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연진 전투 (2)
219년 1월.
새해가 되고 보름이 넘게 지나자 슬슬 날씨가 풀리는 게 느껴졌다.
지독하게 추운 겨울이 지났다. 얼어붙었던 황하에도 다시 물이 흘렀다.
육손은 그때 전진하기 시작했다.
“적은 습지에 진을 쳤다. 눈이 녹았으니, 지금쯤 적진은 진흙탕이 되어 있을 터.”
예상대로였다.
장비가 이끄는 2만 연군은 진흙탕에 빠져 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겨울 추위로 인한 손실도 적지 않았다.
반면 10만 마가군은 상대적으로 추위로 인한 손실이 덜했다.
“방덕, 장료 두 분이 정면에서 적을 상대하십시오. 그 사이 감녕 장군이 황하를 통해 우회해서 적의 뒤를 찌릅니다.”
간결하지만 가장 효율적인 전술이었다.
방덕, 장료, 감녕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 출진했다.
육손은 말을 타고 끊임없이 오가며 전장을 살폈다.
‘여기서 싸움을 결정지으려 할 필요는 없다. 장익덕의 예봉을 꺾으면 우리 군단의 임무는 다하는 것이다. 대장군이 직접 이끄는 두 번째 군단이 결판을 낼 것이다.’
10만 단위의 군단을 교대로 투입하며 차륜전을 하는 것.
그것이 마초의 작전이었다. 육손이 연진에서 상대를 저지하면, 이제까지 실전을 치르지 않았던 마초의 10만 대군이 투입되어 육손과 교대하는 것이다.
지치고 피로한 연군 5만이 당해내기는 무리였다.
한편, 연군을 이끄는 장비는 거대한 두 팔뚝으로 팔짱을 낀 채 전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가군의 양익을 이끄는 방덕과 장료가 조금씩 전진해 왔다. 마가군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마가군이 준비를 잘했군. 이거 어렵겠는데.”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태연한 말투.
씩씩거리던 위연이 장비의 옆으로 와서 물었다.
“장군. 전황이 어렵습니다.”
“그래. 어렵지.”
“뭐 책략 같은 거 없습니까?”
“그런 게 있겠냐? 딱 보니까 마가군의 육손이라는 놈은 책략 따위가 통할 상대가 아니다.”
“그럼 뭐 어떻게 하려는 겁니까?”
“어디 보자.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장비는 능청스럽게 말을 돌렸다. 답답한 것은 위연이었다.
“관공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언제 올지 알고요? 그리고, 장 장군도 관공 못지않은 천하 용장 아닙니까. 빨리 출진해서 저놈들을 도륙하는 게 옳습니다.”
“거 시끄럽기는. 첫째, 나 혼자 싸울 때와 운장 형과 같이 싸울 때의 위력은 전혀 다르다. 둘째, 우리 군사들이 지쳤으니 운장 형의 부대를 앞세워야 한다. 셋째,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게 가장 큰 문제이니 이걸 돌릴 만한 계기가 필요하다.”
장비는 그렇게 말하고 위연의 어깨를 툭 쳤다.
“어제 전령이 와서 소식을 전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미리 준비하고 있어라.”
관우가 곧 온다.
장비는 그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다.
전황은 계속 나쁜 쪽으로 흘렀다. 겨우내 추위와 싸우느라 지친 연군은 방덕과 장료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자, 장군! 장군!”
부장 탁응이 장비에게 헐레벌떡 달려왔다. 숨이 턱에 차 있었다.
“무슨 일이냐?”
“왔, 왔습니다! 관공이 왔습니다!”
“오호.”
장비는 팔짱을 낀 채 씩 웃었다. 순수한 기쁨의 표시였지만, 주변 사람들에게는 영락없는 악귀의 표정으로 보였다.
장비의 등 뒤, 황하의 동쪽에서 한 무리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는 큼지막한 군기를 올리고 있었다.
상장군(上將軍) 관우(關羽).
장비는 군기를 확인한 뒤 탁응에게 말했다.
“운장 형이 왔다. 전군에 알려라.”
“관공이 오셨다!”
“관공이다! 관공이 오셨다!”
패색이 짙던 연군 병사들 사이에 관우의 이름이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으아아압!”
계속 밀려나던 연군 병사 하나가 별안간 방패를 앞세워 마가군 진영에 돌진했다.
마치 그것이 신호인 것처럼, 연군 병사들의 기세가 전혀 달라졌다. 더 이상 마가군에게 밀려나지 않았다. 저마다 창과 방패를 단단히 잡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장료는 실눈을 가늘게 뜨고 투덜거렸다.
“다 죽어가던 놈들이 갑자기 왜 다시 살아나는 거야?”
퍽!
