못했던 힘이었다.
푸른 눈을 부릅뜬 마초가 바로 세 번째 공격을 가했다.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였다.
관우는 청룡도를 수평으로 들어 올려 마초의 공격을 막으려 했다.
쩌엉!
마초가 휘두른 치란은 그대로 청룡도의 자루를 두 쪽으로 가르고, 관우의 가슴팍을 베어 내렸다.
촤아악.
약간의 시차를 두고 가슴의 상처가 벌어졌다. 비스듬하게 세로로 난 상처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쳐서 마초의 목덜미에 떨어졌다.
“…….”
아무도 말이 없었다.
관우를 밀어붙이는 마초의 무위를 보자 백이병도, 마가군 병사들도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이 내려앉은 전장에, 오직 관우가 중얼거리는 혼잣말 소리만 울릴 뿐이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나지 않았으나, 한날한시에 죽기를 바라며.”
퍼억!
관우는 자루만 남은 왼손의 청룡도로 마초를 후려쳤다.
마초는 치란으로 막았으나 허사였다. 자루에 실린 힘 때문에 그대로 허공에 두 발이 붕 뜬 채 2장을 뒤로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큭!”
얼른 굴러서 일어나는 마초에게 관우가 천천히 다가왔다. 오른손에는 자루가 한 자만 남아서 박도처럼 돼 버린 청룡도를 들고 있었다.
“은의를 저버리는 자는 하늘과 사람이 함께 벌할 것이다.”
끼이익!
마초는 치란을 뻗어 관우에게 먼저 달려들었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히게 하여 무게중심을 흔들었다.
천하제일 고수 두 명의 청경이 맞부딪혔다. 청룡도와 치란의 날이 서로를 긁어내며 불꽃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관우가 밀려났다. 마초는 그대로 한 발짝 전진하며 치란을 사선으로 베어 내렸다.
촤악.
큰 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전장에 모인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관우의 청룡도 날이, 세로로 길게 두 쪽으로 잘라진 것이다.
“이런.”
관우는 못쓰게 된 청룡도를 던져 버렸다. 대신 왼손에 쥔 자루를 들어 올렸다.
푹.
그러나 마초가 더 빨랐다. 마초는 치란을 두 손으로 쥐고 관우의 가슴에 깊숙하게 찔러 넣었다.
“관공!”
그제야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백이병들이 관우를 부르는 소리였다.
“쿨럭.”
관우는 다시 한 움큼의 피를 토했다. 그리고 마초는 그 틈에 치란을 자루만 남을 때까지 박아 넣었다.
관우는 그 상태로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후, 마초의 사자 투구를 후려쳤다.
깡!
사자 투구가 벗겨져서 날아갔다. 마초는 그대로 미끄러졌다. 관우의 몸에 박혀 있던 치란이 뽑히며 다시 한번 선혈이 튀었다.
“컥…….”
마초는 바로 일어나려 했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치란을 짚고 간신히 일어날 수 있었다.
짧은 시간 너무 많은 힘을 쏟아낸 탓일까.
아니면, 눈앞에 있는 관우가 너무 강한 탓일까.
청룡도는 부서졌다. 몸에는 수많은 치명상을 입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하지만 관우는 여전히 우뚝 서 있었다.
“이제 끝내야겠군.”
마초는 치란을 들어 눈앞에 겨눴다.
“양왕 마초가 말한다. 나는 손수 이 싸움을 끝내고, 새 왕조를 세울 것이다. 위로는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천하 백성들을 평안케 할 것이다.”
“…….”
“관우는 내 칼을 피하지 말라.”
저벅. 저벅.
마초는 치란을 세운 채 관우에게 다가갔다.
공허한 눈으로 마초를 바라보던 관우가 문득 혼잣말을 했다.
“위로는 나라의 은혜를 갚고…….”
32년 전.
유비, 관우, 장비가 모여서 했던 그 맹세였다.
“…아래로는 뭇 백성들을 평안케 할 것이다.”
관우의 눈에 마초가 치켜든 칼날이 가득 들어왔다.
절초 낙일(落日)의 수법이었다. 마초는 그대로 사선으로 치란을 내리쳤다.
콰드득!
쇄골이 부러지는 소리.
그러나 관우는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치열한 싸움 끝에 날이 망가진 탓인지, 치란은 그 이상 박혀 들어가지 않았다.
칼을 쥐고 있는 마초에게도 더 이상 남은 힘이 없었다. 마초는 얕은 숨을 토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제기랄.”
척.
관우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파고든 치란의 날을 잡았다. 손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대장군.”
“관공.”
툭.
마초의 어깨에 뭔가가 떨어졌다.
복숭아 꽃잎.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근처의 복숭아나무 하나가 때 이르게 핀 모양이었다.
“부디…….”
관우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들어 하늘을 봤다.
하늘 가득, 복숭아 꽃잎이 흩날리고 있었다.
“성군이 되시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관우는 자신의 어깨에 박힌 칼날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그었다.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날이 뭉개진 칼날이 관우의 몸을 느릿하게 끊어 내려갔다. 마초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억센 힘이었다.
잠시 후.
관우의 눈에서 빛이 사라지고, 백이병들이 무기를 땅에 내던졌다.
219년 2월, 복숭아꽃이 흩날리는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