장료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며, 손으로는 참마검을 휘둘러 적병 한 명의 머리를 날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방덕이 활을 꺼내며 대꾸했다.
“지난 10년간 뭘 했나 했더니, 유주에서 아주 거하게 휘젓고 다녔나 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병사들이 이렇게 따를 리가 있나.”
“으음, 원상이나 공손도 상대로 활약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변방의 무장세력일 뿐.
군공이라면 방덕이나 장료가 관우에게 꿀릴 것이 없다. 방덕과 장료는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뒤 계속 전진했다.
“기죽지 마라! 적들은 연주를 거쳐 여기까지 왔으니 피로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적들이 진을 친 곳은 습지다. 아무리 관우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그때였다.
우르릉.
천지가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뭐지? 천둥인가?”
여기저기서 군사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가운데, 장료와 방덕은 동시에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이런 빌어먹을.”
우르르릉.
어느새 황하의 물이 불어나 있었다.
홍수였다. 그것도 수십 년에 한 번 있는 대홍수였다.
“피해라! 모두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
황하의 중류는 혹독하게 추운 북쪽 오르도스 고원을 흐르다가, 남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다시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그래서 겨울이 되면 중류가 얼어붙고, 하류의 수량은 극히 줄어든다. 그러다 봄이 되어 얼음이 녹으면 하류의 물이 급격하게 불어나며 홍수가 일어나는 것이다. 올해는 겨울이 유독 추웠으니 얼어있던 물의 양도 더욱 많았다.
오르도스 고원 출신인 장료가 투덜거렸다.
“그건 알지만 올해는 유독 심하군. 정월이면 아직 삭방에는 황하가 얼어 있을 텐데?”
“겨울이 추웠던 만큼 봄이 일찍 왔나. 낭패로군.”
방덕은 조용히 인상을 찌푸렸다.
장관이었다.
황하가 범람하며 물길이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 홍수 때문에 마가군과 연군이 자연스럽게 싸움을 멈춘 사이, 황하는 방향을 틀었다.
낮은 언덕과 제방들이 무너지며, 황하는 마가군의 진지 쪽으로 흘렀다. 연군은 습지가 아닌 평지에 진을 친 셈이 되고, 마가군은 졸지에 습지에 갇히게 된 것이다.
불과 한 시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연군 진지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관공이 오시며 물길이 바뀌었다!”
“쳐라! 마가군을 한 놈도 남겨두지 마라!”
원래의 역사에서 관우의 마지막 전투로 알려진 형주 공방전.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전투는 홍수가 조조군 진영을 휩쓸며 관우의 승리로 끝난다.
방덕은 오래 전 마초가 해 준 ‘꿈’ 이야기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 참 신통한 꿈이군.”
전황이 바뀌었다. 습지에 갇혀버린 마가군을 향해 연군이 맹렬한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지금쯤 연군의 뒤를 들이쳐야 할 감녕의 금범군은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홍수에 적잖은 손실을 냈을 것이다.
장료는 바뀌어 버린 전황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방 장군. 저자는 진짜로 사람이 아니라 용인가 보오.”
“그럴지도 모르지. 용은 물을 다스린다고 하니까. 그래, 이제 어찌할 텐가?”
“어쩌긴 뭘 어쩌겠소. 저자가 용이라면…….”
장료의 실눈이 번쩍 뜨였다.
“용의 목을 베야지.”
“동감일세.”
방덕과 장료는 그대로 말을 몰아 관우를 향해 달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관우는 전장 한가운데에서 군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노숙이 후방을 맡는다. 장비가 선두에 선다. 관색과 위연이 각각 별동대를 이끌고 적의 요소요소를 무너뜨린다.
관우는 전장 중앙의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서서, 전황을 보면서 부대의 배치와 공격의 강약을 조절하고 있었다. 지휘는 나무랄 데 없이 정확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기였다. 관우가 서 있는 것만으로 연군 병사들은 힘을 얻었고, 마가군 병사들은 사기가 꺾였다.
두두두두.
앞장서서 달리던 장료가 참마검을 비껴들었다. 조금 뒤에서 따라가던 방덕은 각궁에 화살을 메겼다.
2대 1로 적장을 습격하는 것. 방덕은 자연스럽게 과거의 일을 떠올렸다. 마초와 함께 여포를 상대하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관운장과 여포는 승부를 내지 못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장문원의 무공은 여포와 처음 겨룰 때의 맹기보다 오히려 더 뛰어나고, 나 또한 마찬가지.’
끼이이익.
방덕은 활을 한껏 당겨 관우를 겨누고, 시위를 놓았다.
기척을 느낀 관우가 방덕을 돌아봤다. 그리고 아주 살짝 몸을 틀었다.
부웅!
화살은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빗나갔다. 관우의 희끗희끗한 수염 몇 가닥이 화살에 스쳐 휘날릴 뿐이었다.
화살을 피하는 것까지는 방덕이 예상했던 범위 안이었다. 방덕은 곧바로 편곤을 꺼내 들고 관우에게 달려들었다.
한편 먼저 달려들던 장료는 어느새 관우의 바로 앞까지 육박해 있었다. 화살을 피하느라 관우의 동작이 흐트러진 틈을 노리는 것이다.
“좋아. 빈틈이다!”
장료는 참마검을 겨누고 관우에게 돌진했다.
장료를 보는 관우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강한 자로군. 그대는 나를 벨 수 있겠나.”
“두고 보면 알 것 아닌가.”
스윽.
관우는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청룡언월도를 들었다. 병장기끼리 부딪히게 해서 장료를 밀려나게 할 생각이었다.
82근에 달하는 청룡도의 무게, 거기에 관우의 힘이 합쳐진 일격이 덮쳐 왔다.
그 순간, 장료의 눈이 번쩍 떠지며 관우의 움직임을 읽었다.
부우웅!
장료는 그대로 몸을 뒤로 눕히며 왼손에 든 참마검을 뒤로 뺐다. 관우의 청룡도는 아슬아슬하게 참마검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동안 장료의 오른손은 말안장에 걸어 둔 장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퍼억!
한껏 뒤로 누운 장료가 곡예 같은 움직임으로 장검을 휘둘렀다. 장검은 짧은 호를 그리며 관우의 목 옆부분에 박혔다.
흩뿌려지는 선혈.
“아니!”
“관공!”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소리.
그러나 정작 관우는 태연했다. 칼이 박힌 목에서 피가 뿜어지는 것을 개의치 않은 채 말했다.
“조금 부족하군.”
관우는 청룡도를 들지 않은 왼손을 뻗어 장료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주변 사람들의 눈에는 손을 툭 대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러나 관우의 왼손이 닿자 장료의 몸이 뒤로 쏘아져 나갔다.
쾅!
튕겨져 나간 장료가 땅에 처박히는 소리가 나고.
“컥…….”
뼈가 부러진 장료의 신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쨍그랑.
그리고 관우의 목에 박혀 있던 장검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뚝. 뚝.
관우의 피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순식간에 여러 개의 소리가 겹쳤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벌어진 입을 다물기도 전에 다음 상황이 벌어졌다. 편곤을 빼 든 방덕이 관우의 머리를 노리고 휘두른 것이다.
퍽!
관우의 청룡도와 방덕의 편곤이 부딪혔다. 편곤의 모편을 이루는 나무 자루가 관우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터져 나가고, 방덕의 손아귀가 찢어져 피가 튀었다.
그러나 모편에 두른 쇠테 덕분에 그 모양은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사이 쇠사슬로 연결된 편곤의 자편이 관우를 노렸다.
깡!
관우는 머리를 슬쩍 틀어 자편을 피했다. 자편은 관우의 쇄골을 치고 금속성의 소리를 냈다. 뼈가 으스러질 만한 일격이었지만, 관우의 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끼이익.
방덕의 말이 땅을 미끄러지며 균형을 잡았다. 관우와 한 수를 나눈 방덕은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말안장 위에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방덕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은 단 1합에 손이 망가져 병장기를 쥘 수 없게 되었고, 장료는 1합에 뼈가 부러져 땅바닥에 드러누워 있었다. 반면 칼에 베이고 편곤에 맞은 관우는 멀쩡해 보였다.
자신이나 장료 같은 맹장들 세 명, 네 명이 덤볐다면 어땠을까.
‘2대 1은 안 됐고, 3대 1로도 안 될 것이고, 4대 1도 장담하기 어렵겠군.’
무력으로는 관우를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방덕은 망가진 편곤을 던져 버리고 외쳤다.
“퇴각하라. 내가 뒤를 맡겠다.”
방덕은 다시 활을 꺼내 들었다. 망가진 손가락 대신 오른손의 약지와 새끼손가락으로 화살깃을 쥐었다. 조준이 부정확하겠지만, 어차피 정확하게 쏜다 해도 관우가 맞을 것 같지 않았다.
관우는 더 이상 투장에 집착하지 않았다. 다시 수신호를 내자 연군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몰아쳤다.
난전이 벌어졌다. 승패는 말할 것도 없이 연군의 대승이었다.
마가군은 악전고투 끝에 간신히 장료를 보호해서 퇴각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홍수로 인해 물길이 바뀐 것이 첫 번째 패인.
관우와의 투장을 통해 전황을 바꿔 보고자 했던 방덕과 장료가 실패한 것이 두 번째 패인이었다.